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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최초 3회 연속 보건복지부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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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회복수기

다사랑중앙병원에서 치료받은 환자의 가족분들이 보내주신 생생한 경험담입니다.
알코올중독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꺼이 치료의 조력자가 되어 가정의 평화를 되찾으신
알코올중독자 가족들의 회복수기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알코올 중독 가족들에게 큰 희망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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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알코올 중독 가족수기] 힘을 드리고 싶습니다

[2019 가족수기 공모전 참가상]   힘을 드리고 싶습니다   김○○   수년 전 개인 사업이 운영난에 빠지며 우리 내외는 힘든 시간을 보내왔습니다. 이를 극복하고자 제가 열 길 물속을 허우적대는 동안 남편은 술로 세월을 보내게 됐습니다. 낮에 술을 마시고 종일 자니 밤과 새벽에는 잠도 안자고 밖에서 누가 부른다며 뛰어 나아가 “너, 뭐하고 있어.”라며 허공에 헛소리를 하거나 집 앞 냇가에 들어가 한 쪽은 신발 신고 한 쪽은 맨발로 앉아 풀들을 뜯어 모으고, 낚시 가방 속에 사람들이 있다며 나오라며 혼자 얘기 하는 등 밤엔 늘 없어져 찾아 헤매곤 했습니다. 술에 취해 넘어져서는 갈비뼈 골절, 얼굴과 다리, 팔 등 몸이 성한 데가 없었지요.   남편은 결국 간경화, 알콜성 치매, 당뇨를 앓았습니다. 그때 저는 유방암 3기로 임파선까지 암이 전의되었죠. 수술 후에 항암치료, 방사선, 표적치료를 받으며 병원을 다니는 것도 저에게는 너무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게다가 남편의 병수발까지... 죽고 싶은 심정이었답니다. 가족들은 남편을 요양병원에 입원을 시켜야 한다고 했지만 그러다간 기억력이 더 나빠져 가족들마저 몰라보게 되고, 무남독녀 딸 결혼식도 참석하지 못하게 될 것 같아 불쌍한 마음에 더 정신줄을 놓지 않게 꼭 살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여러 병원을 문의한 끝에 다사랑중앙병원을 찾았고 김석산 원장님의 따뜻한 말과 치료 계획을 듣고 몇 달간 입원해 치료를 받은 끝에 지난 2018년 2월 17일 퇴원했습니다. 금주를 하면서 딸 결혼식에도 남편이 손을 잡고 데리고 나갔습니다. 지금은 예전 취미생활인 바둑, 바다낚시, 서예, 산, 여행도 하면서 ‘내가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셨는지 모르겠다.’며 손주 보는 재미로 지내고 있답니다.   금주를 하니 성품도 예전으로 돌아오더군요. 남편의 변한 모습에 제가 언제 살얼음판을 걸으며 살았었는지 믿어지질 않아요. 하나님께서도 제가 가여워 눈물 뿌린 기도를 들어주시질 않았나 싶습니다.   아직 남편은 남은 치료들이 있어 병원을 자주 오가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활을 드러내고 제 생각을 글로 적는 게 쉽지 않았지만 이 글을 쓴 이유는 남편처럼 저처럼 많은 변화로 혼란을 겪고 고생하고 계신 환우분들, 가족분들에게 힘을 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하루빨리 극복해 더 즐거운 삶을 사시길 기도하겠습니다. 

다사랑 2021-02-09

[2019 알코올 중독 가족수기] 밥차 끄는 우리 아빠

[2019 가족수기 공모전 참가상]   밥차 끄는 우리 아빠   임○○   나는 아빠가 술 마시는 게 싫다. 왜냐하면 아빠가 술을 마시면 다른 사람들은 괜찮은데 혼자서 취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술에 취하면 목소리가 커지고, 말투도 달라진다. 나와 놀기로 해놓고서 약속을 못 지키고, 엄마 일을 도와주기로 하고서도 아무 것도 못한 채 있다가 이도 못 닦고 아무데서나 누워서 잘 때도 있다. 술 냄새도 고약하다.   내 기억에 아빠는 거의 매일 술을 마셨다. 저녁을 먹을 때 아빠 자리에는 항상 얼음이 띄워진 컵이 놓여 있는데 아빠는 그걸 물이라고 했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는 그대로 믿었지만, 조금 커서부터는 아빠가 밥 먹을 때 술을 컵에 따라 두고 같이 마신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다섯 살쯤 되었을 때 일이다. 마을회관에서 잔치가 열렸는데 밥을 먹고 돌아와 아무리 기다려도 아빠가 오지 않았다. 슬슬 걱정되어서 엄마와 찾으러 갔더니 아빠는 술에 너무 취해 몸을 움직이기 힘들어하며 집에 오지도 못하고 비틀거리며 주저앉아 있었다. 나는 부끄럽기도 하고 속상해서 엄마와 함께 아빠를 부축해 집으로 데려갔다. 마을회관에서 집까지는 아주 가까웠지만, 계단을 올라가야 해서 많이 힘들었다. 계단은 겨우 올라왔지만, 풀밭을 걸어갈 때쯤 아빠가 벌렁 누워버려서 도저히 데려갈 수가 없었다. 엄마는 아빠에게 큰 소리로 얘기하고 등도 때리며 정신을 차리게 하려고 애썼지만, 아빠가 누워서 깔깔거리고 버티고 있으니 움직이게 할 수가 없어서 그대로 내버려 두고 들어왔다. 아직도 그때 캄캄했던 밤에 아빠의 휘청거리던 모습과 걱정되던 마음이 생각난다.   작년 봄, 우도에 여행을 떠나 아빠와 함께 올레길을 걸으며 재미있게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첫날 밤부터 아빠는 숙소에 묵은 다른 아저씨들과 새벽까지 술을 마셨고 결국 다음 날 일찍 일어나지도 못해 엄마와 나만 우도를 돌았다. 아빠와 함께 걷고 싶었는데 많이 아쉬웠다. 아빠는 다음 날 낮에도 혼자 술을 마셔 돌아오는 배와 차에서 계속 힘들어했다. 그런데도 그날 저녁 동네 아저씨와 또 술을 마시고는 아주 늦게 돌아왔다. 술 때문에 여행을 망친 기분이었다.   하지만 우리 아빠는 나를 정말 좋아한다. 다른 아빠들보다 친구처럼 함께 놀아준다. 배드민턴을 치고, 축구도 하고, 자전거를 타고 바닷가까지 다녀오기도 한다. 너무 신나게 놀아주다 여기저기 다치거나 아플 때가 있을 정도다. 책도 잘 읽어주고, 인형놀이도 해준다. 아빠랑 같이 하면 보드게임도 바둑도 재미있다. 아빠는 심심할 때 아무데서나 손가락으로 제로게임도 잘 하고, 차를 타서는 끝말잇기도 오래오래한다. 그런데 이런 아빠가 요즘에는 내 곁에 없다.   작년 추석을 함께 보내고 아빠는 잔뜩 짐을 꾸려서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했다. 처음에는 연락도 안 되고, 편지만 쓸 수 있었다. 내가 아빠에게 전화를 하면 연결해주는 아저씨가 받아서 “임?? 선생님, 전화 왔습니다!”라고 방송을 해주었다. 그러면 계단을 올라오는 아빠의 발소리가 들렸고 아빠는 헐떡이는 숨소리를 냈다. 하지만 전화할 때는 할 얘기가 많아도 조금밖에 못 했다. 아빠는 뒷사람들이 기다린다고 빨리 끊어야 한다고 했다. 편지에는 아빠가 술 끊는 사람들의 모임에 다녀오면 받는 열망팔찌를 넣어서 보내줬다. 나는 감귤농장에서 내가 직접 딴 귤을 보내줬다. 아빠가 편지에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할 때도 있었다.   요즘에는 아빠가 핸드폰도 가지고 다녀서 영상통화도 할 수 있고 아무 때나 전화도 걸 수 있다. 아빠는 이제 병원에서 밥차로 식사를 나르는 일을 한다. 아빠는 술을 전혀 안마시고 백일도 훨씬 넘게 지냈다고 자랑을 한다. 명상과 국선도도 매일 열심히 하고 있다. 야구 글러브나 수첩, 손수건, 권투하는 원숭이 인형, 그리고 운동화 같이 내게 필요할 것 같은 물건들을 자주 선물로 보내준다.   아빠는 내가 문병을 왔으면 하고 바라지만, 우리 집은 제주에 있고, 엄마 건강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서 한 번도 못 가보았다. 아빠가 밥차를 밀면서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싶고, 아빠가 탁구를 하는 곳에서 나도 탁구공을 던지고, 받고 싶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지난번 아빠가 석 달 만에 집에 왔을 때 아주 많이 달라졌다는 것은 못 느꼈다. 술을 한 번도 마시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밤에 잠을 자지 못했고 자신감 없이 지쳐 보였다. 그래서 내가 자장가를 불러 재워주었다. 가족과 자주 만나지도 못하면서 아빠 혼자 지내는 것이 힘들고 어려운 것 같았고 엄마와도 서먹서먹해 보였다. 작은 일에도 마음이 상하고 삐지는 것 같았다.   앞으로도 술을 마시지 않고 열심히 생활하면 아빠의 우울한 모습이 언젠가는 없어질까? 언젠가 치료가 다 끝나면 아빠가 한숨 쉬지 않고, 핸드폰만 쳐다보며 시간 보내지 않고, 내가 얘기할 때 내 눈을 바라보고 집중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때쯤이면 우리 가족이 다 함께 제주에서 살면서 같이 맛있는 밥을 먹고, 매주 교회에도 함께 갈 수 있을 것 같다.  

