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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사랑중앙병원에서 치료받은 환자의 가족분들이 보내주신 생생한 경험담입니다.
알코올중독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꺼이 치료의 조력자가 되어 가정의 평화를 되찾으신
알코올중독자 가족들의 회복수기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알코올 중독 가족들에게 큰 희망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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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알코올 중독 가족수기] 나쁜 사람이 아닌 아픈 사람
등록일 2021-02-09 조회수 344 이름 다사랑
첨부파일 2019-가족수기_썸네일.jpg

[2019 가족수기 공모전 참가상]

 

나쁜 사람이 아닌 아픈 사람

 

○○

 

나는 서른 살, 알코올 중독에서 회복중인 아빠의 딸이다. 술에 대한 나의 기억은 5살부터였다. 그 시절 시골에서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이 많아서 알코올 중독이 병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나의 할아버지 또한 매일 밤 술에 취해 밤새도록 폭언하고 살림을 부시면서 주사를 부렸고 경찰도 불렀다. 대처할 방법을 몰랐던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가 잠이 들 때까지 밖에서 추위와 어둠을 견뎠다. 언젠가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빠 또한 매일 술을 마셨고 뇌가 손상되고 성격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때때로 다른 사람 같은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유치원 때부터 하루도 눈물 흘리지 않고 잠에 드는 날이 없었다. 제발 하늘에 기도했다. 하루만 눈물을 흘리지 않고 자보고 싶다고 기도했다.

 

어느새 고등학생이 되었고 아빠의 증상은 날로 심해져 저녁만 취해있던 것을 넘어서 몰래 하는 음주가 매우 심해졌다. 안주도 없이 차에 숨겨둔 소주를 병째로 마셔 급하게 취했고 음주양도 증가했다. 이제는 몇 병을 먹는 건지 알 수 없어 집 주변의 빈 병들을 주우며 짐작할 뿐이었다.

 

나는 집에서 도저히 학업을 이어나갈 수 없어 안쓰러운 엄마를 홀로 남겨둔 채 자취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아빠의 증상은 날로 심해져 구역질을 시작했고 낮에도 술을 마시지 않으면 버티지 못했다. 나는 술을 마시고 링겔을 맞으면 뇌부종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아빠를 내과 병원에 모셔가 의사선생님께 도움을 요청했다. “아빠가 술을 드셨는데 구역질이 심해요. 위험하지 않은 약을 처방해주세요.” 그렇게 병원에 다녀와 증상은 완화되었지만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다.

 

시간이 지나 나는 성인이 되었고 알코올 금단 증상이 심해진 아빠를 더 이상 엄마가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아빠는 알코올 중독이 심해지면서 더 이상 아무 일도 하지 못했고 구역질과 함께 환시를 보기 시작했다. “검은 것들이 보인다. 무섭다. 옆에서 있어 줘.”하고 말씀하시는 아빠를 보면서 어린시절 술은 드셨지만 근육질의 몸으로 날 업어주던 아빠의 등이 한없이 초라해보였다.

 

나는 매일 아빠의 곁을 지키기 시작했다. 엄마가 생계를 위해 일을 나가시면 아빠를 따라다니며 감시했다. 그러면서 나의 공동의존이 심해져서 체중이 감량하기 시작했다.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아빠의 알코올 중독 치료를 위해 전문 교수님들, 알코올 중독 공동체 분들까지 만나며 병을 고치고자 노력했지만 아빠는 약간의 술에도 만취가 되는 상황에 까지 이르렀다.

알코올 중독에 대해 알게 되면서 A.A.모임과 알코올 중독 가족모임 등을 알게 되었지만 전문적인 A.A.모임에 가려면 다른 지역으로 가야하는데 술을 끊지 못하는 아빠를 모시고 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나마 종교가 있었기에 그저 매일 밤 엄마와 마주 앉아 아빠의 병이 좋아지기를 기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청청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서로를 의지하며 건강했던 엄마가 뇌출혈로 쓰러지신 것이다. 제일 먼저 병원에 도착하여 구급차에 실려 온 엄마와 마주했다. 엄마는 의식이 없었고 나는 불안한 마음에 엄마의 귀에 대고 엄마, 아빠와 가족들은 걱정마세요! 제가 지킬게요. 엄마는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엄마에게 약속했지만 사실 나 혼자서 엄마없이 아픈 아빠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막막했다.

