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랑중앙병원

전국 최초 3회 연속 보건복지부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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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회복수기

다사랑중앙병원에서 치료받은 환자의 가족분들이 보내주신 생생한 경험담입니다.
알코올중독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꺼이 치료의 조력자가 되어 가정의 평화를 되찾으신
알코올중독자 가족들의 회복수기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알코올 중독 가족들에게 큰 희망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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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알코올 중독 가족수기] 함께 가는 회복의 길

[2019 가족수기 공모전 대상]   함께 가는 회복의 길   진○○   비 오는 수요일 저녁, 요 며칠 날이 풀리고 봄이 오는 듯 하더니 오늘은 제법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아침 출근길에 우산을 챙겨가라는 아내의 말을 듣지 않았더니 낭패로구나 라는 생각에 잠길 때쯤 휴대폰의 알람이 울립니다. 아내가 싱싱한 딸기 사진과 함께 ‘아침에 이야기한 대로 아들 줄 간식 준비했어’라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슬며시 입가에 미소가 번집니다. 아침에 나눈 부부 대화에서 한창 먹을 나이인 6살 아들에게 식사와 간식을 지금보다 넉넉하게 챙겨주면 좋겠다는 나의 요청을 아내가 멋지게 들어준 것입니다. 이 얼마나 힘들게 얻은 일상의 소소함인지요.   3년전 이맘때도 비가 내렸습니다. 병원 앞에서 울며 불며 엄마 품을 찾는 아들을 품에 안은 채 겨우 우산을 들고 우는 아이를 힘겹게 달래며 집에 가는 택시를 잡았던 그때가 어제처럼 기억납니다. 울면서 엄마를 찾던 아이의 손사래에 쓰고 있던 안경이 길바닥에 떨어졌습니다. 한 손엔 아이를 보듬고 다른 한 손에는 우산을 들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우산을 내리고 다시 안경을 집어썼습니다. 안경을 쓰고 나니 뿌옇게 눈앞을 가리고 흐르는 것이 눈물인지 빗물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술을 좋아했습니다. 아니 술을 사랑했습니다. 대학에서 선후배로 만난 첫 자리도 술자리였습니다. 선후배들을 하나하나 살갑게 챙겨주는 모습에 호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단순히 술을 좋아하는 수준을 떠나서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술을 마신다는 것은 연애를 시작하고 나서 알게 됐습니다. 긴 연애 기간을 거쳐 결혼 한 후에도 아내는 매일 같이 술을 마셨습니다. 오랫동안 준비했던 국가 공무원 시험에서 최종 면접까지 올라갔다가 떨어진 다음부터 술을 찾는 횟수가 더 늘어났습니다.   아이를 가졌을 때 잠깐 절제하는 듯하더니 아이를 낳은 이후부터는 그 정도가 더 심해졌습니다. 아예 휴대폰도 꺼놓고 술을 마시기 일쑤였고 연락이 되지 않아 애가 탄 나머지 근무 시간에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간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아내는 술에 취해 자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주는 절망감과 함께 아이가 너무 걱정되었습니다. 알코올에 중독되면서 가족들이 점점 더 힘들어하기 시작했습니다. 결정을 내려야했습니다. 병원에 입원했던 첫 날 새벽, 진정제를 맞고 자고 있는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고 나왔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지금까지 내버려둔 내가 너무 미안했고, 지금 여기 잠들어있는 아내가 죽도록 미웠습니다.   아내는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해 관리병동에서 치료받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2개월 동안은 아무런 연락도 하지 못했습니다. 주치의 선생님, 그리고 상담사 선생님과 가족 면담을 진행하고 그분들의 말씀을 최대한 따르려고 노력했습니다. 당분간은 환자에게도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가족들 역시 환자와 떨어져 지낼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대신 매주 토요일 병원에서 준비한 가족 교육 프로그램에 꼬박꼬박 참여했습니다. 집에서 병원까지 왕복 5시간을 도로 위에서 보내야 했지만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가족 교육을 들었습니다. 나쁜 습관인 줄만 알고 있었던 알코올 중독이란 병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가족으로서 이 병에 대처하는 법, 환자가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법에 대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대중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미디어를 통해 이 병이 얼마나 왜곡되어 전달되고 있는지, 그로 인해 환자와 가족들이 받지 않아도 될 고통을 얼마나 많이 받고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 먼저 회복 과정에 있는 환자들과 환자 가족의 경험담을 들으면서 ‘내게도 저런 날들이 올까’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알코올 중독은 습관이 아닌 병입니다. 암이나 감기와 마찬가지로 환자의 의지만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합니다. 동시에 병이기 때문에 적절하고 효과적인 치료가 필요합니다. 또한 대부분 환자의 가족 혹은 사회 생활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서 생기는 병이기도 합니다. 반드시 환자 스스로 이런 사실을 깨닫고 치료와 회복을 위해 노력해야 하며 가족들 역시 공동 의존과 그로 인한 부작용에서 치유되고 회복되어야 합니다.   특효약이 있어서 한 순간에 완치되는 병이 절대 아닙니다. 죽을 때까지 환자와 가족들이 하루하루 중독을 이겨나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병입니다. 가족 교육을 통해 이런 내용을 알고 나서 중독과 환자에 대한 인식이 바뀔 수 있었으며 이를 계기로 병원에서 운영하는 단계별 회복 프로그램에 대한 신뢰가 생길 수 있었습니다.   아내의 1단계 발표에 참가하기 위해 병동에 처음 들어갔던 날이 기억납니다.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이 알코올 중독이라는 병으로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지 신기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가 알코올 중독자임을 인정하며 치료와 회복에 매진하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아내의 모습에 어렴풋이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관리 병동에서 내려와 개방 병동으로 옮기고 외부 단주 모임에도 참가하면서 스스로 치료와 회복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내가 집으로 첫 외박을 나온 날, 아이를 돌보기 위해 올라오신 어머님과 크게 다투게 되었고 아내의 상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습니다. 다행히 재발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심한 심리적인 불안함과 분노를 표출했고 담당 선생님은 감정적 숙취에 빠진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내는 병원에서 상태 점검을 받았고 그 이후 집으로 외박을 나올 수 없었습니다. 