다사랑 2021-02-09

[2019 알코올 중독 가족수기] 나쁜 사람이 아닌 아픈 사람

[2019 가족수기 공모전 참가상]   나쁜 사람이 아닌 아픈 사람   김○○   나는 서른 살, 알코올 중독에서 회복중인 아빠의 딸이다. 술에 대한 나의 기억은 5살부터였다. 그 시절 시골에서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이 많아서 ‘알코올 중독’이 병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나의 할아버지 또한 매일 밤 술에 취해 밤새도록 폭언하고 살림을 부시면서 주사를 부렸고 경찰도 불렀다. 대처할 방법을 몰랐던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가 잠이 들 때까지 밖에서 추위와 어둠을 견뎠다. 언젠가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빠 또한 매일 술을 마셨고 뇌가 손상되고 성격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때때로 다른 사람 같은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유치원 때부터 하루도 눈물 흘리지 않고 잠에 드는 날이 없었다. 제발 하늘에 기도했다. 하루만 눈물을 흘리지 않고 자보고 싶다고 기도했다.   어느새 고등학생이 되었고 아빠의 증상은 날로 심해져 저녁만 취해있던 것을 넘어서 몰래 하는 음주가 매우 심해졌다. 안주도 없이 차에 숨겨둔 소주를 병째로 마셔 급하게 취했고 음주양도 증가했다. 이제는 몇 병을 먹는 건지 알 수 없어 집 주변의 빈 병들을 주우며 짐작할 뿐이었다.   나는 집에서 도저히 학업을 이어나갈 수 없어 안쓰러운 엄마를 홀로 남겨둔 채 자취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아빠의 증상은 날로 심해져 구역질을 시작했고 낮에도 술을 마시지 않으면 버티지 못했다. 나는 술을 마시고 링겔을 맞으면 뇌부종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아빠를 내과 병원에 모셔가 의사선생님께 도움을 요청했다. “아빠가 술을 드셨는데 구역질이 심해요. 위험하지 않은 약을 처방해주세요.” 그렇게 병원에 다녀와 증상은 완화되었지만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다.   시간이 지나 나는 성인이 되었고 알코올 금단 증상이 심해진 아빠를 더 이상 엄마가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아빠는 알코올 중독이 심해지면서 더 이상 아무 일도 하지 못했고 구역질과 함께 환시를 보기 시작했다. “검은 것들이 보인다. 무섭다. 옆에서 있어 줘.”하고 말씀하시는 아빠를 보면서 어린시절 술은 드셨지만 근육질의 몸으로 날 업어주던 아빠의 등이 한없이 초라해보였다.   나는 매일 아빠의 곁을 지키기 시작했다. 엄마가 생계를 위해 일을 나가시면 아빠를 따라다니며 감시했다. 그러면서 나의 공동의존이 심해져서 체중이 감량하기 시작했다.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아빠의 알코올 중독 치료를 위해 전문 교수님들, 알코올 중독 공동체 분들까지 만나며 병을 고치고자 노력했지만 아빠는 약간의 술에도 만취가 되는 상황에 까지 이르렀다. 알코올 중독에 대해 알게 되면서 A.A.모임과 알코올 중독 가족모임 등을 알게 되었지만 전문적인 A.A.모임에 가려면 다른 지역으로 가야하는데 술을 끊지 못하는 아빠를 모시고 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나마 종교가 있었기에 그저 매일 밤 엄마와 마주 앉아 아빠의 병이 좋아지기를 기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청청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서로를 의지하며 건강했던 엄마가 뇌출혈로 쓰러지신 것이다. 제일 먼저 병원에 도착하여 구급차에 실려 온 엄마와 마주했다. 엄마는 의식이 없었고 나는 불안한 마음에 엄마의 귀에 대고 “엄마, 아빠와 가족들은 걱정마세요! 제가 지킬게요. 엄마는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엄마에게 약속했지만 사실 나 혼자서 엄마없이 아픈 아빠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막막했다.   응급실에서 대전 모 대학병원으로 이송하여 수술까지 했지만 가망이 없다는 의사의 말에 아빠는 중환자실 문 앞을 떠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친척 어른들이 아빠를 같은 병원 정신과에 입원시켜 주셨다. 정신과 주치의 선생님께서는 이대로 두면 엄마보다 아빠가 먼저 돌아가실 것 같다고 이야기 하셨다. 그리고 보름이 지난 날, 엄마는 천국으로 떠나셨다. 엄마를 보내드리던 날 나는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 3일만 견디자. 술이 먹고 싶어도 여기서 안 좋은 모습 모이면 안 돼.” 나는 슬픈 상황에서도 장례식장에서 큰 일이 벌어질까 마음 편하게 슬퍼할 수 없었다. 아빠는 힘들어하셨지만 3일을 견디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아빠는 “일주일만 그냥 나를 나둬 줘.”라고 부탁하셨다. 그렇게 아빠는 엄청난 양의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술에 취해 화장실에서 머리를 다쳐 119를 불러서 응급실에 실려갔다.   응급실에서 취한 사람은 수술을 할 수 없다고 했고 정신과에 입원할 것을 권유했다. 나는 정신과 환자들과 알코올 환자들은 다르다고 생각했고 그 곳에서 힘들어하실 아빠를 위해서 다사랑 중앙병원에 아빠를 모셔달라고 친척 어른들께 부탁했다. 하지만 EMS차량에 붙잡혀 가는 아빠를 볼 자신이 없어 응급실 구석 끝 깜깜한 곳에 숨었다. 최근 2-3년 동안 아빠의 상황을 잘 알지 못했던 언니에게 “언니, 나 너무 무서워서 볼 수가 없어.”하고 말했더니 눈물을 닦으며 “언니가 가볼게.”하면서 언니가 내 손을 꼭 잡아줬다.   나는 마음이 너무 약해지고 지쳐있었다. 몇 년 전에도 아빠에게 모 알코올 병원에 입원하자고 권유한 적이 있었다. 당시 아빠는 금단현상으로 구역질이 너무 심해 스스로 입원했었다. 하지만 그 곳은 환자의 자율성과 인권을 존중하지 않았고 아빠는 정신이 피폐해져 체중이 7kg나 줄어든 상태로 한 달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EMS가 대기하고 있었지만 잘못된 병원에 보냈다는 죄책감에 집으로 모셨고 증상은 당연히 더욱 심해졌다.   다시 병원으로 보내는 마음이 너무 두려웠다.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다.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 후 일주일이 지났고 주말에는 회사를 안 가기 때문에 2시간 거리에 있는 다사랑중앙병원으로 찾아갔다. 의자에 앉아 계시던 아빠를 보고 반가운 마음 반 걱정되는 마음 반으로 “아빠 나왔어. 괜찮아?”하고 물었다. 아빠는 원망 섞인 눈으로 “일주일만 두라니까 왜 나를 입원시켰니?”라고 물었다. 나는 “아빠가 화장실에서 넘어져서 머리가 찢어졌는데 술 때문에 일반 병원에서는 처치를 할 수 없다고 해서 여기로 왔어. 전혀 기억이 없어?”하고 물었다. 아빠는 “머리가 꿰매져 있더라. 기억은 하나도 나지 않아.”하고 대답했다.   이미 심하게 진행된 알코올 중독 증상으로 취중에 기억상실이 매일 나타났다. 나는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 여기가 우리나라에서 알코올 치료를 가장 전문적으로 한다고 들었어. 우리가 이 병원 주변에 집을 구할 동안만 아빠가 치료를 받고 기다려줘.”하고 말했다. 아빠는 표정이 밝아지시더니 이전에 나쁜 기억으로 남은 알코올 병원에 비하여 다사랑은 시설도 매우 좋고 의료진들도 친절하다며 안심하셨다. 나는 아빠가 계시는 방에 가보았다. 주변에 다른 어른들도 많이 입원해 계셨다. 인사도 드리고 간식도 나누어 드리면서 아빠가 계시는 동안 부디 외롭지 않게 지내시기를 바랐다.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한 달이 되었다. 나는 그사이 다사랑중앙병원에서 주최하는 가족 모임에 서 다른 가족들의 회복 후기도 듣고 경기도에 집도 알아보게 되었다. 사회 초년생이었던 탓에 경제적인 부분이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다는 것이 겁도 났지만 아빠의 회복을 위해서라면 병원 가까이에서 살면서 끝까지 치료를 위하여 함께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한 달 동안 아빠는 나가고 싶다는 전화를 자주 해서 나의 마음을 힘들게 했고 심한 금단 현상으로 힘들어 했다. “아빠 금단 한 달이 제일 위험하다고 했어. 음주 욕구가 가장 강해지니 100일 동안 견뎌보자. 100일이 지나면 금단이 완화되면서 나와서 살 수 있을 거야.”하고 교육 받았던 내용, 책에서 읽은 정보들로 흔들리지 않고 지지하였다. 그 당시 내가 해줄 수 있는 도움은 아빠가 병원에서 금단 현상을 이기고 치료받게 해주는 것이었다.   아빠는 관리병동에서 3개월 이상 지낸 후 개방병동으로 가보자는 상담사 선생님과 나의 권유에도 “거기에 내려가면 재발된다고 하는 이야기가 많아. 다시 폐쇄병동으로 오고 싶지 않아.”하고 말씀하시면서 불안해 하셨다. 나는 “절대로 그렇지 않아. 상담사 선생님이 사회로 나오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하셨어. 아직 집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으니까 집을 이사할 때까지 용기내서 개방병동에서 지내보자.”하고 권유했고 아빠는 결국 개방병동에 내려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상담사 선생님과 동기 회복자분들과 친해진 아빠는 산책도 하고 즐겁게 생활하게 되셨다. 아빠는 “진작 내려올걸 그랬어. 이곳이 훨씬 좋다.”하고 말씀하셨고 관리병동에서 근거 없이 도는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셨다. 또한 병원에서 철저하게 외출 후에 이루어지는 음주 측정이 있었기에 나는 더욱 안심할 수 있었다.   드디어 아빠의 첫 외박이 이루어졌다. 더운 여름 날 나는 아빠와 함께 서울 언니 집으로 가기로 했다. 재발이 걱정되었지만 기대도 가득했다. 아빠를 모시고 가서 미용실에서 머리도 잘라드리고 곱창 집에서 곱창을 먹으면서 술 대신 시원한 음료를 마셨다. 꿈만 같았다. 내가 아빠와 이렇게 맑은 정신 상태로 마주볼 수 있다니! 그렇게 시작된 아빠의 금주 생활이 약 7년 정도 된 것 같다. 그 사이 마른 주정도 있었고 우울증, 심리적으로 불안해하는 상황도 많았지만 알코올 중독 회복자모임(A.A.)모임과 가족들의 지지, 아빠 본인의 지속적인 노력, 다사랑중앙병원 의료진의 도움으로 잘 지나온 것 같다.   나는 이전의 회복자 가족이 회복할 수 있다고 조언을 해준 것이 생각났다. 우리 가족은 절대 지나갈 수 없는 터널 같았고 그런 행운은 나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확신한다. 전문적인 기관의 도움을 받으면서 치료해야 할 질병이고 치료를 시작해야 회복 또한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알코올 중독 환자는 ‘나쁜 사람’이 아닌 ‘아픈 사람’이다. 암이 원해서 걸리지 않듯이 알코올 중독환자도 중독이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니다. 술은 한 사람의 뇌를 망가뜨리고 한 인생을 짓밟고 그 가족들의 행복을 빼앗아 간다. 지금 이 시간에도 술에 중독되어 가고 있는 가족이 있다면 알코올 중독 치료 전문 기관에서 회복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줘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소중한 한 생명과 가족들이 회복할 수 있는 결과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끝으로 아빠와 함께 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만들어 주신 나의 하나님, 하늘에서 보고 있을 천사 같은 내 엄마, 지옥같은 시간들을 잘 견뎌내 온 나의 아빠 그리고 알코올 치료 전문 이라는 기회 제공으로 알코올 중독자들과 가족들의 삶에 새로운 희망을 선물해주신 다사랑중앙병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사랑 2021-02-09

[2019 알코올 중독 가족수기]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지 않기를...