 

응급실에서 대전 모 대학병원으로 이송하여 수술까지 했지만 가망이 없다는 의사의 말에 아빠는 중환자실 문 앞을 떠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친척 어른들이 아빠를 같은 병원 정신과에 입원시켜 주셨다. 정신과 주치의 선생님께서는 이대로 두면 엄마보다 아빠가 먼저 돌아가실 것 같다고 이야기 하셨다. 그리고 보름이 지난 날, 엄마는 천국으로 떠나셨다.

엄마를 보내드리던 날 나는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 3일만 견디자. 술이 먹고 싶어도 여기서 안 좋은 모습 모이면 안 돼.” 나는 슬픈 상황에서도 장례식장에서 큰 일이 벌어질까 마음 편하게 슬퍼할 수 없었다. 아빠는 힘들어하셨지만 3일을 견디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아빠는 일주일만 그냥 나를 나둬 줘.”라고 부탁하셨다. 그렇게 아빠는 엄청난 양의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술에 취해 화장실에서 머리를 다쳐 119를 불러서 응급실에 실려갔다.

 

응급실에서 취한 사람은 수술을 할 수 없다고 했고 정신과에 입원할 것을 권유했다. 나는 정신과 환자들과 알코올 환자들은 다르다고 생각했고 그 곳에서 힘들어하실 아빠를 위해서 다사랑 중앙병원에 아빠를 모셔달라고 친척 어른들께 부탁했다. 하지만 EMS차량에 붙잡혀 가는 아빠를 볼 자신이 없어 응급실 구석 끝 깜깜한 곳에 숨었다. 최근 2-3년 동안 아빠의 상황을 잘 알지 못했던 언니에게 언니, 나 너무 무서워서 볼 수가 없어.”하고 말했더니 눈물을 닦으며 언니가 가볼게.”하면서 언니가 내 손을 꼭 잡아줬다.

 

나는 마음이 너무 약해지고 지쳐있었다. 몇 년 전에도 아빠에게 모 알코올 병원에 입원하자고 권유한 적이 있었다. 당시 아빠는 금단현상으로 구역질이 너무 심해 스스로 입원했었다. 하지만 그 곳은 환자의 자율성과 인권을 존중하지 않았고 아빠는 정신이 피폐해져 체중이 7kg나 줄어든 상태로 한 달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EMS가 대기하고 있었지만 잘못된 병원에 보냈다는 죄책감에 집으로 모셨고 증상은 당연히 더욱 심해졌다.

 

다시 병원으로 보내는 마음이 너무 두려웠다.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다.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 후 일주일이 지났고 주말에는 회사를 안 가기 때문에 2시간 거리에 있는 다사랑중앙병원으로 찾아갔다. 의자에 앉아 계시던 아빠를 보고 반가운 마음 반 걱정되는 마음 반으로 아빠 나왔어. 괜찮아?”하고 물었다. 아빠는 원망 섞인 눈으로 일주일만 두라니까 왜 나를 입원시켰니?”라고 물었다. 나는 아빠가 화장실에서 넘어져서 머리가 찢어졌는데 술 때문에 일반 병원에서는 처치를 할 수 없다고 해서 여기로 왔어. 전혀 기억이 없어?”하고 물었다. 아빠는 머리가 꿰매져 있더라. 기억은 하나도 나지 않아.”하고 대답했다.

 