저 역시 희망이 생겼다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두려움과 절망, 아내에 대한 원망과 분노에 가득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힘든 시기였습니다. 이후로도 아내는 틈날 때마다 자신을 입원시킨 것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쏟아냈습니다. 저도 당시에는 이런 상황을 체념한다기보다 어떻게 이 상황을 마무리하면 좋을까를 더 많이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이혼하면 나아질까? 아이는 어떡하지? 그럼 아내는 어떻게 될까?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이 끝도 없이 이어져 나 스스로가 사라져가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렇게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무렵, 상담사 선생님과 진행하는 부부 상담은 유일하게 제가 숨통이 트이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만큼은 솔직한 제 감정을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아내에 대한 울분을 토하기도 하고, 힘든 상황에서 억누르고 있었던 감정들이 터져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상담사 선생님은 그런 저를 이해해 주시고 받아 주었습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분이 선생님 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독 환자의 회복을 위해서라도 가족 관계의 회복이 중요하고, 그러기 위해 가족들 스스로의 회복과 이를 기반으로 한 부부 사이의 관계 회복이 선행되어야 했습니다.   첫 부부 상담 시간, 우리 부부간의 대화를 잠깐 듣고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두 분은 대화를 하라고 했더니 자기 할 말만 하고 계시네요. 남편분 방금 전에 아내가 어떤 이야기 했는지 기억나시나요?” 정말 우습게도 그 당시 전 방금 아내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말을 해도 아마 저를 공격하려는 의도라 생각하고 저도 똑같이 상대방을 향해 쏘아붙이는 말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대화다운 대화도 없이 아내와 그 오랜 세월을 보내왔던 것이라는 생각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습니다.   가장 먼저 대화하는 법을 연습해야 했습니다. 나이 마흔이 넘어 대화하는 법을 연습한다고 생각하니 한편 우습기도 했지만, 실제로 아내와 대화를 이어나가기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대화란 다름 아닌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내 이야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고 나의 내면에 귀 기울여 진심을 말하는 것. 이 간단한 규칙을 지키는 것이 너무나도 어려웠습니다. 내 맘대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해석하고 상대방을 내 맘대로 움직이기 위해 상대를 상처 입히는 공격적인 말만 쏟아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꾸준하게 상담을 지속하면서 대화하는 연습을 계속했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말 그대로 상대방이 하는 이야기를 그냥 그대로 듣고 따라 하는 연습부터 했습니다. 상대방의 말이 끝나도록 기다리고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이조차도 불가능했습니다. 순간순간 튀어나오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는 연습이었습니다. 저도 아내도 모두 그런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되는 연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부부 상담을 이어가면서 아내는 개방 병동에서의 치료와 회복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했습니다. 교육과 내부 모임같은 원내 생활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원외의 봉사 활동에도 시간이 될 때마다 참가했습니다. 그렇다고 늘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회복의 길을 잘 가는 듯 하다가도 다시 분노와 원망에 휩싸이고, 스스로 회복에 대한 의지와 주변의 기대를 져 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럴 땐 병원과 선생님들을, 그리고 아내를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제가 있다고 느낄 때마다 상담사 선생님과 주치의 선생님께 내가 느끼는 아내의 상황을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조언을 얻었습니다. 선생님들은 아내와의 면담과 점검을 통해 문제점을 점검하고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주셨습니다. 힘들었겠지만 아내 역시 그런 조치를 잘 따라주었습니다. 그렇게 어느새 입원한 지 1년의 시간이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1년이 지날 때쯤 개방 병동에서의 회복 프로그램을 이어 재활 병동에서 원내 생활을 이어갈지, 아니면 이 상태로 퇴원을 할지에 대해 고민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병원의 도움 없이는 회복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던 시점인지라 상담사 선생님이 적극 권장해 주신 원내 재활 프로그램을 이어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저에게도 아내에게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결국 스스로 원내 재활을 이어가는 것이 본인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고 아내 역시 자발적으로 원내 재활 프로그램에 참여해 주었습니다.   부부 상담도 여전히 꾸준히 이어 나갔습니다. 긴 연애 기간과 10년 가까운 결혼 기간에도 잘 몰랐던 아내의 어린 시절과 서로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듣게 되면서 이제서야 한 사람으로서의 아내를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나 또한 지금의 나를 만들게 된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와 성장 과정을 다시 돌아보게 될 수 있는 값진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나 자신과 상대방을 돌아보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을 상대방에게 이야기하는 것. 어린이가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해 배워야 하는 가장 간단한 것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한 번도 제대로 배워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배우고 깨달아가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아내는 긴 원내 재활 과정을 마치고 1년 11개월 만에 다사랑중앙병원에서 퇴원했습니다. 그리고 퇴원한 지 500여 일이 지났습니다. 지금까지 1주일에 최소 한 번은 반드시 시간을 내어서 부부 대화를 진행했고 아내는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회복을 위한 단주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이제서야 우리 가족이 건강한 가정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시간을 맞이하기 위해 서로가 얼마나 오랜 세월을 돌아올 수밖에 없었는지요.   알코올 중독이라는 이 힘들고 어려운 병을 치료하고 회복하는 과정에서 상대방과 자신을 돌아보고 말하고 듣는, 소통의 가장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도록 도와준 병원과 선생님들, 환우들에게 다시 한번 진심 어린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회복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또한 한 사람의 아내이자 한 아이의 다정한 어머니로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오늘도 노력하고 있는 아내에게도 진심 어린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모든 중독자와 중독자의 가정이 오늘 하루 더 회복의 길로 나아가길 진심으로 바라면서 이 글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다사랑 2021-02-09