[2019 가족수기 공모전 참가상]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지 않기를...   노○○   한평생을 살면서 인생의 갈림길에 놓여진 위험한 상황을 우리는 몇 번이나 경험하고 살까요? 어떤 이는 운 좋게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채 생을 마감하는 자도 있겠고 또 어떤 이는 삶과 죽을 고비를 수시로 경험하다 지쳐 쓰러지며 생을 마감하는 자도 있을 겁니다. 우리는 선과 후 중 선택하라고 하면 어떤 것에 손을 드시겠습니까?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는 선을 택하고 싶지만 누군가에 의해서 후를 택하게 됐다면 정말 힘든 나날을 보내다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는 어이없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시간을 거슬러 2007년 나는 아이 둘을 데리고 초혼인 지금의 남편과 재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자하고 인상 좋고 특히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남편이 너무 믿음직스럽고 항상 감사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술을 그냥 좋아하는, 음주 문화가 좋아서 그냥 즐겨 마시는 그럼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나는 맥주 한잔 정도 마시는 상황이라서 남편의 기분에 맞춰 음주 문화를 맞춰주는 정도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남편의 음주 상태는 조금씩 강도가 있는 듯 보였으나 그냥 즐겨 마시고 술을 좋아하다 보니 그런가 보다라는 철없는 생각을 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때 남편의 알코올 상태를 조금 더 일찍 내가 파악했더라면 지금의 남편의 몸과 마음이 아주 건강한 상태로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다 한번 집안에서 다툼이 발생하면 물건을 집어서 던지는 그런 이상 행동도 보이기 시작하더니 정말이지 상상도 못했던 남편의 돌발행동에 가족들 모두가 초긴장 상태로 대비 아닌 대비를 하곤 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쩌다 한번이 매일 매일의 일상생활인 듯 알코올과의 시간은 거리를 두지 못한 채 일상생활로 바뀌어 버렸고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언어 폭력, 신체 폭력, 그리고 정신적 고통은 늘 그랬듯이 온몸과 마음을 너무 아프게 했습니다. 이유는 항상 터무니없는 이유였지요. 모든 게 당신 때문이야. 술 먹는 상황, 폭력 모두가 나 때문이라는 나에게 모든 원인이 있다며 원인 제공을 해서 그런다는 둥. 언제나 말도 안 되는 설명을 늘어놓으며 술과의 전쟁은 끝을 맺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세월은 흐르고 2016년 어느 날 하루가 모자라게 술을 먹던 남편의 행동이 조금 이상해 보였습니다. 얼굴색도 너무 까매진 것 같고 말수도 적어지며 그렇게 좋아하던 술도 이삼일 정도는 금주도 하며 불안한 증세도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차분하게 상황 설명을 들었더니 검은 변에 피까지 토했다는 어이없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너무 놀라서 급하게 서둘러 ㅇㅇ대학병원으로 가서 진단을 받았더니 청천벽력같은 간경변 진단을 받았습니다.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은 내 마음과 살을 에듯이 가슴 속으로 흘러내렸고 남편에게 어떻게 얘기를 전해야 할지 너무 막막했습니다. 의사의 소견대로 알코올성 간경변은 술만 금주 하면 더 나빠지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남편에게 살 길은 금주뿐이라는 이야기를 전해야 할 것 같아서 나는 숨김없이 병명을 모두 털어 놨습니다. 남편은 의외로 담담한 표정을 짓더니 한숨만 내 쉴 뿐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간경변에 대한 치료는 시작되었고 남편도 서서히 살아야겠다는 의지와 함께 술과의 전쟁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퇴원 후 한 달은 약속을 지키며 자신과의 싸움에 승리를 예고하는 듯 보였습니다. 일단 남편의 건강 악화로 인해 운영하고 있던 사업도 점점 힘이 부쳐 제대로 운영을 할 수가 없어 정리를 하게 되었고 남편은 당분간은 건강관리에 주력을 다 하기로 하였습니다. 남편 자신과의 싸움에서 가족들 모두는 승리하기를 바랬지만 너무 꿈이 컸었나 봅니다. 금주 선포와의 싸움에서 한 달이 지나자 남편은 또다시 악마의 소굴로 빠져 이번에는 더 심각한 상태로 하이애나처럼 먹이를 찾아다니듯 아침에 눈만 뜨면 술을 찾았고 가족들은 남편의 술로 인해 마음의 병이 더 커져만 갔습니다.   그렇게 하여 마지막으로 내린 결론은 병원에서 가끔 넌지시 알코올 중독 전문병원을 이야기하였 던 게 생각이 나서 시댁 식구들과의 협의하에 남편을 살려야겠다는 의지 하나로 2017년 9월 알코올 중독 전문병원을 찾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쩌다 왜... 이런 데까지 와야 하지?’ 너무 기가 막히고 이런 곳까지 오게 만든 남편이 나는 너무너무 미웠고 원망스러웠습니다. 일단 병원 관계자의 이야기를 듣고 조금은 안심되었지만 남편을 혼자 두고 와야 하는 내 마음은 너무너무 아파서 혼자 조용히 구석 모퉁이를 찾아가 한없는 눈물만 쏟아 냈었습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남편 병문안을 갔습니다. 저 멀리서 나오는 모습을 보고 또 한 번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시댁 식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주일 만에 퇴원을 결정하였습니다. 남편을 믿고 싶었습니다. 면회 온 나를 붙잡고 울면서 하는 그 말이 나는 모두 진심이기를 바랬습니다. 퇴원 후 남편은 조금 달라진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오래 가지를 못했습니다. 일주일이 지나자 예전의 모습은 그대로 나왔고 술을 아직도 끊지 못한 채 지금도 간경변 치료를 위해 병원을 수시로 드나들며 입원, 퇴원을 반복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차라리 그때 알코올 중독 전문병원에 더 있었더라면 간경변은 훨씬 더 많이 좋아졌을 텐데 가끔씩 이런 후회를 하기도 합니다.   가족까지 병들게 하는 알코올 중독은 정말 너무도 무서운 병입니다. 내가 아니 내 가족 중에 누군가가 알코올 중독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면 이 병은 반드시 고쳐야 하는 반드시 뿌리를 뽑아야 하는 그런 무서운 병이라는 것을 각인시키고 치료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나로 인해 가족들이 그 무서운 고통을 함께 지고 가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큰 범죄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알코올 중독자의 가족으로 산다는 것은 너무나도 큰 슬픔이며 고통입니다. 알코올 중독은 내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반드시 승리하여 나로 인해 누군가가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질 않기를 간절히 바래 보며 희망을 가지고 나를 위해 기도하는 가족을 항상 내 마음속에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소중한 가족 곁에 오랫동안 머물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다사랑 2021-02-09

[2019 알코올 중독 가족수기] 다시 넘어질지라도...

[2019 가족수기 공모전 참가상]   다시 넘어질지라도...   김○○   제 기억이 시작될 때부터 아버지께서는 알코올에 의존을 하고 계셨습니다. 어릴 적에 한 번은 TV에서 나오던 만화 애니메이션을 시청하다가 할머니에 의해 아버지를 모시러 구판장으로 가던 기억이 납니다. 집에서 오 분 가량 걸어가면 나오던 구판장에는 원형 철제 테이블이 있었습니다. 그 테이블을 둘러앉은 어른들이 계셨고, 그 중 아버지가 계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술에 만취하여 계셨는지, 적당히 얼큰하게 취해 계셨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외상이라는 단어가 왜 이리 오래도록 남아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여하간에 아버지와 함께 집에 돌아왔고, 아버지는 방에 들어가 주무시고 저는 다시 애니메이션을 시청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어떻게 모시고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고서는 바로 일어서셨나 봅니다. 아버지께서 알코올에 심히 의존하셨기는 해도 가족들에게 신체적으로나 언어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분은 아니셨습니다. 술을 드시지 않으셨을 때에는 약간 묵묵하셨던 좋으신 분이셨고 술을 드셨을 때에는 그저 잠만 주무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술을 드시는 아버지는 저에게 있어서 그저 술에 취해 대부분의 시간 동안 잠만 주무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몇 번씩 알코올 치료병동에 입원하시면 저에게 있어 없는 사람인 것만 같고 어색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해가 지날수록 점점 감퇴하는 기억력과 어느 순간부터 일상적으로 사용하시는 욕설, 굳게 자리 잡은 피해망상이 보이기 시작하고… 지금에 와서는 몇 가지 일들이 벌어지기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알코올 중독이 무서운 가장 큰 이유는 사회적인 위기 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술은 사람의 사고를 마비시키고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크게 나쁜 것은 아니다. 우리들은 그것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것보다 즐기는 것이 당연하다. 즐거운 일이 있을 때에는 술잔을 높이 들자. 힘든 일이 있을 때에는 술잔을 낮게 기울이자. 그런 사회이니 어떤 사람이 술에 대한 자제력 없이 무분별하게 마시고 수시로 취하고 그게 반복되어 중독이라 부를 만한 상태가 되어도 심각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과장 조금 보태서 ‘그거 이겨내고 조금만 마시면 될 것이지’ 하는 생각일 뿐입니다.   당연히 이런 중독 증세에 걸린 사람은 점점 달라지고, 한 가정 한 가정 조금씩 불행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더 무서운 것은 그 가족들조차 본인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주변 사람이 이렇게 힘든데 본인이 알아서 끊어주겠지. 그것만을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끊으라고 말하면 당연히 끊어줄 것 같고 그게 안 되고 반복되면 포기합니다. 많은 가정들이 그러했듯이 저희 가족이 그러했습니다.   몇 가지 일들이 벌어지고 현재 다사랑중앙병원 전에 입원해 있던 곳에서는 이런 말까지 합니다. ‘당신의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누군가를 해하거나 하는 것은 범죄이며, 그는 범죄자이다. 그리고 그것이 술로 인해 벌어져 우리 병원에 입원해 계시지만 본인이 술을 끊고자 하는 생각이 없는데 우리가 뭘 해주겠느냐? 시간 낭비이며, 그 사람이 무슨 일을 저지르던 옹호할 생각도 없고 해 줄 수 있는 것도 없다.’ 면전에서 이러한 말들을 들으며 그들의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했고, 정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는 막막함에 눈시울이 벌개지기도 했습니다.   지금 아버지는 이곳 다사랑중앙병원에 있으며, 아직도 앞길이 마냥 밝지만은 않습니다. 완전한 절주의 의사가 없으시고, 그저 조금씩 조절해 나가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 그리고 뚜렷한 계획도 없으시지만 퇴원하여 집에 있고 싶어 하십니다. 저는 아버지께서 좀 더 굳게 마음을 가지시고 미래 계획도 설계한 후 나오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설득하고 있지만 어찌될 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근시일 내에 퇴원하시게 되고,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시게 되실 수도 있습니다.   다만 크게 초조하고 걱정만 가득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급하게 마음먹는다고 어떠한 드라마틱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고, 얼마든지 실패하여도 다시 시작하면 된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술이 본인의 몸을 크게 망쳐 이렇게 되었음을 깨달으시고 왜 이렇게 되었는지 성찰해 보시기도 하시며 보여주신 긍정적인 모습과 앞으로의 과정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여러 가지 길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음에 감사합니다.