이미 심하게 진행된 알코올 중독 증상으로 취중에 기억상실이 매일 나타났다. 나는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 여기가 우리나라에서 알코올 치료를 가장 전문적으로 한다고 들었어. 우리가 이 병원 주변에 집을 구할 동안만 아빠가 치료를 받고 기다려줘.”하고 말했다. 아빠는 표정이 밝아지시더니 이전에 나쁜 기억으로 남은 알코올 병원에 비하여 다사랑은 시설도 매우 좋고 의료진들도 친절하다며 안심하셨다. 나는 아빠가 계시는 방에 가보았다. 주변에 다른 어른들도 많이 입원해 계셨다. 인사도 드리고 간식도 나누어 드리면서 아빠가 계시는 동안 부디 외롭지 않게 지내시기를 바랐다.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한 달이 되었다. 나는 그사이 다사랑중앙병원에서 주최하는 가족 모임에 서 다른 가족들의 회복 후기도 듣고 경기도에 집도 알아보게 되었다. 사회 초년생이었던 탓에 경제적인 부분이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다는 것이 겁도 났지만 아빠의 회복을 위해서라면 병원 가까이에서 살면서 끝까지 치료를 위하여 함께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한 달 동안 아빠는 나가고 싶다는 전화를 자주 해서 나의 마음을 힘들게 했고 심한 금단 현상으로 힘들어 했다. “아빠 금단 한 달이 제일 위험하다고 했어. 음주 욕구가 가장 강해지니 100일 동안 견뎌보자. 100일이 지나면 금단이 완화되면서 나와서 살 수 있을 거야.”하고 교육 받았던 내용, 책에서 읽은 정보들로 흔들리지 않고 지지하였다. 그 당시 내가 해줄 수 있는 도움은 아빠가 병원에서 금단 현상을 이기고 치료받게 해주는 것이었다.

 

아빠는 관리병동에서 3개월 이상 지낸 후 개방병동으로 가보자는 상담사 선생님과 나의 권유에도 거기에 내려가면 재발된다고 하는 이야기가 많아. 다시 폐쇄병동으로 오고 싶지 않아.”하고 말씀하시면서 불안해 하셨다. 나는 절대로 그렇지 않아. 상담사 선생님이 사회로 나오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하셨어. 아직 집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으니까 집을 이사할 때까지 용기내서 개방병동에서 지내보자.”하고 권유했고 아빠는 결국 개방병동에 내려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상담사 선생님과 동기 회복자분들과 친해진 아빠는 산책도 하고 즐겁게 생활하게 되셨다. 아빠는 진작 내려올걸 그랬어. 이곳이 훨씬 좋다.”하고 말씀하셨고 관리병동에서 근거 없이 도는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셨다. 또한 병원에서 철저하게 외출 후에 이루어지는 음주 측정이 있었기에 나는 더욱 안심할 수 있었다.

 

드디어 아빠의 첫 외박이 이루어졌다. 더운 여름 날 나는 아빠와 함께 서울 언니 집으로 가기로 했다. 재발이 걱정되었지만 기대도 가득했다. 아빠를 모시고 가서 미용실에서 머리도 잘라드리고 곱창 집에서 곱창을 먹으면서 술 대신 시원한 음료를 마셨다. 꿈만 같았다. 내가 아빠와 이렇게 맑은 정신 상태로 마주볼 수 있다니! 그렇게 시작된 아빠의 금주 생활이 약 7년 정도 된 것 같다. 그 사이 마른 주정도 있었고 우울증, 심리적으로 불안해하는 상황도 많았지만 알코올 중독 회복자모임(A.A.)모임과 가족들의 지지, 아빠 본인의 지속적인 노력, 다사랑중앙병원 의료진의 도움으로 잘 지나온 것 같다.

 

나는 이전의 회복자 가족이 회복할 수 있다고 조언을 해준 것이 생각났다. 우리 가족은 절대 지나갈 수 없는 터널 같았고 그런 행운은 나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확신한다. 전문적인 기관의 도움을 받으면서 치료해야 할 질병이고 치료를 시작해야 회복 또한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알코올 중독 환자는 나쁜 사람이 아닌 아픈 사람이다. 암이 원해서 걸리지 않듯이 알코올 중독환자도 중독이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니다. 술은 한 사람의 뇌를 망가뜨리고 한 인생을 짓밟고 그 가족들의 행복을 빼앗아 간다. 지금 이 시간에도 술에 중독되어 가고 있는 가족이 있다면 알코올 중독 치료 전문 기관에서 회복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줘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소중한 한 생명과 가족들이 회복할 수 있는 결과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끝으로 아빠와 함께 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만들어 주신 나의 하나님, 하늘에서 보고 있을 천사 같은 내 엄마, 지옥같은 시간들을 잘 견뎌내 온 나의 아빠 그리고 알코올 치료 전문 이라는 기회 제공으로 알코올 중독자들과 가족들의 삶에 새로운 희망을 선물해주신 다사랑중앙병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