[2019 알코올 중독 가족수기] 어두움의 긴 터널을 지나 밝은 빛으로 나아가리라

[2019 가족수기 공모전 최우수상]   어두움의 긴 터널을 지나 밝은 빛으로 나아가리라   고○○   쾅! 쾅! 쾅! “계십니까? 계십니까?” 밤새 뒤척이다 겨우 얕은 잠에 들었을 때 잠자리가 뒤숭숭합니다. 꿈인 줄 알았는데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라는 것이 직감적으로 느껴집니다. 몸을 일으켜 나와 보니 온 집안의 전등은 다 켜져 있고 시계를 바라보니 새벽 3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딸의 불안정한 움직임이 보이고 이어 눈을 껌뻑거리며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게 무슨 일인 거야!’ 혼자 중얼거리며 “누구세요?” “경찰입니다, 신고 접수가 되어 방문했습니다. 문 열어 주십시오.”집 안으로 들어선 경찰은 2명이었는데 딸의 신원을 확인한 후 신고 이유를 재차 물어봅니다. ?딸이 112에 위급하다며 신고를 하여 출동한 경찰이었습니다. 이내 딸이 망설임 없이 대답합니다. “내 방에 나 모르게 감시 카메라를 달아놓고 일거수일투족을 하루종일 감시하고, ?누군가가 창문으로 나를 계속 노려보고 있어요. 제발 범인 좀 잡아주세요.”   그 상황에 어리둥절하여 바라보다 딸의 모습을 세심히 관찰합니다. 경찰 2명은 정돈되지 않은 어수선한 딸의 방으로 들어가 구석구석 이곳저곳 둘러보며 천장이며 벽도 자세히 관찰하였습니다. 창문은 안으로 굳게 잠겨 있었고, 암막 커튼은 바깥 세상의 빛을 완전히 거부한 듯 내려져 있었고 어떤 이상함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경찰은 방 안에서 나와 딸과 다시 면담을 합니다.   “누가 나를 노려보며 감시해요! 미칠 것 같아요! 정말이라고요!” 딸은 횡설수설하며 정확치 않은 목소리로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습니다. 이내 경찰은 저를 바라보다가 “어머니 되십니까?”“예, 제가 엄마입니다.”“제 의견으로는 경찰에 신고하실 것이 아니라, 따님을 신경정신과 쪽으로 치료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경찰이 돌아간 뒤, 딸과 마주 앉아 눈을 쳐다보니 불안한 눈빛에 손을 덜덜 떨고 있습니다. ?묻고 싶은 말이 있었으나 알아들을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딸에게 저는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네며 “들어가 자거라. 경찰 아저씨가 확인해보니 아무것도 없다 하니 불안해하지 말고.”라고 말했습니다.   벌써 진작부터 시작되었던 알코올 중독이 깊어져 환청, 환시, 망상 등의 증상을 딸은 겪고 있었고 저 때가 바로 직접 내 눈으로 목격하고 딸의 심각성을 인지한 첫 번째 사건이었습니다.   변심한 남편이 거의 매일 만취해 들어오는 날이 계속되었고 그런 날에는 술에 취한 채 온 집안의 기물과 집기를 파손했습니다. 주폭으로 변해버리는 무서운 남편... 겁에 질린 두 어린아이와 함께 책상 밑에 담요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숨어서 숨소리를 죽이며 남편이 지쳐 잠에 들기를 기다리곤 했습니다.   ? 엄마를 의지하고 있는 어린 두 자녀 앞에서 부모로서 올바르지 못한 모습도 많이 보였던 부족한 부모였습니다. 제 어린 시절, 부모님은 흔한 말다툼 한 번 없는 금실 좋은 부부였습니다.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 속에 성장한 나는 이런 상황이 너무나 당혹스러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늘 두 아이와 벌벌 떨어야 했습니다.   매일 술에 취해 세상을 비관하기만 하던 남편이 하루 아침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백일이 지난 어느 날, 큰아들이 말했습니다. “엄마 난 해가 지는 저녁이 싫었어. ?가슴이 자꾸 쿵쾅쿵쾅 떨리고 아빠가 올 시간이 되면 무서웠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은 저녁때가 돼도 가슴이 쿵쾅대지 않아요.” 그러자 옆에 있던 딸이 “엄마 나도 심장이 벌렁거렸는데.. 술 냄새는 정말 지독해서 싫었어. ?지금은 술 냄새가 나지 않으니까 살 것 같아요.”라고 말하더군요. 어린 두 자녀의 말을 듣고 참으로 미안하면서 슬펐습니다.   안정되지 않았고 여유롭지도 않아 저는 항상 바쁘게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어떤 어려움이 온다 해도 내 아이들은 내가 지킬 거야. 엄마가 행복하게 살도록 노력할게!’라고 굳게 다짐을 했습니다. 어린 두 자녀와 함께 33살의 젊은 엄마는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이 세상을 마주하며 열심히 살아갔습니다. 아들은 무던하니 심지가 굳고 모범적으로 성장하며 엄마 말에 항상 순종하는 선한 성격이었습니다. 딸도 예의 바르고 인정 많아 엄마의 마음을 잘 헤아려주었고 제가 비운 집안일이며 가게 일도 말없이 도와주는 착한 딸로 잘 성장하는 듯했습니다.   딸이 대학에 들어가 학생회 일을 맡으며 잦은 회식에 술을 가까이 하는 걸 알게 됐습니다. ‘아빠를 닮아서 딸도 술을 좋아하는구나. 대학생이면 공부를 해야지 술 먹으러 대학 들어간 것 같네.’라는 생각을 했지만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지내왔던 딸이었기에 대학생이니 술은 마셔도 된다고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훗날 엄청난 비바람을 몰고 와 태풍이 몰려올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대학 2학년 때, 소화도 안 되고 속이 아파 배를 잡고 빌빌 기어 다녔다며 많이 아프다는 딸을 데리고 가까운 대학병원에서 위내시경을 비롯한 종합검진을 했습니다. 결과는 너무나 충격이었습니다. ?겨우 21살인 딸의 위가 매일 술을 마시는 건설 현장의 50대 아저씨의 위와 같으며 알코올 의존 중증이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내과와 정신과를 병행해 약물과 심리치료를 받았습니다.   알코올 중독에 대한 병식이 전혀 없던 당시의 저는 딸에게 “술도 음식이지만 과하게 먹으면 독이 되니 자제해서 기분 좋을 정도로만 먹었으면 좋겠어.”라고 말했습니다. 걱정이 앞서면서도 엄하게 말하면 딸이 기분 나빠할 까봐 눈치 보며 타이르듯이 얘기했습니다. 자기 몸도 아팠으니 알아들었겠거니 하고 넘겼습니다. 그 후에도 아플 때마다 병원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식은땀이 온몸이 다 젖을 정도로 매일 흘렀다고 합니다. 그러기를 여러 날이 지나고 결국 쓰러지기까지 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한방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는데 몸의 호르몬이 변이되어 땀샘이 제 기능을 못해 땀구멍이 계속해서 열려있는 상태가 지속돼 탈진이 왔다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술로 인해 몸이 서서히 나빠지는 과정이었습니다. 한방병원이 최신 의료시설을 갖추고 있어 한약과 침, 물리치료, 마사지를 받으며 몇 개월간 집중 치료해 회복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후로도 만취한 딸의 전화를 받고 한밤중이나 일하는 중에 시도 때도 없이 딸에게 달려가야 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딸이 자해를 해서 병원 응급실에 누워있는 기막힌 모습도 보게 되었습니다. 