다사랑 2021-02-09

[2019 알코올 중독 가족수기] 알코올과의 소리 없는 전쟁

[2019 가족수기 공모전 참가상]   알코올과의 소리 없는 전쟁   김○○   우리 누나에 관해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누나는 어렸을 때부터 활발하고 적극적인 학생이었다. 예쁜 데다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좋아서 친구들 사이에서도 항상 인기가 많았었다. 또 주말에 쉬는 날이면 가끔 음식을 손수 만들어서 나눠 먹는 인정도 많은 누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누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세상 일이 늘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듯이 결국 집에서 가까운 국립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엄마가 말하길 누나가 술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 것은 이때부터라고 했다.   우리 누나는 특히 막걸리를 좋아했었다. 어쩌다 누나의 방에 들어가면 옅은 막걸리 냄새가 났고, 서랍에서 빈 막걸리 병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막 대학에 입학한 20대 청춘에게 술은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리고 술은 누구나 마실 수 있으니까. 다름 아닌 나 역시 술을 마시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나는 가족들이 모르는 사이에 점점 술 문화에 빠져가고 있었다. 밤마다 거실에서는 언성을 높이는 소리가 났다. 누나가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날에는 부모님과 다툼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족들 모두가 스트레스를 받아 예민해졌다. 내가 지금도 후회하는 것은 이때 누나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내가 누나에게 먼저 찾아가서 말을 걸었더라면 상황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누나는 공부를 열심히 했던 고등학교 때 마음껏 놀지 못했던 것을 속에 담아두고 있었다. 늘 부모님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로 살았던 누나는 술을 통해 해방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부모님은 그런 딸을 늘 안쓰럽게 여겼다.   누나의 술에 대한 집착이 절정에 달한 것은 내가 군대에 갔을 무렵이었다. 내색하지 않으려 하셨지만 전화로 듣는 아빠와 엄마의 목소리에는 항상 근심과 걱정이 묻어있었다. 군대에서 간간이 접하는 가족의 소식이 항상 술에 대한 이야기이니 나 역시 짜증이 나고 한편으로는 걱정되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누나는 항상 술을 먹지 않겠다고 부모님과 약속을 했지만 이미 알코올에 중독되어버린 누나는 스스로도 절제를 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 했다. 부질없게 맺은 연약한 약속이 깨지면 깨질수록 부모님은 누나에게 실망했다. 이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된 나는 알코올과 마찬가지로 무관심 역시 가장 무서운 것임을 깨달았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나는 누나와 연락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듯이 나이를 먹으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시간은 우리 가족에게 치명적인 독이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시작하는 다른 친구들과 달리 누나는 반듯한 직장을 가지지 못했다.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면서 쌓이는 스트레스, 하나둘씩 취업을 했다는 친구들의 소식을 듣고 밀려오는 자괴감과 불안감,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현실, 부질없는 잔소리같이 들려오는 부모님의 말씀들. 안타깝게도 누나는 이 스트레스를 오직 술로만 풀어갔다. 부모님 역시 그런 딸을 보면서 속이 타들어 갔을 것이다. 하지만 마땅한 대안을 찾지 못했던 부모님은 늘 누나를 타이르기만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우울증과 불면증까지 걸려 하루하루를 아무런 의미 없이 멍하니 누워있던 누나를 보던 부모님은 결국 누나에게 병원에 가보자는 제안을 했다. 누나는 그냥 술을 먹는 것 가지고 별 야단법석을 다 떤다며 싫어했다. 하지만 결국 못 이기는 식으로 병원에 가게 되었다.   병원에 가니 의사 선생님이 하시는 말은 뻔했다. 전반적인 상태와 함께 간이 좋지 않으니 당분간 술을 먹지 말라고 하셨다. 오랫동안 술을 마셨으니 지극히 당연한 소리였다. 그렇게 일주일간 금주를 했지만, 우울증과 불면증이 함께 찾아와 고통스러운 나날만이 계속될 뿐이었다. 그런 누나를 보다 못한 엄마는 아르바이트라도 다시 하라며 누나를 재촉했다. 그러나 아르바이트가 늦게 끝난 어느 날 누나는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며 집에 들어왔다. 가게에서는 아르바이트 도중에 술을 마셔서 더는 일을 맡기지 못하겠다고 직접 연락이 왔다.   이런 누나의 행동에 크게 실망한 엄마는 참다못해 더 이상은 너와 인연을 만들고 싶지 않으니 독립해서 마음대로 살라며 눈물을 흘렸다. 엄마는 누나가 알코올 중독이라고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TV에서나 보던 알코올 환자들의 전형적인 증상이 지금 소중한 딸이 보이는 행동과 일치함을 부정하고 싶었다. 맞벌이를 하는 터라 딸에게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했다며 엄마는 늘 스스로를 자책했다. 아빠 역시 누나를 보면서 화를 냈고 한숨을 쉬었다. 결국 누나의 술에 대한 집착이 도저히 가족이 말릴 수 없을 정도까지 다다르자 아빠는 알코올 치료에 특화된 병원을 찾아냈다. 병원에 입원하는 것은 자신이 알코올 중독이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누나는 완강히 입원하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가족들의 설득 끝에 결국 누나는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누나가 말하길 병원 생활은 생각만큼 쉽지가 않았다고 했다. 전자기기를 사용할 수 없는 데다 본인의 노력을 요구하는 확고한 규칙이 정해져 있었기에 지금껏 누나가 살아온 방식과는 맞지 않았을 게 당연했다. 초반에는 다시 입에 술을 대고 마는 등 적응하기 힘들어했지만 1달, 2달이 지나자 놀랍게도 누나는 천천히 나아지고 있었다. 퇴원하고 난 뒤 규칙적인 생활과 함께 건강한 식단, 무엇보다 금주에 대한 본인의 의지를 실천해가면서 누나는 지금도 건강을 되찾아가고 있다. 얼마 전에는 누나의 병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면회까지 왔었던 남자친구까지 생겨서 매일 매일을 즐겁게 보내고 있다. 저녁이면 항상 혼자서 술을 마셨던 누나는 이제 남자친구와 함께 영화를 보거나 여행을 간다. 동생인 내 입장으로는 참 부럽고 고마울 따름이다.   사람은 아프면 대부분 알아서 병원에 가지만, 알코올에 관한 부분에서는 스스로에게 한없이 관대해지는 경향이 있다. 딱 우리 가족이 그랬었다. “설마 알코올 중독이겠어? 그냥 술 좀 마시는 것 가지고.” 하지만 우리 누나가 그랬던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알코올 의존증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다. 괜찮겠지 생각하고 방심하는 사이에 소중한 사람이 서서히 망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잔인한지는 오직 겪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나는 우리 가족이 겪었던 아픔을 다른 누군가가 겪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건방져 보인다고 해도 감히 단언할 수 있다. 알코올에 관한 질병은 절대로 혼자서 치료할 수 없다는 걸 말이다. 가족, 친구들과 같은 주변 사람들의 노력과 지원이 있어야만 치료가 가능하다. 만약 이 글을 보는 당신의 주변에 술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곧장 다사랑중앙병원과 같은 알코올 치료에 특화된 병원에 가라고 추천하고 싶다. 망설이는 지금 이 순간에도 알코올은 누군가에게 파고들어 소중한 일상을 망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우리 아빠와 엄마는 가끔씩 누나에게 장난식으로 “한 잔 할래?” 같은 농담을 건네고는 한다. 그러면 누나는 됐다면서 고개를 가로젓는다. 예전 같으면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진기한 광경이다. 한때는 눈물과 한숨으로 밤을 지새웠지만,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있는 지금은 따스한 봄이 찾아오듯 우리 가족에게도 다시 봄이 오려나 보다. 그렇게 술로 인해 잃어버렸었던 가족의 화목함을 되찾아가며 우리는 오늘도 알코올과의 소리 없는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다사랑 2021-02-09

[2019 알코올 중독 가족수기] 우리 함께

[2019 가족수기 공모전 참가상]   우리 함께   조○○   빛이 새어 들어오는 출구를 찾기 위한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는 지금 긴 터널을 지나고 있다.   먼저 이 글을 쓰기 전 알콜의존증으로 몸과 마음이 피폐해가는 한 생명을 꾸준히 감싸주시고 전문적인 치료와 희망을 갖게 해주신 다사랑중앙병원 원장님들과 상담사님들 그 외 관계되신 모든 분들께 지면을 통해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이 분들의 지극하신 정성이 없었다면 지금쯤 어찌 되었을까 하는 아찔한 생각이 든다. 또한 나와 같은 처지에 계신 가족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이 글을 쓴다.   11년 전 아들의 음주 습관에 심각성을 몰랐다. 다만 일상적인 사회생활 중의 일부라고 가볍게 여겼었다. 그러나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도가 지나친 음주 습관과 과격한 행동으로 인해 온 가족들은 서로 간의 언어를 잃기 시작했고 침울한 나날의 연속들이었다. 가족들은 이러다 괜찮겠지 하는 방관적 입장에 서서 요행을 바라고 있었다고나 할까! 그러나 도가 점점 심해져 직장 이직이 잦았고 자신의 의지대로 생활할 수 없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그로 인한 진통을 힘들게 겪고 난 다음에는 본인 스스로 병원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순간도 일시적이었다. 입, 퇴원을 반복하였고 가족들도 행여 누가 알게 될까봐 쉬쉬하며 조마조마 근심과 고통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또한 유명 대학병원에서 치료하면 더 낫겠지 하며 4~5년 동안 여러 차례 입, 퇴원이 반복되었으나 결과를 얻어 내지 못했다. 몸과 마음은 망가져 가고 이러다 얼마 살지 못하고 세상을 등져야 하는 무서운 천형처럼 느껴졌다. 일련의 과정을 말로 어찌 표현할 수 있으랴...   지금 내가 가장 안타깝게 느끼고 후회하는 것은 알코올중독 전문 치료병원을 몰라서 대학병원과 신경정신병원을 드나드는 사이 금전적 부담과 조기 치료를 위한 골든타임을 놓쳐버렸다는 것이다. 그것은 알콜중독 증세를 치료하는 전문병원에서 의사와 상담사를 통한 치료 방법의 노하우와 가족교육 프로그램으로 알콜중독 증세를 이해해야만 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병원에 입원하고 나서 일주일 후면 가족과 통화가 가능해질 때 병원을 헐뜯기도 하고 앞으로 절대 술을 먹지 않을 테니 퇴원시켜 달라고 매일 졸라대면 마음 약한 부모들과 관계되는 사람은 고민하기 시작한다. 결국 마음 약한 가족은 울면서 퇴원시켜주면 가족 간에 싸우기도 한다. 그래서 퇴원해주는 순간 서로서로 힘들어지게 됨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가족이 중심이 되어 이런 위험스러운 난관을 서로 힘을 합쳐 극복하는 것이 환자를 위한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통제력을 잃어버려 형사적인 문제도 있었고, 음독으로 몸도 망가지고, 추운 겨울 119로부터 길에 쓰러져 있다고 연락을 받았을 때 나는 차라리 깨어나지 않는 것이 고통스러워하는 아들을 위하는 것이라는 위험한 생각을 했었던 것이 더 가슴 아팠다. 직면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모를 것이다.   절대 당사자 의지대로 치료가 불가능한 나쁜 병! 그러나 가족의 절대적인 인내와 사랑이 필요할 뿐이다.꾸짖고 하소연한다고 해서 치료가 되지 않는 병!   당사자는 날마다 눈물 흘리며 정상으로 돌아오길 바라는 이들의 마음을 모를 리 없다. 그러나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내 아들도 원장님 앞에서 살고 싶다고 애원할 때 그것을 보고 있는 아비로서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과 슬픔을 느꼈다. 내가 잘못했다는 죄책감으로 괴롭기까지 했다. 나 역시 나이가 많아 얼마나 살겠냐만 우리가 죽고 나서도 아들이 한 인간으로서 세상 도리를 다하며 살아가야 할 텐데 걱정이었다.   퇴원한 지 10개월! 매달 병원에서 처방해준 약 복용!단주모임도 빠지지 않고, 힘들겠지만 직장 생활도 잘 하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는 아들에게 얼마나 눈물 나게 고맙고 대견한지 이 아비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하루하루 건강해져 가는 아들을 바라보며 행복해하는 엄마의 마음처럼 긴 터널을 지나 빛이 비춰지고 있다. 아들아! 사랑한다!   또한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분께 위로를 보낸다.끝까지 끈을 놓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다.치료를 위해 이를 악물고 노력하는 당사자들에게 전하고 싶다.“당신들이 가장 무섭고 슬퍼해야 하는 것은 가족으로부터 잊혀져 버린 것이라고.”“늘 우리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갖기를 바란다.”  

다사랑 2021-02-09

[2019 알코올 중독 가족수기] OOO씨를 아시나요?

[2019 가족수기 공모전 참가상]   OOO씨를 아시나요?   이○○   “계속 이렇게 술 퍼마시다가 우리도 김ㅇㅇ씨 만나게 된다.” “푸하하하 그러게, 언니 우리는 다사랑중앙병원 9층에서 만날 듯~”   그는 떠들썩하게 술잔이 오가며 흥청대는 자리를 하나 차지하고 앉아 오가는 시덥잖은 농담에 유쾌하게 참여하며 그 자리를 지킨다. 아무도 그에게 술을 권하지도, 미안해하며 눈치 보지도 않고, 그 또한 원래 그랬던 사람처럼 자리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다.   이번이 두 번째다. 걸려온 올케언니의 전화 속 목소리에는 이미 체념과 원망이 섞여 있다. 그럴 것이다. 수십 년 술 수발을 들어 온 언니의 심정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첫 번째 전화를 받고 갔을 때 그는 온몸이 개나리꽃처럼 샛노란 물골을 하고 퀭해진 눈을 간신히 뜨고 “뭐 하러 왔어?” 라고 했다. 병원엔 죽어도 안 간다고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그의 아내는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가까이 살면서도 서로 바쁘다는 핑계로 이 지경이 되도록 몰랐다니. 너무 미안하고 마음 아팠다. 그동안 겪었을 올케언니와 조카아이의 마음고생이 얼마나 컸을까? 그 또한 생 어금니를 스스로 뽑는 등 여러 가지 착란을 겪으면서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었다. 일을 할 때 그는 몸을 사리지 않고 꼼꼼하게 처리하는 사람이다. 매사에 성실하고 맡은 일에 빈틈이 없는 사람. 그러나 일밖에 몰랐던 그는 일이 없을 때의 시간을 쓰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아니 생활에 묻혀 잊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 시간을 보내는 유일한 방법으로 그는 술을 선택했고, 곡기를 끊고 밤낮없이 이어지던 음주는 스스로와 가족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지우게 되었다.   알코올중독에 대해 무지했던 우리 형제들은 그저 그를 알코올로부터 잠시 떼어내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공기 좋은 데 가서 소위 요양이란 것도 좀 하고, 몸 좀 추스르면 되는 건 줄 알았다. 실제로 알코올병원에 들어가기 전에 발작을 일으켜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들어가기까지 했던 그가 알코올병원으로 옮긴 지 몇 달 만에 맑은 정신으로 퇴원했으니 우리 모두는 그것으로 완치되었을 거라 믿었다. 그때까지도 그는 스스로 술을 자제할 자신이 있으니 굳이 끊지는 않겠노라고, 일에 복귀하면 사회생활 하는데 술 없이는 곤란하다며 장담했다. 그리고 우리도 그러리라 굳게 믿었다.   1~2년 잘 지내는가 싶던 그였다. 두 번째 전화를 받고 달려갔을 때 그의 모습은 첫 번째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 노숙인처럼 온몸에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다는 것이 추가되었다. 스스로 칩거하던 컴컴한 방문을 열었을 때 그는 “그냥 죽게 내버려 둬”라고 했다. 누구의 어떤 설득도 안 먹혔다. 아무 희망도 없이 정말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작전을 짰다. 지난번 병원 말고 좀 더 전문적인 병원을 알아보고, 꽁꽁 묶어서라도 끌고 갈 궁리도 하면서. 다음 날 모든 준비를 마친 우리 특공대가 들이닥쳤을 때 그는 의외로 이러나저러나 아무 상관 없다는 듯 순순히 그 과정을 따랐다. 첫 번째와 같은 순서가 이어졌다.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 즉시 이어진 발작 그리고 대학병원 중환자실. 지난번 병원과는 다르게 그 과정을 우리가 다 치켜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조금 회복된 그는 마치 치매 환자처럼 자신의 사지가 왜 침상에 묶여있는지 끊임없이 되풀이해서 물었다.   “이게 뭐야?” “경련이 심해서 침대에서 떨어질까봐 잡아주는 거야.” “아~” “이게 뭐야?” “경련이 심해서 침대에서 떨어질까봐 잡아주는 거야.” “아~” 이런 식의 무한 반복은 좀 이해할 수 있었다. “여긴 밥을 안 준다.” “진짜? 내가 얘기 좀 해야겠네.” “저기 저 여자한테 말해야 해.” “어? 누구?” “저기 까만 옷을 입은 여자가 여기 담당이야” “그래? 저기 아무도 없는데?” “뭘~어제도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저 사람 집에 가서 한잔하고 왔는데... 저 여자가 우릴 감시하잖아.” “아~그랬어?”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주위를 휘 둘러 보지만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진다. 아까 오빠가 ‘밥 안 주냐’는 무한 반복 질문에 “이OO씨 방금 식사하셨잖아요.” 하던 간호사 선생님조차 안 보이는 데 도대체 누굴 말하는 건지. “아무도 없는데, 그 사람 이름은 알아?” “그럼~김ㅇㅇ이야. 어? 없네.”   중환자실에서 나온 그는 휠체어를 타고 다사랑중앙병원으로 옮겨졌다. 스스로 걸을 수도 없는 지경이 된 그를 보는 우리의 마음은 착잡했다. 걸어서 나올 수 있을까?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의사 선생님조차도 그가 몸만 좀 회복해서 나가도 다행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병원 생활에 잘 적응하며 자신의 상태를 완벽히 파악한 그는 이제 전과는 생각이 달라졌다. 알코올중독은 혼자 노력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암이나 그 밖의 불치병처럼 평생 관리하며 살아야 하는 일종의 질병임을 깨닫게 되었다.   면회 갈 때마다 눈에 띄게 좋아지는 그의 상태를 보며 우리는 안심했다. 그러나 첫 번째 실패의 기억이 떠올라 마냥 마음을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선 그가 집중할 ‘일’이 필요했다. 오십 대 후반으로 접어든 그가 재취업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 같았다. 퇴원이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 후에 그가 살아가야 할 방법이 필요했다. 우연히 언니 친구가 오빠의 상태와 성실성을 인정하고 자신의 회사에 받아주었다. 그는 아직도 그 회사에 다니고 있다. 일을 정말 열심히 하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남은 또 하나의 문제는 일하고 남는 시간을 잘 보낼 수 있는 자기만의 소일거리가 필요했다. 손재주가 좋아 뭐든 잘 만지는 그를 주말마다 온 식구들이 불러댔다.   “오빠, 가게 공사해야 해~ 와서 해줘.” “삼촌 우리 집 전기가 자꾸 말썽이야” 심지어 친구들까지도 그를 불러대는 통에 그는 주말이 늘 바쁘다. 일본, 베트남 여행을 다녀오기도 하고 시간을 내어 산행도 자주 다닌다. 잊고 있었던 그의 취미 생활을 이제야 즐기게 된 것이다. 나는 요즘 그에게 과거 이력을 되살려 취미 삼아 가죽공예를 시작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나이 들어서 가죽 공방 같은 거 하면 좋잖아~”우리는 이제 식구들이 모여 술 한 잔 할 때 그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온갖 술을 섭렵한 고수답게 이것저것 권하기도 하며 유쾌하게 자리를 지킨다. “그런데 김ㅇㅇ씨가 누구야? 기억은 나?” “아니, 전혀”그때의 기억을 싹 지운 채 원래 처음부터 술을 먹지 못했던 사람처럼 잘 살아가고 있는 그를 우리는 진심으로 응원한다.

다사랑 2021-02-09

[2019 알코올 중독 가족수기] 삶의 선물

[2019 가족수기 공모전 참가상]   삶의 선물   윤○○   서방이 힘겨운 일과를 마치고 나 홀로 기거하는 집에 들어와 알코올로 인해 입원 치료중인 마누라 생각을 해봅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알코올 의존증으로 흘린 눈물의 깊이만큼 아픈 사람 또 바닥까지 추락해본 사람이 여기에 있습니다. 가족과 지인의 눈물을 머금은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는 더는 내려갈 수 없는 나락 아닌 나락 다사랑중앙병원에 강제로 위탁 입원되어 내 몸을 의지하며 자신과 힘겨운 다툼을 하고 있는 내가 여기 있습니다. 여기서 물러서면 다시는 일어서서 오를 수가 없는 두려움이 나를 감쌉니다. 세상은 왜 이리 힘이 드는지 주변인들은 한낮의 태양과 좋은 환경이라는 양분을 머금고 잘 살고 있는 것 같은데 유독 나만 왜 나 자신에 대해 관리도 잘 다스리지도 못하는 걸까! 이는 내 속에 나도 모르는 알코올이라는 괴물이 있어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놈이 나의 무기력에 대한 보상을 가장한 치명적인 두뇌 파괴자 알코올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덤탱이를 나에게 씌우고 있는 건 아닐까!   여기 다사랑중앙병원에 있으면 보호받는 느낌에 가끔 그전 일상생활 중 마음의 상처를 입었어도 내 안방과 거실에서처럼 아늑할 때가 있습니다. 이제는 더 내려갈 수 없는 나락에 떨어졌지만 다시 일어서서 오를 수가 있을 것 같은 희망이 듭니다.   서방이 마누라에게 하고픈 말! 혹 실패한 삶이라고 자괴하고 스스로 인생의 밑바닥에 내려갔다고 그곳에 주저앉지 않았으면 합니다.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다고 절망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희망을 가지고 당신의 재활을 돕고자 하는 가족과 주변의 지인이 있으니 무슨 일이든 맨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처럼 당신만의 행복을 꿈꾸며 다시 시작하는 용기와 희망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2019년 봄이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용기와 희망을 온몸에 가득 채우고 새롭게 시작하면 되는 것입니다. 자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서방의 경험 측에 비춰 살펴보면 내가 부지런히 걷고 희망을 꿈꾸며 일하면 없던 길도 삶의 행복을 공유할 조력자도 생기지만 내가 가던 걸음을 멈추면 있던 주변의 호재도 사라짐을 느꼈습니다. 내 스스로 알고 있는 잘못된 생활습관을 점진적으로 개선하고자 노력하면 희망이 보이지만 자신의 나약, 나태함과의 다툼에 밀리면 내일의 꿈도 희망도 다가올 행복도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부부지간을 떠나 삶과 관여된 사이인 서로 간에 표현되지 않는 소통과 자녀와의 봉해 놓은 속내는 시력이 아무리 좋아도 볼 수가 없다 했습니다. 살아보니 사회생활 중 사업도 사람과의 관계도 공동의 선과 유익을 바탕으로 가꾸지 않으면 잡초가 우거지게 됨을 느낍니다. 가족의 행복이란 같이 가꾸는 정원이자 텃밭이라 생각합니다.   여보 마누라 평범한 것 같지만 누구에게나 아침이 오고 “오늘”이라는 이름으로 하루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오늘을 무의미하게, 때로는 아무렇게나 보낼 때가 누구에게나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잘 곱씹어 보면 하루는 곧 일생일 수도 있으니 행복한 일생을 만들기 위해 좋은 하루를 보내는 것이 곧 성공된 삶 즉, 좋은 일생을 만드는 길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 하루는 “선물”이라 생각합니다.   입원 치료 중에 있는 많은 분들에게 고합니다.   힘드시겠지만 알코올 의존증 치료 과정을 통해 오늘이라는 소중한 당신의 “하루”를 아름답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저는 다사랑중앙병원에서 입원 치료 중 나날이 정신이 맑아지고 호전되어가는 마누라를 바라보면서 왜 진즉 알코올 의존증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는지 뒤늦은 후회도 해봤고 알코올이 자신의 몸과 마음 그리고 가족 또 주변인들의 삶을 이렇게까지 파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통감했습니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부터라도 한 가정의 서방 및 가장으로서의 신성한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오늘 “하루”라는 기회인 선물을 감사하게 여기며 주어진 삶에 열심을 다하려 재다짐을 해봅니다. 여러분 힘내십시오. 화이팅!   2019.03.31.    