우울증 증세도 알코올 중독과 함께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대로는 독립된 생활이 어렵다는 생각에 딸을 설득해 집으로 데리고 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이 세상에도 생지옥이 있다는 걸 처절히 생생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약물치료와 심리치료를 받으러 신경정신과를 외래로 1주일에 한 번씩 꾸준히 다니는데도 불구하고 딸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딸아이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가족과 마주치지 않으려 두터운 마음의 벽을 쌓아놓고 스스로를 가두었습니다. 가족이 집을 비웠을 때만 살며시 나와 있다 가족이 들어오면 마주치지 않으려고 얼른 들어가 방문을 걸어 잠그곤 했습니다.   어느 날, 퇴근해 들어오니 화장실에서 일을 보다가 그대로 찬 바닥에 쓰러져 잠들어 있는 이상하게 변해버린 내 딸이 있었습니다. 한 집에 함께 살면서도 며칠 만에 보는 건지 아니, 얼마 만에 보는 건지 딸은 아주 보기 싫은 추한 노숙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차가운 타일 위에 누워 역한 냄새가 나는 내 딸 같지 않은 딸을 절망스러운 마음으로 샤워기로 물을 뿌려가며 씻기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또 어떤 모습으로 하루를 견디고 있을까?’ 하며 현관문을 열었는데 거실 카펫이 깨진 화분과 오물로 완전 초토화돼 있었습니다. 망연자실해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잠시 망설이다가 깨진 도자기 화분부터 치워야 할 것 같아 청소를 급하게 시작했습니다. ?딸은 이미 만취해 화분에서 나온 흙더미 위에 큰대자로 뻗어 자고 있었습니다. 깨진 도자기 화분들을 서둘러 치우다 날카로운 한 면이 손등을 푹 찔렀습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데 당황해 우왕좌왕했습니다. 술에 취한 딸을 흔들어 깨워 엄마가 손을 못 쓰니 119로 전화해 구급차 불러달라고 말했지만 딸은 휴대폰을 들고 몹시 당황해 손을 떨면서 번호를 제대로 누르지를 못했습니다. ?몇 번을 더 시도해 보았지만 결국 전화번호를 누르지 못하고 방으로 도망치듯이 그냥 들어가 버렸습니다. 정신이 없었습니다. 피가 너무 많이 나오고 멈추지 않아 운전도 할 수 없어 손을 수건으로 둘둘 감싸 쥐고 홀로 15분여를 걸어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파상풍 주사를 맞고 파편을 빼내고 여덟 바늘이나 꿰맸습니다. 치료를 받고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열고 거실을 바라보니 포화가 휩쓸고 지나간 전쟁터 같았습니다. 풍비박산 난 거실에는 흙더미와 깨진 화분들... ?피를 얼마나 쏟았는지 거실 바닥은 검은색으로 변해버렸고 발 디딜 틈 없이 엉망이 되어있었습니다. ?한 달 정도 손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해 회사에서 눈치를 보며 근무해야 했습니다. “일하는 엄마 손을 이렇게 다치게 하니 네 맘은 어떻니?!” 꿰맨 손을 딸의 얼굴에 들이밀며 말하자 딸은 고개를 돌리고 외면했습니다. 내가 화분 조각을 치우다가 다친 것을 딸에게 원인 제공했다며 원망했습니다. 이후에도 평화로웠던 우리 집은 악취로 가득 차고 어둠만 가득했습니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바닥 청소를 하고 오물에 젖은 이불을 몇 채씩 빨아 널어야 했습니다. ?일 년을 쓸 수 있는 세제가 한 달 만에 동났고 새로 구입한 세탁기가 덜덜거릴 정도로 매일 빨래를 했습니다. 한겨울에도 이불을 널어놓으니 이웃들에게 결벽증 환자라고 소문이 났습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걱정되어 방문 고리를 강제로 부수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더니 딸이 신경질적으로 화를 냈습니다. “제발 나를 그냥 놔두세요. 난 죽은 듯이 방안에 가만히 있는데 왜 나를 괴롭히냐구요!” 악을 쓰며 울며불며 초점없는 눈동자에 헝클어진 긴 머리는 오랫동안 감지 않아 뭉쳐있었습니다. “왜 나를 불안한 환경에서 자라게 했나요. 술 먹는 나쁜 유전자를 물려주고 나쁜 피로 태어나게 했냐구요. 나한테 해준 게 뭐 있다고 나한테 이래요. 난 이대로 죽고 싶으니 방문 열지 말아요. 나가요! 문 닫으라고!!!” 모든 걸 포기한 듯 절규하며 오열하는 딸을 바라보며 저는 그대로 무너진다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슬픔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들어 지금껏 열심히 살아온 나의 삶이 다 잘못된 것 같고 부질없다 생각되었습니다.   매일 어둠의 악순환 속에 무거운 발걸음으로 퇴근하던 중 딸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엄마 나 혀가 이상해요. 아파서 물도 못 마셔요. 약국에 들러 약 좀 사다 주세요.” 이젠 말도 어눌하니 잘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정신 놓고 술만 먹어대니 몸이 온전하겠니? 하느님 보시기에도 너무하다 싶어 술 못 먹게 하려고 벌 주셨나 보네.” 아프다는 딸의 말에도 걱정이나 위로는커녕 비아냥거렸습니다. 술에 취한 목소리가 저를 너무 화나게 만들어 곱게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아프다니 걱정스러운 마음에 비상약을 구입해 급하게 집안으로 들어서자 ?항상 잠겨있던 딸의 방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입을 벌려보라 했더니 딸의 혓바닥이 온통 검은색이었고 입안이 꽉 차게 부어 있었습니다. 순간 얼마나 놀랐는지 앞이 깜깜해졌습니다. ‘혹여나 설암이면 어쩌지! 혀가 썩으면 앞으로 이 불쌍한 딸의 앞날은 어떻게 되는 거야. 이제는 하다 하다 말도 못하는 벙어리가 되면 어쩌나!’ 불길한 생각을 가득안고 병원 응급실로 미친 듯이 달렸습니다. 술에 취해있는 상태인데 겁이 나서인지 얌전하게 앉아있는 딸의 모습을 운전하면서 흘깃 보니 애처로워 애간장이 녹을 것 같았습니다. 응급실에서 기본 검사를 마쳤더니 위급환자라며 다급하게 절차를 밟아 급히 딸을 입원시켰습니다. ?일주일간 여러 검사를 하고 내려진 결과는 알코올 중독으로 술을 많이 마셔 온몸의 장기가 모두 제 기능을 못하는 다발성 장기부전이었습니다. 위험수치를 넘어가 있어 예후가 좋지 않으며 딸은 입원 중에도 금단과 섬망이 심해 간호사실로 격리되어 온 몸이 묶인 채로 있어야 했습니다.   살아 있을 날이 얼마 안 남았다 생각하니 딸이 너무나 불쌍하고 안쓰러워 제 마음은 숨 쉬는 것조차 버겁게 느껴졌습니다. ?그동안 사는 게 바빠 남들 다가는 제대로 된 여행 한 번 가본 적 없고 딸과 함께 추억을 만들 시간도 부족하다 생각되니 마음이 바빠졌습니다. 저의 모든 생활을 접고 오로지 딸만을 위한, 딸과의 소중한 시간을 만들어 보자 결심하고 떠났습니다. ?   지리산 끝자락에 위치한 위급한 환자들이 편히 쉬며 생을 정리하는 시설 좋은 휴식 공간을 찾아갔습니다. 여기에서 매일 아침을 기도로 시작해 환자에게 치료가 되는 천연 자연식으로 요리한 음식을 먹고, 편백나무 숲길을 하루에 두 번씩 산행하며 기도와 찬송을 하고, 쉬는 시간에도 성경을 읽으며 이렇게라도 딸과의 평온한 시간을 주신 위대하신 신의 은총에 매일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딸은 얌전히 순응하며 회복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후로도 전국의 유명한 힐링센터를 찾아다니며 보통 사람은 망설이게 되는 비싼 비용을 감당하며 오로지 딸의 회복을 위해 애썼습니다. 그렇게 1년여를 생활하니 푸석하던 딸의 얼굴에 서서히 생기가 돌며 썩어가던 혀도 점차 새살이 돋아 붉은 빛으로 살아나며 염증도 없어졌습니다. 객지를 떠돌다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려 입원했던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습니다. 병원에 예약해 정밀검사를 받은 후 담당 교수님의 진료를 받았습니다. 검사 결과를 컴퓨터로 한참을 들여다보던 교수님께서 딸에게 물으셨습니다.   “이름은?” “000입니다.“환자 이름은?” “000입니다. ?딸이 이름을 대답하니 다시 세 번째 이름을 물으셨습니다. “본인 이름을 말하세요.” 딸이 대답합니다. “제 이름은 000입니다.” “난 오늘 뒤로 넘어져 머리가 깨져도 기분 좋은 날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회복되어서 오셨는지 얘기해 줄 수 있어요?”   담당 교수님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물으니 딸은 그간의 자연생활을 말씀드렸습니다. 