다사랑 2021-02-09

[2019 알코올 중독 가족수기] 회복의 첫걸음, 다사랑에서

[2019 가족수기 공모전 참가상]   회복의 첫걸음, 다사랑에서   곽○○   저는 여성 알코올중독자, 지금은 회복자의 가족입니다. 동생이 회복의 첫걸음을 내딛은 곳은 다사랑중앙병원이었습니다. 길고 고통스러웠던 회복의 여정을 나누고 더 많은 알코올중독자 가족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 공모전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술에 관대한 나라입니다. 어느 곳에서도 알코올에 중독이 되면 인생을 앗아갈 수 있다고 경고하지 않습니다. 무던하게 보이는 저희 가족도 알코올중독은 남의 얘기인 줄만 알았습니다. 중독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고, 알코올중독은 그저 초라한 행세를 하고 길거리를 비틀거리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동생이 손을 떨어도, 술에 취해 점점 사회와 고립이 되어도, 술을 안 마시면 너무 착하니까, 다시 안 마신다고 하니까, 동생의 말을 믿었고 중독은 그렇게 점점 동생의 인생을 잠식했습니다. 동생의 폭음이 반복되고 시간이 점점 지날수록 저희 가족은 알코올과 더 날카롭게 싸우기보다 지쳐 무기력해졌고 결국엔 동생의 술 문제에 무뎌지게 됐습니다.   알코올중독은 가족병이었습니다. 버티고 버텼지만 더 이상 싸울 힘이 남아있질 않았고, 동생은 술독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들어 결국엔 뼈만 앙상하게 남은 채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저희 가족은 벼랑 끝에 몰린 심정으로 의사 결정을 전혀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 동생을 살리기 위해 강제입원을 시키게 되었습니다. 강제입원을 시키는 것이 굉장히 두려웠고, 동생에게 상처가 될까 혹은 더 나은 방법은 정말 없었을까 하며 스스로를 자책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동생과 연락이 두절된 상태로 3주가 지났고, 동생은 점점 술에서 깨며 자신으로 돌아왔습니다.   동생과 연락이 되지 않던 3주 동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고 걱정이 많이 되었습니다. 모든 걸 처음 겪는 상태라 낯설고 두려웠지만, 다사랑에는 전담 상담사가 있어 그 분과 연락하며 동생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첫 일주일 동안은 심한 금단현상이 왔고 차차 회복되어 3주가 되었을 때 동생과 면회를 할 수 있었습니다. 병원 생활과 면회에는 꽤 엄격하게 지켜지는 규칙들이 있어 환자를 위한 중심을 잡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직계 가족이 달리 요청하지 않는 한, 직계가족 외에는 면회가 불가능해서 동생의 문제를 가족끼리 직면하고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동생과 면회가 가능하기 전부터 병원에 와서 가족교육을 받았습니다. 벼랑 끝에 내몰리듯 입원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가족들은 어디에서도 알코올중독에 관해 제대로 들을 수 없고, 가족의 병든 마음에 대해 헤아려주지 못하는데 그곳에선 가족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해주었고 그래서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족교육을 통해 공동의존에 대해 알게 되었고, 사랑하는 환자를 위해 “올바른” 방법으로 가족이 힘을 합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도 중독과 싸우는 일은 매우 고되고 외로운 과정이었습니다.   동생은 다사랑중앙병원에서 퇴원한 후로 두 번 더 병원 생활을 했습니다. 중독은 점점 더 심해졌고 마지막 입원 때, 이번에도 죽기 직전까지 갔을 때 동생이 깨닫게 된 것 같았습니다. 진전섬망이 오며 현실과 망상이 구분되지 않던 그 순간이 너무 소름 끼치게 무서웠다고 합니다. 지금은 단 한 잔의 술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술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문제가 있는데 아무런 도움도 받지 않는 게 더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평생 싸워 나가야 할 질병이고 술에 관대하고 유혹이 넘쳐나는 대한민국에서 단주를 지켜나가기 쉽지 않겠지만, 저희 가족은 드디어 희망을 보았습니다. 중독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시작이라면 앞으로 남은 것은 지난한 중독과의 싸움인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성공적인 변화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이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환자의 마음가짐입니다. 구원을 얻고자 하는 사람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처럼 환자가 단주의 마음이 없으면 그 어떤 것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중독자의 가족분들께 환자를 돌보다가 함께 절망의 길로 걸어가지 말고 먼저 살 길을 찾으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내가 먼저 온전한 상태여야 나중에 중독자가 도움을 청할 때 도움을 줄 수가 있습니다.   끝이 없을 것 같던 중독과의 싸움이 한풀 꺾이게 되어 저희 가족은 이제야 안도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중독과 싸우고 계시는 가족분들은 많이 지치고 또 무기력해지는 시간들이 많겠지만 자기 자신을 돌보는 것을 게을리하지 마시고 절대 환자를 포기하지 마세요. 가족의 사랑과 도움이 있다면 희망은 찾아온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동생에게 도움이 많이 되었던 책 두 권을 소개하며 이 글을 마치겠습니다.   ‘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 ‘어느 애주가의 고백’   두 책 모두 알코올중독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고 회복의 길까지 책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딱딱한 이론만 가득한 서적보다는 실제 중독자의 숨기고 싶은 중독생활을 담고 있기에 더 와 닿고, 특히 ‘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은 여성 알코올중독자의 이야기여서 여성 중독자에게 공감이 많이 될 것 같습니다. 지긋지긋한 알코올중독에서 단 한명이라도 이 책과 다사랑중앙병원의 도움을 받아 술과 이별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알코올중독자의 가족분들이 희망을 잃지 말고 힘내시길 항상 기도하겠습니다.

다사랑 2021-02-09

[2019 알코올 중독 가족수기] 무서움과 지친 마음으로 입원했던 병원, 이제는 평온함으로

[2019 가족수기 공모전 참가상]   무서움과 지친 마음으로 입원했던 병원, 이제는 평온함으로   최○○   20대 초반, 젊은 나이에 만나서 부부가 됐습니다. 친정 부모님은 술 좋아하는 집안에 시집가면 술 때문에 속 썩는다며 반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친정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컸던 시기에 만난 사람이고 성품도 착한 것 같고 이 사람이랑 결혼하면 좋을 것만 같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결혼이란 게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아이가 생겼고 남편은 매일매일 총각처럼 술 마시고 외박하고 혼자서 우는 갓난아기를 달래다 지쳐서 아기를 부둥켜안고 같이 울다 잠이 들곤 했습니다. 혹 떼려다 혹 붙인 격이 됐고 반대한 친정 부모님께는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댁에도 자존심이 상해서 내 남편이 술 먹고 외박한다는 얘기를 하기 싫었습니다. 그렇게 순간순간 힘들고 괴로웠지만 감정을 숨긴 채 하루하루를 살았고 욕구불만은 커져만 갔습니다. 참다 참다 폭발하면 아이들 생각도 안하고 대판 싸움이 일어났고 어린 자녀들은 피해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남편의 술 패턴은 이유 없이 한 달에 한 번은 심사가 뒤틀려서 살림을 부수고 주사를 부렸습니다. 한 달이 큰소리 안 나고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까? 걱정하면서 조마조마하고 긴장 속에서 살았습니다. 음식 솜씨가 있던 나는 맛있는 것을 만들어주면서 비위를 맞추곤 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아이들은 성인이 됐고 우리 부부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욱 대화도 없어졌고 형식적으로 각자 일하며 책임감으로 살았던 것 같습니다. 부부의 연으로 여지껏 버틴 건 터울이 있는 늦둥이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코올중독자와는 대화도 안 되고 본인 말만 하고 상대 이야기는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고 저는 문제를 키우지 않으려고 문제가 심각한데 모른 척하면서 억지로 생활을 했습니다. 남편의 술 패턴은 날이 갈수록 단주의 시간이 짧아지면서 많은 양의 술을 마셨습니다. 주사의 강도도 세졌습니다. 작년 6월에는 술에 취해서 저한테 함부로 하는 것을 큰 애들이 듣고 있다가 왜 그러냐며 시비가 붙었습니다. 덤비는 큰아들에게 식칼을 들고 다들 죽여버린다며 위협하는 남편을 방어하다가 결국 큰 애는 오른손 손가락을 베었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신고를 했고 남편은 경찰이 데려가고 다친 큰아들은 엠뷸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갔습니다. 다친 큰 아들은 신입사원이었고 컴퓨터로 설계를 하는 일을 하는데 손을 많이 사용하는 일이라 여름내 고생을 하며 버텼습니다. 그나마 아빠를 이해하려고 했던 둘째도 그 사건으로 마음을 닫게 됐고 셋째한테만큼은 상처를 주지 않고 키우려 했는데 산산조각이 나버렸습니다. 그런 무서운 상황을 만든 남편은 오히려 화를 내면서 큰 애들 꼴도 보기 싫으니 독립시키라고 난리를 쳤습니다. 그 상황에서도 술을 계속 마셨고 억지를 쓰면서 식구들을 불편하게 했고 저한테는 방을 얻었냐며 계속 재촉을 했습니다. 소통이 되지 않아 평소에도 아이들과 관계가 좋지 않던 남편은 술 문제로 방법을 못 찾고 결국 아이들을 쫓아내는 걸로 결론지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불안한 마음으로 긴장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큰 애가 고백하기를 고등학교 시절에 아빠가 술 먹고 엄마를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술을 먹은 날은 잠을 못 잔 적도 많았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데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어미가 되어 아이들이 어떤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고 내 감정도 추스르지 못해서 한참 공부해야 될 아이들에게 짐이 됐다는 생각에 미안하고 죄스러웠습니다. 남편이 더 원망스럽고 내 마음속에는 복수, 분노, 무시, 악을 쌓아갔습니다.   이 사건으로 시댁에서 우리 집 상황을 알게 되었고 입원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고 병원을 가지 않으려고 하는 남편을 시댁 식구들의 설득에 집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게 됐습니다. 두 달 만에 퇴원을 했는데 단주에 실패했습니다. 기대를 했던 만큼 실망은 컸고 ‘안되는구나’ 하는 마음에 한숨은 깊어졌습니다. ‘그나마 애들 키우면서 가정을 지키려고 여지껏 버텨온 것이 어떤 힘이었을까?’ 나 스스로 혼란스러웠고 모든 불행의 씨앗은 알코올중독자인 남편 때문이라고 단정지으며 강하게 밀어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수렁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매번 똑같은 일상에 똑같은 상황에 녹음기를 틀어 놓은 듯한 똑같은 멘트들. 지겹도록 싸우면서 지쳐갈 때 건축업(자영업)을 하고 있는 남편은 큰 공사가 나와서 일을 간다며 현장 근처에 방을 얻었고 짐을 챙겨서 도망가듯 떠났습니다. 온몸에 기운이 빠지고 피곤한 일상이었던 나에게 숨을 쉴 수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정상적이고 건강한 사람들과 살아가는 것도 항상 고달프고 힘들었는데 알코올중독자와 살아가야 하는 인생은 더 말할 나위 없고 지쳐갔습니다. 남편은 현장 숙소에서 술을 계속 마셨고 낮에도 술을 마시고 현장에 투입되어 작업하는 책임자들과 실랑이가 벌어졌고 현장에서 쫓겨났다고 합니다. 그만 먹으라고 말리는 식당 주인과 시비가 붙어서 식당에서도 쫓겨나고 그렇게 가는 곳마다 문제가 발생했고 더 이상 본인이 설 자리가 없어지고 나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와서도 술은 멈추질 않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게 정말 숨이 막히고 심장이 벌렁거리면서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귀신같이 변하는 남편이 무서웠고 이러다 어느 누구 하나 죽어야 끝이 날 것 같았습니다. 사람이 왜 저렇게까지 될까? 정말 이제는 더 이상 참는 게 의미가 없었고 결말을 내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습니다. 나가라고 소리 소리쳤고 내쫓았습니다. 무섭고 불안한 마음에 본인들 의지와 상관없이 독립한 큰 애들을 불러서 그동안 자초지정을 얘기했더니 우리를 내쫓았으면 잘 살아야지 이게 뭐냐며 속상해했습니다. 엄마도 할 만큼 했으니 이혼하라며 얘기했습니다. 이래서 어떻게 살겠냐며 하루를 살아도 마음 편히 살아야지 막내 교육상도 안 좋으니 엄마가 결정을 내리라고 했습니다.   집을 나가고 2~3시간 뒤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가 났습니다. 남편이었습니다. 술에 취해 악에 받친 무서운 얼굴로 초인종을 계속 눌렀고 겁에 질려 문을 못 열고 있는데 눈빛이 돌아가면서 두리번거리더니 정확한 기억은 없는데 공구통에서 뭔가를 집어 들더니 도어락을 내리쳤습니다.‘퍽! 쾅! 쾅!’ 소리에 자고 있던 큰 아들이 일어났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저에게 둘째는 경찰에 신고하라고 했고 신고하는 사이에도 남편은 도어락이 부서질 때까지 내리쳤습니다.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며 경찰을 기다리고 있는데 도어락은 산산조각이 났고 남편은 계단으로 사라진 뒤 경찰이 도착했습니다. 불안한 마음에 큰 애들을 불렀지만 보지 말아야 할 상황을 봐버렸고 또다시 상처를 준 것 같아 후회했습니다. 나 스스로 의존하고 있는 부분에 더욱 비참했습니다. 남편은 집에서 가까운 곳에 모텔을 얻어놓고 낮이고 밤이고 눈만 뜨면 술을 마셨고 남편의 방법대로 해결을 하려고 했지만 이미 닫혀진 제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자기 말이 통하지 않자 제가 일하는 곳에 불을 싸지른다며 협박을 했고 일도 하지 못하게 수십 통의 전화, 받지 않자 문자로 폭언은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습니다.   처음 갔던 병원에서 단주를 실패한 뒤 몇 달 동안 술을 못 마신 게 억울했는지 가족들에게 이제 술 먹고 살겠다며 공표를 하고 단주하기 전에 술의 양보다 훨씬 많은 양의 술을 마셨습니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던 상황에 신의 도움인지 본인이 살려고 했는지 고모님들과 통화를 하면서 울고불고 난리가 났고 취중에 치료를 받겠다며 병원에 간다고 했다며 저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첫 번째 갔던 병원에서 실패한 뒤 병원을 알아보던 중 보건복지부에서 지정한 알코올중독 전문병원이라는 말에 믿음이 갔습니다. 치료 과정이 어떻게 되는지 일일이 검색을 했습니다. 막내 고모님이 남편을 픽업해서 망설임 없이 다사랑중앙병원으로 향했고 보호자 2명이 필요하단 말에 아직 화해를 안 한 큰 아들과 지하철로 갔습니다. 감정이 좋지 않은 상태로 술 취해 망가져 가는 남편을 병원에서 맞닥뜨렸습니다. 그 순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입원시키고 돌아오는 내내 지금의 상황, 앞으로의 일들을 고민하며 착잡한 마음으로 집에 오니 새벽 2시를 가리켰습니다.   ‘오늘은 잠 좀 편히 자자.’ 잠을 자려고 눈을 감아보지만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입원한 지 2일이 지난 후 병원에서 상담사라면서 전화가 왔고 남편은 술이 깬 상태로 창밖을 보며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하다며 근황을 알려줬습니다. 보호자 교육이 화요일, 토요일에 있으니 참석하여 도움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다사랑중앙병원은 입원을 하면 상담사가 정해지고 환자와 보호자의 마음을 여는 상담을 하면서 치료에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는 듯했습니다. 상담사와 토요일 첫 면담을 하면서 남편 소식을 들었고 병원 생활에 대해서 어떻게 진행되는지 설명을 들었습니다. 보호자 교육 10회 수료를 하면 10만원 보조를 받는다고 안내받았습니다. 첫 회 보호자 교육에 들어갔는데 알코올중독자가 된 원인이 보호자에게 있다는 얘기에 ‘뭐지?’하며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입원 후 일주일이 지나야 면회가 가능하단 얘기에 무거운 마음으로 병원을 나서는데 부르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봤더니 7층 병실에서 내가 나오는 것을 보고 남편은 오라고 손짓을 했습니다. 난리친 후 첫 만남이었습니다. 서로가 거리감이 느껴졌고 주독이 안 빠진 거무스름한 얼굴빛은 더 초라해 보였습니다. 서로가 생각할 시간도 필요했고 그 전에도 그랬듯이 별다른 대화 없이 치료 잘 받으라고 하고 헤어졌습니다.   의무감으로 시작한 교육은 회기를 거듭하면서 알코올중독은 질병이란 것을 알았고 환자(남편)가 이해됐고 남편에 대해 얼었던 마음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이해가 되니 내 마음이 편해졌고 처음에 어색하게 내가 왜 알코올병원을 드나들어야 하는지 자존심도 상하고 누가 알아보는 사람도 없는데 창피했습니다. 교육에 참여하면서 빠르게 받아들였고 너무 무지해서 술 먹는 남편에게만 모든 문제를 전가한 것 같아 측은하고 미안한 마음과 많이 힘들고 외로웠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알아넌 모임도 나가고 알코올중독 가족을 위한 집단프로그램도 참여하면서 내 자신이 치유가 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나는 더욱 열성을 다해 추천 도서도 열심히 읽고 적극적으로 교육에 임했습니다. 내 감정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하면서 내 자신이 소생하는 느낌이 들었고 활력과 희망이 샘솟았습니다. 공동의존이란 말도 다사랑중앙병원에서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공동의존이 아닌데’하는 의구심이 들었고 인정을 안했습니다. 하지만 공동의존이었다는 것을 금세 깨달았습니다. 인정을 하고 나니 모든 문제가 왜 그렇게 흘러갔는지 알게 됐고 편해진 마음은 고스란히 남편에게 전달이 됐습니다. 면회만 하면 ‘퇴원해서 돈 벌어야 한다, 이제 술 안 먹는다, 입원해 있어야 별 소용없다, 똑같다’는 여러 이유로 퇴원을 종용했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프로그램에 만족했고 주치의 선생님, 모든 선생님들이 친절했고 무엇보다 상담사님들이 열성을 다해 내 가족처럼 치유를 위해 애를 쓰는 모습에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또한 보호자 교육이 없었다면 나는 예전과 똑같은 말투, 행동을 했을 것이 뻔한데 변화를 꿈꾸게 해준 다사랑중앙병원에 다시 한 번 감사함을 느낍니다. 공동의존에서 분리되는 연습을 하고 있고 또다시 넘어질지라도 위대하신 신이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자포자기가 아닌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처음에 병원에 왔을 때 큰 기대 없이 술과 분리시켜서 이혼을 하겠다고 마음먹고 상담사님께도 ‘이혼을 할거예요.’라고 말했더니 이혼이 답이 아니라고 말해준 상담사님께도 고맙고 퇴원을 하려면 한 달 정도 남았는데 막바지를 향해 열심히 해주는 남편께도 고맙고 감사합니다. 남편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병원 생활, 하루에도 몇 번씩 갈등하는 환자를 바로 잡아주고 알코올중독자임을 인정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겠다고 꿈을 꾸게 해준 병원 측 관계자와 상담사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다사랑 2021-02-09