모든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자연식을 하며 산을 다니고 기도하고 오늘 하루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지냈더니 마음이 편해지고 우울증은 덤으로 못 느끼겠고 건강해진 것 같다고... 얘기를 다 듣고 난 교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도 비슷한 또래의 딸이 있어요. 그래서 환자분께 마음이 쓰이더군요. 처음 병원에 왔을 때 위험했던 순간을 기억해요. ?그 상태로 망가지고 손 쓸 방법이 없어서 퇴원하신 분들은 다신 이 병원에 오지 못하는 게 현실인지라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환자분의 몸은 이제 모두 완벽하게 정상수치입니다. 이건 기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건강한 몸으로 돌아왔으니 이젠 술을 아주 끊어야 합니다. 이쁜 모습처럼 아름답게 살아가길 바래요. 의사로서가 아닌 아버지의 마음으로 당부를 합니다.” “이제 다시 시작해 보는 거야!!” 저는 딸과 희망에 찬 시작을 외쳤습니다.   객지로 떠돌다 집으로 돌아오니 나름 행복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후 얼마 동안은 운동을 하면서 건강한 생활을 하는가 싶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딸의 모습에 조금씩 변화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다시 음주를 시작했다는 신호였습니다. 오로지 딸의 회복을 위해 객지로 떠돌다 온지 얼마나 됐다고... ?죽어가는 딸을 살려보겠다고 제 모든 생활을 포기하고 매달려 살려놨더니 어떻게 또 술을 입에 댈 수가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생지옥이 또 시작되었습니다. 다시 방문을 걸어 잠그고 딸은 장취에 들어갔습니다. 술 귀신이 붙은 것 같아 성당 교인의 소개로 기도로 귀신을 물리친다는 기도원에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안 간다고 펄펄 뛰는 딸을 강제로 차에 태워 가기도 했습니다. 기도원에 가는 내내 차에서 울며 매달리는 딸을 냉정하게 외면했습니다. 몇 달을 지내도 꺼내주지를 않자 딸은 그곳에서 도망쳐 혼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는 엄마와 오빠를 원망하며 더 나빠진 상태로 힘들어 했습니다. 말도 안되는 곳에 데려다 놓고 생고생만 하다가 왔다고 저를 원망했습니다.   그런데 딸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습니다. 딸이 알코올 중독으로 기도원에 갔는데 알코올 중독인 걸 알면서도 딸에게 술을 먹게 하고 봉사라는 명목으로 온갖 잡일을 시켜 집에 상주해 있는 가정부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했다고 했습니다. 술을 주면 말을 잘 들으니 그 점을 이용한 것이죠. 돌아가겠다는 딸에게 음주 사실을 집에다 알리겠다며 니 부모가 너의 말을 믿을 것 같으냐고 회유하듯 협박까지 한 정말 나쁜 사람들이었습니다. 저에게는 다달이 200만원씩 치료비랍시고 받아 챙기고는 딸은 딸대로 노동을 시켜 부려 먹었다니...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딸은 말했습니다. “그런 일을 당하면서 집에 가겠다고 하면 엄마는 정신 차리고 오라고만 했지, 내 말은 전혀 들을 생각이 없었잖아요. 그래서 이 얘기를 할 수가 없었어요.” 딸에 대한 불신이 컸던 탓에 그 당시 딸이 사실대로 이야기했어도 저는 제 귀를 막아버렸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전보다 늘어난 딸의 음주와 기물파손까지 더해진 폭력성에 근심이 늘어갔습니다. 이대로 놔두면 알코올로 인해 또다시 건강이 나빠져 회복 불능 상태로 갈까봐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술과 격리시키려면 정신병원에 입원시켜야 한다고 아들이 말했습니다. 그래야 정신을 차릴 거라고... 아무리 힘들고 긴박한 상황이 와도 이력이 남을까 정신병원에는 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딸에게 애원도 하고 정신병원에 넣어버린다는 맘에도 없는 말로 겁도 주었지만 딸의 음주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지방의 국립 정신병원에 입원하러 간 날에는 딸이 혀를 깨물고 자살할 거라며 못 죽을 것 같으냐고 죽는 걸 꼭 보여주겠다며 펄펄 뛰며 협박까지 했습니다. 강제로 입원을 한 후 딸에게 면회를 갈 때나 올 때 흘린 눈물이 하도 많아서 나중에는 눈물샘이 말랐는지 슬퍼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약물치료를 받고, 술도 못 먹고, 병원에 있으니 정신은 돌아왔습니다. 정신병원이다 보니 여러 병명의 환자들과 병실에 뒤섞여 있었습니다. 정신이 돌아왔으니 본인은 얼마나 고통이었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딸은 ?다시는 술을 입에 대지 않겠다고, 정신 차렸다며 퇴원을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이제 마지막이라고 단단히 약속을 하고 딸을 퇴원시켰습니다. 그때 마침 제가 근무하는 회사에 아르바이트 자리가 있어 딸이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집에 혼자 있으면 혹시라도 술 생각이 날까봐 제 곁에 두고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딸과 함께 출, 퇴근했습니다.   그러다 출근길에 우연히 딸 가방 안에 음료수병이 눈에 띄어 뚜껑을 열어보니 소주를 담아놓은 것이었습니다. ?무섭게 화를 내보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며 출근을 계속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 창고 안에서 만취해 쓰러져있는 딸을 발견했습니다. 술을 어딘가에 감추어놓고 마셨던 것이었습니다. 회사 동료들의 눈에 띌까 노심초사하며 죽을 힘을 다해 늘어져 있는 딸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앞이 캄캄합니다.   딸에 대한 실망감과 함께 배신감까지 더해져 나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습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엄마가 오랫동안 몸담아 근무하는 회사인데 엄마 얼굴 생각했으면 어떻게 이런 행동을 할 수가 있는지 이 일로 인하여 더욱더 딸을 원망하며 분노로 지쳐 갔습니다.   회사에서 힘들게 근무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너무나 무거웠으며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은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제는 집에 들어오기가 두려워 주차장에서 한참을 망설이다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이 현실이 너무나 싫었습니다. 이 집에 딸이 없으면, 눈에 안 보이면 숨이 트일 것 같았습니다. 악취로 가득 찬 집안, 매일 술에 만취해 있는 딸! 과거에 딸이 살아났던 힐링센터에 다시 데려다 놓았습니다. 내가 감당하기에 너무나 버거운 많은 비용이 들었지만 딸의 회복과 내 생활의 평화를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는 없다고, 이게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딸은 나름 잘 적응해 나가며 봉사를 하며 일을 열심히 해 직원으로 채용되어 정식으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유능한 센터 매니저로 원장님께 인정을 받아 귀한 원석이 여기 있다며 갈고 닦으면 훌륭한 보석이 될 거라고 신뢰하고 좋아하셔서 저도 악몽이 끝난 듯 안심이 되었습니다.   20개월가량 건강한 모습으로 잘 지내고 있던 딸이 집으로 오고 싶다고, 사회생활 잘 할 자신이 생겼다며 매일 아픈 사람들을 보는 것도 너무 힘들다며 애원하길래 정말로 이번에는 믿었습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후 몇 개월도 안 되어 또다시 장취에 들어가게 됩니다. 다시 옛날의 악몽들이 되살아납니다. 집안은 다시 악취로 서서히 물들어 가고 어두움의 그늘에 갇히게 됩니다. 달래도 보고, 협박도 해보았지만 아무 소용없습니다.   