[2019 알코올 중독 가족수기] 새로운 시작과 행복한 동행

[2019 가족수기 공모전 참가상]   새로운 시작과 행복한 동행   이○○   ????메시지 끝났어요? 오늘은 무슨 말을 했는데?“ “그냥 잘했어! 다음에는 정기적으로 화요일이면 메시지 나가게 될 거야???? 그 얼굴에는 뿌듯함과 행복감이 묻어 있었다. ????나 선물도 받았어. 무슨 선물?????왠지 그 선물에는 계산할 수 없는 지나온 과거의 회한과 미래의 희망을 말하는 기쁨이 서려 있었다. 그렇게 알콜중독은 극복되어 가고 있었고, 이 속에서 우리 가족의 인생의 행복한 퍼즐이 맞춰지고 있었다.????언제 그랬던가!” “와 누구가 어려움에 처해있대?” “우리가 도울 수 있을까?” “가족은 알라논으로 안내하지.????마치 알콜중독 극복의 전도사인 양 자연스럽게 말을 주고받는다. 현재 우리 가정은 술 중독으로부터 그렇게 벗어나 회복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7년 전의 일이었다. “자, 이제 일생 중 가장 예쁜 신부가 입장하겠습니다. 신부 입장!”아리따운 신부의 손을 잡은 아버지의 얼굴은 창백하고 신부의 손을 잡은 손은 유난히도 심하게 떨고 있었다.????아유 신부 아버지가 너무도 손을 떠네, 아마도 너무 긴장했나” “시집보내는 것이 서운해서 그렇겠지.???? 하객들은 모두들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편은 그 날 아침도 술을 먹고 또 먹었단다. 희미하게도 핸드폰이 울리고 있었다. 잠결에 들은 소리... “여보세요! 누구세요!” “아, 예. 여기 한 사람이 공원 앞 길바닥에 누워있는데 전화벨이 울려서요″   남편은 술이 취해 새벽까지 귀가하지 못하고 길바닥에서 온 밤을 보내고 지나가던 행인에 의해 발견된 것이다. ‘아! 아! 그래도 살아 있었구나!’ 아침 새벽 딩동 벨이 울렸다. 이른 아침 미처 출근하기도 전에 경비 아저씨가 날이 밝기 전 교대하여 자리에 앉아 보니 원가 희끗희끗 반짝이던 물체가 보여 가까이 가보니 사람이 이중주차 공간에 누워있더라는 것이다. 아하, 만약 앞차가 조금만 후진을 했던들 즉사할 뻔한 순간이라 경비 아저씨가 모시고 왔단다.   ‘오, 신이시여!! 저는 전생에 어떻게 살아왔으며, 무엇을 잘못했고, 무엇으로 인해서 이렇게도 어렵게 살아야 하는가!’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무엇이 문제일까?직장에 나갔다. 불안한 마음으로. ‘오늘 또 출근 안했어요.’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는다. 혹 죽었나?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직장의 업무를 뒤로 미루고 빠져 나왔다. 집에 가서 죽었나 확인하려고. 운전대를 잡고 전화를 걸면서 고속도로 중간 쯤에서 전화를 받았다. 부스스한 목소리로.... “나 괜찮아,”   퇴근 후 집에 와보니 남편이 없었다. 전화를 10번쯤 걸었으나 예상대로 받지 않았다. 집 주위를 미친 듯이 뒤졌다. 우리 차인 것 같은 비슷한 차량이 서 있었다. ‘아! 아!’ 자동차 문을 열어 보니 맥주병이 가득 차 있었고 연기가 자욱했다, 사람은 인사불성이었다. 대화는 물론 의사소통도 불가능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무엇이 문제일까? 왜 그럴까? 저런 사람이 아니었는데...’다음날도 그리고 다음날도...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나는 남편 회사의 직원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 예, 어젯밤에 약주가 괴해서.” “아 예. 어제 손님 접대가 있어서.” “아!아!”   남편이 해야 할 일과 근황에 대해서 알리고 처리하고... 그 때만 해도 남편을 휠체어에 태우고 모든 것을 해 주고 있다는 것을 알 리 없었다. 중독은 이미 남편의 생활을 조정하고 있었고 우리 가정은 중독으로 인해 인간관계가 파멸되어가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홀로서기를 내심 준비하고 있었다. 도저히 기본 생활이 되지 않았다.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었다. 마음은 황폐해 가고 있었고, 우리 가족의 일상은 남편의 술로 인한 사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술 중독은 치료해야 하는 질병이고 완치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리 없었다. 큰 딸아이가 줄곧 술 중독은 치료받아야 하는 질병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지만 내심 남편이라는 인간 자체에 실망과 분노를 가지고 있었다. 딸아이가 중독이 질병이기에 분노를 느끼지 말고 병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말로 줄곧 분노를 조절하고 있었다.   사실 남편은 어릴 적 무척이나 가난했었단다. 그로 인해 마음에 많은 상처가 있을 것이다. 그 상처는 무언가의 집착으로 나타나고 그 집착은 중독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더구나 술 문화가 만연한 사회에서 내성적이었던 남편은 고학력자이면서 성공에 대한 열정이 있는 사람이어서 중독의 속도는 가중되었고 결국 사회생활에서 버티기에 너무나도 연약했던 체질은 중독으로 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어떻게 하면 술로 인한 고통을 피할 수 있을까?’정말로 술로 인한 고통을 피하고 싶었다. 남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 평안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의 힘으로는 피할 수 없는 고통만이 우리의 전부였다. ‘해결의 답은 무엇일까? 입원치료, 그러나 입원?’ ‘택도 없는 소리... 아빠가 입원해?’일전에 권위 있는 의사에게 남편의 진료를 부탁했었으나 “저요? 일주일에 맥주 2-3캔 먹어요. 술 잘 안마셔요.”라는 남편의 말에 명의라고 하는 의사들도 속수무책이었다. ‘그럼 어쩐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딸아이가 새 사위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나온단다. 알코올 특화병원에 아빠의 입원을 위한 설득을 위해서 말이다. 중독에 시달린 나머지 중책을 맡은 나의 직장의 일은 이미 남의 일이었다. 나는 결심했다. 나는 35년간 한 번도 결근해 본 적이 없다. 어릴 적 아이가 아플 때는 아이를 데리고 직장에 출근했다. 그러나 너무도 고통스럽고 급했다. 직장 출근도 미루고 설득하고 또 설득했다. 병원은 두 군데 선정되었다. 두 군데 병원에 다 전화를 하였다. 두 병원 다 입원 치료와 입원 시 본인을 설득하라고 하였다. 술 중독 특화된 병원, 보건복지부 인증기관, 다사랑중앙병원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의 답이었다. 행운의 여신은 역시 내 편이었다. 나는 큰 딸아이가 가르쳐 준 대로 의왕시에 자리 잡고 있는 다사랑중앙병원을 찾기로 하였다. 그리고 설득을 했다.   “우리 술 전문병원이 있다는데 한 번 가서 진찰만 받아 보자.” “응, 알았어. 나 내일부터 술 안 마실게. 믿어봐.???? 계속되는 줄다리기 속에 입원은 속수무책이었다. 우리 큰 아이는 언제부터인가 아빠를 위해 중독에 관해 많은 정보를 익히고 병원의 입원을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금요일 아침 출근을 미루고 설득에 설득을 거듭했다. 좀처럼 결근하지 않는 나를 보며 남편은 이상하다 생각했고 ‘그래, 진료만 받아보자’는 심정으로 다사랑중앙병원에 가기로 결정했다.   다사랑중앙병원 진료 의사에게 미리 들어가 우리 남편은 중독자이다 알려주고 싶었다. 진료실에 들어갔다. “술을 어떻게 마시나요!” 등 술 중독에 관한 질문이 이어졌으나 남편은 모두 부인하고 있었다.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중독인데, 당신 얼굴 보니 중독 맞구만! 혼자 밥을 먹지 않고, 술을 마시고 음주 후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알코올중독입니다. 입원하세요.????   가슴에 꽂히고 머리를 찌르던 의료진의 단호한 말. 순간 모든 것이 뚫리며 가슴에 맺힌 것이 풀리는 듯했다. 지금도 의료진이 했던 그 말이 귓가에 맴돈다. 입원은 결정되었다. 그러니까 그날이 금요일이었는데 이후 토요일에 남편은 입원할 거란다. 입원이 결정된 금요일도 회사 일을 처리해야 한다면서 술을 만신창이로 먹고 저녁 늦게서야 집에 돌아왔다.   ‘맞다, 중독이다’라는 말을 마음속으로 수없이 되뇌었다. 남편에게 시달릴 때마다 나의 분노를 조절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도록 이 순간까지 오게 한 큰 아이의 고마움과 든든함이 나를 감쌌다. 토요일 입원!!! 집에 돌아온 나의 정서는 너무도 피폐되어 있었고 허하고 서먹하고 불안했다. 무엇을 해야 하는데. 허둥대며 마음속으로는 ‘중독이다’를 수없이 되뇌이고 있었다. 중독이 질병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데는 현장에서의 숱한 고통이 진행된 이후에나 알게 된다는 것을 그때알 리가 없었다.   입원 2주일 후 면회를 하게 되었다. “여보 나 정신병자인거 맞아.” 눈을 마주치지 못할 정도의 흐릿한 눈빛으로 “나 알콜중독자야. 상담사가 준 책을 읽어보니 맞는 것 같아.” 눈을 마주지지 못했다. 물었다. “어디 아파?” “아니, 병원에서 준 약 먹었어,”   아! 아! 남편도 적잖이 자신을 알게 된 것 같았다. 아! 그 고통 중에도 오랜 세월 부인하더니!내가 알콜중독자? 아!아! 마음 속에 알 수 없는 희망과 카타르시스가 일어나고 있었다. 길고 긴 터널을 건너왔구나! 마음 속이 뻥 뚫리는 듯했다. 입원 후 2주일 만에 그렇게도 어렵다던 1단계가 이루어진 순간이었던 것이다.   사실 그때 나는 정말 너무도 급했기에 입원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해 입원 자체를 주변에 다 알렸다. 심지어는 회사에 입원 상태를 알린 후 회사 사람들이 의사의 허락을 얻어 병원 내에서 회사의 업무를 처리하게 하였다 광고할 일은 아니라도 적어도 질병이기에 치료를 숨길 일은 아니라고.   다사랑중앙병윈의 치료는 시작되었고 그 치료는 특화되어 있었다. 환자 본인에게 단순히 약만 주고 신체만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변화를 위해서 환자는 물론 가족에게도 교육이 철저하게 이루어졌다. 가족교육은 그야말로 우리의 가족의 일상을 CCTV로 찍어 본 듯 우리 가정의 이야기였다. 알코올중독은 본인만의 병이 아니라 가족병이란 측면에서 가족교육은 단주하는 데 절대로 필요한 것이었다. 우리 가족이 왜 그런 고통을 당하고 사는지에 대한 원리를 설명해 주고 있었다. 중독적 사고의 특성, 공동의존 등. 알콜중독 환자와의 공동의존은 환자를 휠체어에 태우고 다니는 가족의 모습이라는 것도. 특히 알코올중독자는 술을 먹어야 양쪽의 뇌가 균형을 이루어 정상인처럼 행동할 수 있다는 것도.   ‘아! 아!’그때는 정작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직장이 있었음에도 나는 매주 진행되는 가족교육에 참여하여 마치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원리를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원리가 이해되면서부터 단주의 길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고 고통의 답이 바로 이 가족교육이었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더더욱 절실히 깨닫는다. 왜냐하면 알콜중독 치료를 할 사람도 가족이고 결국 그 치료를 막고 있는 것도 가족이기에...   관리병동에서의 인지 치료는 단계마다 매우 의미가 있었다. 약물 치료와 함께 환자에게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글을 작성하게 하고 그 글을 병원 환우들과 환자 가족 앞에서 단주를 약속하는 프로그램은 정말로 유익했다. 상담사 선생님과 문답형식으로 이루어지는 순간마다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마치 서럽게 살아온 나의 고통에 대한 보상인 것처럼.....   또 환자 교육 시 남편이 적어 놓은 노트를 보니 앞에 앉은 환우가 여자였던 것 같았다. 노트에 여자 뒷머리를 그리고 그 옆에 사탄이 불을 뿜는 듯한 곳에서 자신이 혀를 낼름거리며 술을 갈망하는 그림을 그렸다. 그 그림은 정말 명화 중의 명화인 것 같았다. 자신의 심리가 다 드러나는 것 같았다. 아!아! 다사랑중앙병원의 치료가 먹혀 들어가고 있구나! 환자 교육도 보호자 교육 못지않게 내실 있고 꼭 필요한 교육이며 그 교육이 단주를 위한 중요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어서 9주간의 개방병동의 행동치료 과정은 단주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간들이었다. 다행히도 남편은 개방병동의 치료를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더 치료를 받겠다고 했다. 역시 행운은 우리 편이었다. 개방병동의 치료가 결정된 후 나는 집안의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다. 술의 이미지와 맞물린 가구들, 특히 침대와 술, 나는 이제껏 살아온 것들 부정하듯 평생 쓰려고 장만했던 가구들을 다 버렸다. 남편이 집에 외출을 왔을 때 새롭게 시작하려고.   마음 속에 생기는 두려움은 다사랑중앙병원과 동행함으로써 해소하기로 했다. 이제 두렵지 않다. 인생의 이 무거운 짐을 다사랑과 함께 한다는 믿음과 함께.... 마음 속의 버팀목이 된 다사랑중앙병원의 치료. 특히 의료진의 전문성, 보호사님들의 따뜻한 배려, 희망의 말들, 다사랑중앙병원의 치료 시스템은 분명 나의 아군이며 고통을 풀어줄 정답들이었다.   “나, 당신한테 잘못한 거 너무 많아. 특히 술 먹고 당신 눈 다치게 한 것. 내가 너무 잘못한 것 같아. 그동안 당신한테 잘못한 것들 하나 하나 적어두고 있어. 8개까지 적었어.” 분명 내 귀에는 그렇게 들리고 있었다. 남편의 눈에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 알 수 없는 깊은 안도와 카타르시스가 일어나고 있었다. “여보, 나 지금 내 인생 전체를 돌아보고 있어. 과거의 상처가 나의 열등 의식이, 나의 상처가 중독으로 나타난 것 같아. 매일 매일 나 자서전 쓰고 있어. 나 여기 있어도 바빠.” ‘아! 아!’   그렇게도 바라고 바라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행운이 나에게 일어나고 있었다. 기적일까! 혼란스러웠다. 같이 공감하고 소통이 된다는 것이, 술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분명 5년 전보다 남편은 변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회복을 할 것이다. 그 변화는 우리 가족의 행복의 전환점으로 이어질 것이다. 또한 과거의 그로 돌아가 온전한 한 인간으로 살아갈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 이것만이 나도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길일 것이다. 자손에게 물려줄 건강한 재산일 것이다.   다사랑중앙병원의 특화된 프로그램을 마치고 퇴원을 했다. 두려움과 함께 찾아온 퇴원.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남편은 상담사님의 도움으로 A.A.모임이란 곳을 매일 나가기 시작했다. 나머지 가족은 알아넌 모임에 참석했다. 생소하고 낯설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길을 걷고 있구나!를 깨달았고 알 수 없는 새로운 또 다른 생활이 시작되었다. 모임의 참석 횟수가 늘어날수록 우리 가정은 다른 어려운 가정과 유대관계를 맺고 서로에게 격려하고 지지하는 삶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나는 공개모임의 참석을 통해 남편을 더 이해하게 되었고 모임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나만의 단주가 아니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불빛이 되고 싶었다. 알아넌에서 봉사도 하였고 개인 간 소통을 통해서 마음을 나누기도 하였다   남편은 어느 날 공개모임에 필요한 100인분의 음식 준비를 부탁해왔다. 처음에는 해본 경험이 없어 힘들었다. 평생 직장생활로 요리 솜씨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감사한 마음으로 행복한 마음으로 준비를 했다. 어찌 보면 봉사라는 거창한 단어를 쓰지 않지만 내 생애 매우 의미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후 남편은 술로 고통받는 곳에서 메시지하는 것을 우선순위로 삼는다. 모임에 나가는 것도 너무 좋아한다. 지금 우리 가정은 완치는 아니겠지만 휠체어를 타지 않는 건강한 삶으로의 회복 중인 것은 확실하다.   중독은 단지 겉으로 드러나 있는 현상일 뿐 그 뿌리에는 깊고 깊은 상처가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그 상처의 치료는 가족 간의 순기능적 역학관계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이제부터 모든 문제는 나로부터 출발한다. 내가 살아오는 인생의 틀을 바꾸고 패러다임을 바꾼다. 행복한 일상을 위해서, 평범한 일상을 위해서, 또 다른 새로운 시작으로 가기 위한 기적을 이룰 것이다.   수없는 어려움 속에서 단주를 시작한 남편에게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아울러 우리 가족의 새로운 시작을 위한 전환점을 마련해 주신 단주를 위한 특화된 프로그램을 진행해준 다사랑중앙병원의 의료진과 상담사님들에게 거듭 거듭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남편은 지금 현재 다사랑 ‘늘푸른’ A.A.모임의 대표 봉사자와 신림 동행모임 산악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매달 3째주 수요일과 마지막 주 화요일에 다사랑중앙병원에 자신의 회복 경험담을 전달하는 A.A.메시지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이 모든 활동은 아마도 자신의 평생의 단주하는 데 매우 도움이 될 것이며 그 길은 우리 가족의 행복의 지름길일 것이다.

다사랑 2021-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