힐링센터에서 근무하며 받은 급여가 통장 안에 있으니 술 먹을 돈도 충분하여 음주 사실을 들킨 후에도 이 정도는 문제없다며 기고만장하게 굽니다. 나한테 트집을 잡더니 다툼 후에 집을 나가 모텔을 잡아 장취에 들어갑니다. 경찰에 실종신고를 해서 3일 만에 위치추적을 해서 찾으니 집 근처 모텔에 숙박비를 한꺼번에 지급하고 아가씨가 겁도 없이 혼자 모텔에 있다는 사실에도 놀랄 일인데 술에 완전히 절어 있었습니다. ?집으로 데려오려니 집에 안 오겠다고 막무가내입니다. 어디 있는지 알았으니 그나마 안도가 되어 혼자 터덜터덜 답답한 마음 가득한 채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일주일을 모텔에서 장취하다가 내가 애원하고 또 애원해 집으로 오라고 해 겨우 왔는데 소주 대병짜리를 사와서 나보는 앞에서 벌컥벌컥 마셔대는데 ‘이제는 엄마도 안 보이나봐! 최소한 엄마라고 생각하면 이건 아니잖아! 어떻게 이런 짓을 해!’   식음을 전폐하고 오로지 술만 먹는 딸을 바라보며 이대로 가다가는 한 달도 못 넘길 것 같았습니다. 그래 이렇게 사람답지 않게 살 바에는 얼른 죽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도 서서히 자제력을 잃고 엄마의 모습을 지우고 분노로 가득한 악마로 변해가기 시작합니다.“나도 이제 너의 엄마이길 사표 낸다. 지금 이 순간부터 너를 완전히 포기한다. ?너는 사람 새끼가 아니라 괴물이다. ?네 아빠 술주정에 치를 떨었는데 네 아빠보다 더 나쁜 게 너라는 못된 년이다. ?정신이 썩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방의 구석구석 숨겨놓은 술병을 찾으니 플라스틱 대병으로 된 소주와 맥주가 여기저기서 나왔는데 그걸 딸의 머리에 차례차례 들이부었습니다. 콸! 콸! 콸! 술은 딸애의 온 몸을 적시고 있었고 딸은 그걸 다 맞고 가만히 앉아있었습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대야에 물을 가득 담아 여러 차례에 걸쳐 딸을 향해 들이부어 버렸습니다. ?방안은 오물과 함께 쏟아부은 술과 물로 인하여 질퍽질퍽해졌습니다. 딸이 악에 받쳐 소리 지르며 울기 시작합니다.“살고 싶은 생각 하나도 없으니 차라리 나를 죽여!!! 제발 죽이라구...” 그 말을 듣고 술병이 손에 잡히는 순간 사정없이 딸을 때리고 발로 차고 정신을 놓아버렸고 이성적으로 판단하기에는 도를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뉴스에서나 나오는 그런 끔찍한 상황이 지금 나에게 일어나고 있고, 지금 이 순간 자리를 피하지 않으면 극한 상황의 일이 벌어질 것은 뻔한 일이었습니다. 방안을 나와 손끝 하나 못 움직일 정도로 지쳐 쓰러지듯 누웠습니다.   ‘젖은 이불과 방안을 치우고 이불도 갈아주어야 하는데, 몸도 목욕시키고 옷도 갈아입혀야 하는데, 이 세상에 의지할 곳이라고는 화만 내는 엄마뿐인데, 엄마라서 엄마 곁으로 왔는데, 갈 데도 없는데, 당장 나가라고 했으니, 불쌍하고 가련한 내 새끼!’   마음이 찌릿찌릿하니 아파옵니다. 그날 밤 마른 잠자리에 누운 나는 한잠도 못 자고 지새웠습니다. 그러면서도 괘씸하고 분한 마음이 더 컸기에 다음날 밝을 때까지 딸의 방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날이 밝아 심호흡을 크게 하고, 마음을 다잡아 딸에게 갑니다. 역시나 안으로 잠긴 방문 고리를 강제로 재껴 열어보니 차마 두 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방 안은 어제 쏟아 부은 술과 물로 인해 바닥은 질퍽하니 오물과 함께 젖어있는 이불 위에 잔뜩 웅크리고 만취해 잠들어 있는 딸의 처참한 모습이 보입니다. 딸에게 다가가 손을 대보니 온몸이 얼음장처럼 차갑습니다. 가슴이 찢어진다는 표현도 부족하리만큼 또 찌릿찌릿하니 고통을 느낍니다. 본인도 이런 자신이 힘들겠지만, 바라보는 엄마의 심정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파옵니다. 딸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몸이 굳어 일어나는 것도 힘들어합니다. 내 손으로 몸을 잡아주어 젖은 이불을 걷어내고 한쪽으로 앉게 한 뒤 딸의 두 손을 잡고 애원하다 보니 눈물이 앞을 가리고 딸도 울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그러는지 이유나 좀 알자. ?엄마가 술을 안 먹어도 술 먹는 사람을 이해못하고 그렇지는 않아. 말을 좀 해봐라.”고개를 푹 숙이고 있더니 고개를 아예 벽으로 돌려 버립니다. 다시 말했습니다.“너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엄마한테 말해봐. 무조건 도와줄게...”딸은 그 말에 고개를 돌려 내 두 눈을 빤히 쳐다보기만 하였습니다. 눈이 마주쳐 한참이나 정지된 상태였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재차 묻고 또 묻고 역시나 대답이 없습니다. 딸의 눈빛에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엄마를 무시하는 느낌이 들어 또 언성이 높아집니다. 딸이 제일 싫어하는 큰 목소리로 악을 쓰듯 말하고 있습니다. 좋게 얘기하려 했는데...“너는 엄마 말이 그렇게 우습니? 엄마를 완전 흑싸리 껍데기로 생각하고 있으니 개무시하고 이런 행동들을 하는 것 아니냐!!”또 스멀스멀 분노가 치솟습니다. 울고 있던 딸애는 소리를 지릅니다. “아무리 얘기해도 엄마는 알 수도 없고 이해를 절대 못해요!! 그래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구요!!!” 딸의 대답이 이해가 안 되어서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얼른 옷부터 갈아입히고 대충 치워놓고 출근할 생각에 딸의 옷을 벗기다 딸의 몸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딸의 온몸을 구렁이가 감아놓은 것 같이 시퍼렇게 피멍이 들고 부어 있었습니다.‘내 새끼한테 내가 무슨 짓을 한거야.. ’내가 먼저 숨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딸에게 말했습니다.“정말 미안하다... 엄마를 용서하지마라..” 험한 어떤 상황에서도 폭력은 안 되는데 귀한 내 딸한테 이런 짓을 저지른 나는 너무나도 괴로웠습니다.‘ 아! 이건 아닌데... 이건 사람으로서 도저히 할 수가 없는 짓이야! 어쩌나! 어찌해야 하지?’ 내 앞에 놓여있는 현실은 너무나도 기막힌 막막한 어둠뿐입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 보니 딸이 보이지 않습니다. 휴대폰 신호는 가는데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온전치 못한 몸으로 길거리 다니다가 나쁜 사람 만나면 험한 꼴 당할 텐데 어찌해야 하나!’또 애간장이 새까맣게 타들어 갑니다.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고 불안한 생각에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전화를 계속 걸어봅니다. 술에 잔뜩 취한 채 잠들었는지 잠결에 제정신도 아닌 채 전화를 받습니다. 술에 취해 발음도 정확하지 않아서 천천히 여러 차례 물어보아야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어딘지 모르겠어요..”“숙소를 잡아 있는 거면 방안이나 목욕탕에 수건 있을거야. 글씨 읽어봐.”“XXX 모텔 XXX-XXXX ” 어눌하게 딸이 말합니다. 그곳으로 달려가면서 그나마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습니다.   하루하루 편안할 날 없이 근심으로 나날을 보내는 중에 나의 절친한 친구가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딸이 알코올 중독인 걸 알고 다사랑중앙병원이란 알코올 전문병원이 있는데 치료받아보는 게 어떻겠냐며 말을 꺼냈습니다. 친구 남편이 알코올 중독이 심해 다사랑중앙병원에서 알코올 치료 프로그램을 따라 교육받고 퇴원했는데 일 년이 넘어도 재발하지 않고 직장 생활도 성실하게 잘 하고 있다며 적극 추천해 주었습니다.‘방안에서 저렇게 죽어 가면 살아있는 나는 마음이 아파 살 수가 없겠지, 어떻게 키운 내 새끼인데 포기를 할 수가 있어. 내 마음에 한이라도 없게 병원 치료를 다시 시작해 보자.’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노후에 쓰려고 준비해놨던 종신보험을 해약하고 병원 치료비로 쓰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동안 여러 해를 넘기며 치료하는데 많은 비용을 감당하느라 가정경제 여건이 어려워져 있었습니다.‘혹시나 이렇게 살다가 내가 나쁜 병에 걸리면 난, 그냥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떠나면 되는거야! 어떤 미련도 갖지 말자.’

다사랑 2021-02-09

[2019 알코올 중독 가족수기] 쓰디쓴 인내의 시간 끝에 찾아온 평온함

[2019 가족수기 공모전 우수상]   쓰디쓴 인내의 시간 끝에 찾아온 평온함   김○○   취하시고 술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고 술을 드시고 토를 하시고 속이 아프셔서 몸을 계속 흔드심에도 떨리는 손으로 술을 찾으시고 여의치 않으실 때는 가게에 기어서라도 가셔서 술을 사오는 것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제 머릿속에는 술은 한 사람의 인생을 파탄시키는 것, 술은 가정을 파탄시키는 주범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술에 취해 부리시는 행패로 인해서 여러 번 집을 나가셨고 술로 인해 가정이 여러 번 파탄이 났으며 우리 형제?자매들은 어머니를 설득하여 집으로 오시라 간곡히 이야기를 드려 집으로 돌아오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께서 술을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식사를 하실 때면 늘 소주와 소주잔이 있었고 술을 드셔야 식사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알코올 의존증의 증상이었습니다. 그동안 술로 허비한 돈과 시간, 병원비, 인생을 허무하게 보셨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알코올 의존증이 될 수밖에 없는 환경적 요인(유년 시절 아버지의 음주 후 폭행, 부모의 이혼 등) 또한 받아들여졌습니다. 대?소변 조절 능력이 없고 고통이 극심하실 때에야 비로소 동네병원이나 대학병원 응급실을 찾았을 때 의사나 간호사 그리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알코올 의존증 환자를 무시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고 치료하고 싶지 않은 환자라는 생각을 보호자에게 은근히 압박하였습니다. 그리고 보호자인 저를 바라보는 눈빛은 경멸하는 듯 보였고, 불쌍하다 등의 눈빛을 보내 저는 병원에 가면 의도적으로 사람들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그 눈빛으로 제 마음이 상하면 아버지를 보호하고 안내해 드리는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었습니다.   2016년 1월 아버지는 지인의 소개로 두부?콩나물 사업을 시작하셨습니다. 일을 해 집안에 보탬이 되시고자 선택하신 두부?콩나물 사업은 새벽 1시에 시작하는 일로 아버지의 연세와 체력에 맞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젊은 사람이 하기에도 버거운 일을 70세의 아버지께서 혼자 운전을 하시면서 새벽과 아침까지 두부?콩나물 배달을 하셔야 하다는 것에 제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뒤늦게 알고 보니 술에 취에 술의 기운을 얻어 일을 하셨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두부?콩나물 사업이 뜻대로 되지 않고 낮과 밤이 바뀐 채 일을 하고 수면을 취하지 못하시고, 일을 하심에도 손해를 보는 것을 인지하시며 극도로 예민해지셨고 화를 많이 내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일을 마치시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집에 오시면 가족들은 아버지의 비위에 맞춰 행동해야 했습니다. 두부?콩나물 사업을 하는 곳은 집에서 자동차로 1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곳으로 환경이 낙후되어 있고 일을 마치시고 편히 누워계실 수 있는 곳이 안 되는 곳이었습니다. 가족들은 두부?콩나물 사업을 그만 하시라고 매번 이야기 드렸지만 투자한 돈이 아까워서 그렇게 못하시겠다고 하시며 강하게 뿌리치셨습니다.   그곳에서 혼자 숙식을 해결하시며 5개월 정도 일을 하며 지내셨습니다. 두부?콩나물 사업을 하시기 전에 6개월간 단주를 하셨습니다. 50년 만에 비교적 긴 단주 기간이었지만 두부?콩나물 사업을 하시면서 늘어나는 빚과 막대한 손실로 인하여 다시 술을 드시기 시작하였습니다. 혼자 계신 곳에서 식사도 하지 않고 술만 드셨던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술에 대해 제지를 하는 사람들이 없기에 10여분 거리에 있는 가게에서 술을 사와서 밥 대신 술로 배를 채우셨습니다. 술이 없으면 안 될 정도로 술의 노예가 되어 있었습니다.   가족들은 노심초사 하며 하루 하루 살얼음을 걷는 것만 같았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응급실에 계시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아버지의 두부?콩나물 사업을 하는 곳의 동네에 사시는 분이 아버지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구급차를 통해 대학병원 응급실로 갈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 당시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두부?콩나물 사업을 그만하실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아버지 더이상 술로 고통받지 않도록 해 주세요’라며 아버지께서 술로 인하여 비참하게 사실 수밖에 없는지 삶이 한탄스럽고 원망스러웠습니다.   결국 두부?콩나물 사업을 청산하시고 집으로 오셨고 사업 실패에 대한 상실감과 그동안의 피폐해지고 황폐해진 몸으로 하루하루 좌절의 나날을 보내셨습니다. 가족과 이제는 술을 드시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약속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셨는지 방 안의 불을 끄고 늘 누워계셨고 매일 수면제에 취해 계셨습니다. 햇빛 보는 것이 싫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이 우울하게 보였습니다. 늘 어둠 속에 누워계시는 동안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지, 술을 한 모금만 마셨더라면 소원이었을 정도로 술에 의존되어 있는데 하루하루의 삶은 아버지께 가혹했을 것입니다. 2개월 단주 후 다시 술을 드시고 병원에 가시고 다시 1개월 단주하시고 병원에 가시고를 반복하신 후 알코올 전문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알코올 전문병원에 입원하신 것은 제가 고등학생 때로 기억됩니다. 아버지께서는 알코올 전문병원을 극도로 싫어하셨습니다. 환자에게 자유가 전혀 없고 격리되어 있고 수면제 등으로 환자를 조종하는 것에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알코올 전문병원에 가시기 전날 아버지의 속옷과 세면도구를 챙기면서 마음에 큰 슬픔이 찾아왔습니다. ‘가셔서 얼마나 대우를 못 받으실까?’,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아버지께 얼마나 많은 약을 사용할까’, ‘금단증상으로 얼마나 힘들어하실까?’ 이런 마음을 안고 알코올 전문병원에 입원할 때 건장한 남자들이 양쪽에서 아버지를 데려가는 모습을 보며 도살장에 끌려가시는 것만 같아 마음속으로 많이 울었습니다.   입원 후 정신이 또렷해지면 집으로 전화를 걸어 어머니께 절대 술을 먹지 않겠으니 퇴원하게 해달라 이야기 하시면 어머니는 더 입원을 하셔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 대답을 드리면 협박을 하시고 전화를 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결국 2주 만에 퇴원을 하셨고 다시 어둠의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알코올 전문병원의 짧은 입원 기간 후에 다시 술에 취해 방안에는 구토로 인한 냄새와 여기저기 널브러진 술병들, 흐리멍덩한 눈빛과 어눌한 말투, 딸국질, 앞뒤가 맞지 않는 말들, 혼잣말, 욕설, 속이 아파 몸을 흔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은 가족에게도 가혹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의 숨소리가 이상하게 들렸고, 숨을 너무 힘들게 쉬고 있었습니다. 걱정이 되어 동네 종합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보니 이상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진찰 후 집에서 숨 쉬는 것이 더욱 힘들어져 의사의 오진임을 가족들은 인지를 하고 고려대구로병원 응급실을 향했습니다. 알코올로 인하여 심장에 무리가 가서 숨 쉬는 것이 힘들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동네 종합병원 의사의 말만 믿고 아버지를 방치했다면 생각만으로도 아찔했습니다. 구로에 있는 대학병원에서 인공심장박동기를 장착하시는 수술을 하고 집으로 오셔서 정말 술을 끊겠노라 큰 결심을 하셨을 것입니다. 수술 후 병원에서도 절대 술과 담배를 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50년 정도 드신 술을 결심만으로 끊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수술 후 며칠이 지나 술병을 숨기고 가족 몰래 술을 드셨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탄로가 난 후에는 숨어서 드시는 것이 아니라 큰소리를 치며 술 드시는 것을 합리화하며 술을 드실 이유를 찾으셨습니다. 가족들은 하루하루가 불안과 초조에 시달렸습니다.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아버지께서 숨을 잘 쉬고 있는지 봅니다. 그럼에도 숨을 쉬고 계시면 안도를 하며 감사했습니다. 아버지는 통제 불능 상태, 몸이 고통으로 참을 수 없을 때가 되어야 병원을 찾아갑니다. 알코올이 조금 들어간 상황에 병원을 가면 모시고 가는 길이 다소 용이하고 치료도 빠를 텐데 이런 경우에는 절대 병원을 가지 않으십니다. 술로 인해 통제 불능이 될 때 가족들의 도움으로 응급차에 실려 끌려가듯 병원을 가십니다.   아버지도 가족도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의왕시에 있는 다사랑중앙병원을 알게 되었습니다. 알코올 전문병원으로 한방과 양방으로 치료한다는 광고가 눈에 크게 띄었습니다. 대외적인 긍정적인 평판도 병원을 선택하는데 큰 몫을 차지하였습니다. 알코올 의존증으로 수많은 개인병원, 종합병원, 대학병원, 알코올 전문병원 입원 경험이 있기에 다사랑중앙병원도 그 중의 하나라 생각했습니다.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할 당시 어려운 점이 많았습니다. 가장 큰 것은 아버지께서 심장박동기 장착을 하고 있고 걸음도 못 걸어 통제가 안 되는 위험한 환자라 판단한 것 같습니다. 가족들은 필사적으로 입원을 해야 한다고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수많은 일반병원, 종합병원, 대학병원, 알코올 전문병원을 다녀보았고, 이곳에서 거절이 된다면 알코올 의존증으로 평생 사실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힘들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어떻게든 입원을 해서 치료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간병인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알코올 의존증 환자의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아버지 또한 알코올 전문병원에 입원하시는 것을 못마땅해 하시고 가족들에게 험한 이야기와 원망을 쏟아 내셨습니다. 입원 후 정신이 또렷해지면 퇴원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이 애처롭지만 병원에서의 구체적 치료 없이 다시 나오게 된다면 같은 상황과 결과가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가족들은 무엇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 가족들은 강한 마음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되돌아보니 가족들에게 힘이 된 것은 매주 토요일에 있는 가족 교육이었습니다. 가족 교육을 통하여 알코올 의존증 환자의 특성 ? 건강상의 문제 ? 정신상의 문제, 알코올 의존증 가족의 정서적인 문제, 알코올 의존증 환자에게 가족이 도울 수 있는 방법 등을 강의를 통해 알려 주었습니다. 가족 교육을 받으면서 단순히 알코올과 차단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며 알코올 의존증 환자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는 가족들의 도움과 지지가 중요함을 알았습니다. 제가 알코올 의존증에 대해서 무지했을 때는 단순히 술을 드시지 않는 것이 방법인 줄로만 알았던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동안 아버지께 도움을 드리지 못하고 술을 드시면 아버지께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던 일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아버지는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 하신 후 일주일 동안은 많이 힘드셨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입원을 하셔서 간병인의 도움을 받으셨는데 간병인의 비용도 높았지만 다시 격리되는 병원에서 지내야 한다는 사실이 한탄스러우셨을 것입니다. 제가 병원에서 가족 교육을 받았다고 이야기 드리니 아버지께서는 부정적인 인식으로 이야기하셨지만 가족들은 조금씩 다사랑 중앙병원의 회복프로그램에 신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매주 토요일 가족 교육이 있는 날에 여러 명의 상담사님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상담사님들의 모습은 병원의 일을 사무적으로 처리하는 모습보다는 마음이 닿을 수 있게, 진심이 통하도록 가족들을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는 다른 병원에서는 볼 수 없는 다사랑중앙병원만의 특화된 장점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환자나 환자 가족들은 긴 알코올 의존으로 인해 마음이 무너져 있습니다. 알코올 의존이라는 고통의 끈을 끊고 싶지만 의지적으로 결심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황폐해진 환자나 가족들에게 상담사님과의 대화는 희망의 촛불과도 같았습니다.   아버지의 입원 기간이 이 주일, 삼 주일을 지나면서 아버지께서도 마음의 평온을 찾으셨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의 평온은 상담사님과의 대화 시간과 정기적으로 이루어지는 알코올 의존에 대한 바른 교육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처음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했을 때 가족들의 마음과 다사랑중앙병원에서 퇴원했을 때의 마음이 달라져 있음을 느꼈습니다. 이는 병원이 환자에 대한 마음을 상업성보다는 환자 한 분 한 분을 귀중히 여기며 시간이 더디 가더라도 환자들이 알코올 의존증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가족 교육 때 퇴원 후에 꼭 해야 할 것이 있는데 아버지께서 A.A.(익명의 알코올 중독자들) 단주모임에 참석하는 것이었습니다. 10년 전에 A.A. 단주모임을 이야기 드렸을 때는 화를 내시며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셨는데 다사랑중앙병원 퇴원 후 다시 A.A. 단주모임 이야기를 드렸을 때는 예전과 같은 부정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퇴원을 하신 후 이틀이 지난 후 토요일에 명동성당에서 A.A. 단주모임이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고 처음 단주모임에 참석하시는 것이므로 저와 언니, 여동생이 아버지와 함께 명동성당(범우관)의 단주모임에 참석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각자 알코올 의존에 대한 경험을 공유하였습니다. 세상에서 아버지 혼자 알코올 의존증인 것만 같아 위축되고 숨기고 싶었는데 이곳의 사람들도 아버지와 같은 경험과 고통이 있었다는 것에 위로가 되었고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되었습니다. 처음 모임에 참석하시는 아버지는 어리둥절하셨지만 싫지는 않아 보였습니다.   저는 인터넷으로 서울지역의 A.A. 단주 모임을 검색해 보았습니다. 장소와 시간을 고려하여 토요일 신림동 성당에서 이루어지는 A.A. 단주 모임에 참석하려 했습니다. A.A. 단주모임은 퇴원 후 바로 참석하는 것을 권유 드립니다. 퇴원 후 단주모임 없이 외롭게 단주를 하게 되면 연결의 끈이 없어 다시 무너질 수 있을 것입니다. 토요일 신림동 성당에서 하는 단주모임에 처음 참석하는 것이라 아버지와 제가 함께 참석하였고 양해를 구해 1시간 동안 모임에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곳은 다사랑중앙병원의 상담사님께서 모임을 주도하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단주모임에 참석하는 분들 중 다사랑중앙병원에서 입원 경험이 있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많은 단주모임 중에서 이곳에 올 수 있게 도와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아버지 또한 다사랑중앙병원의 입원 경험이 있는 분들과 의사소통이 잘 이루어짐에 안도하셨습니다.   토요일 단주모임을 매개로 하여 매주 수요일(60대 이상 노인 환자) 다사랑중앙병원에서 하는 단주모임에도 참석하시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A.A. 단주모임에 참석하시고 금주하신지 2년 5개월 정도 되셨습니다. 요즘은 화요일에 다사랑중앙병원 환우분들을 위해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10년 전 A.A. 단주모임에 대해 이야기 드릴 때 “술은 혼자 끊는 것이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말아라.”하며 모임을 거부하시고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시던 아버지께서 환우분들을 위해 메시지를 전하신다고 생각하니 예측할 수 없는 길로 인도해 주시는 큰 힘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지난날 아버지는 술이 있어야 살 수 있었지만 지금은 A.A.모임이 있어야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환우분들에게 희망과 용기가 되고자 아버지의 경험을 솔직히 공개하시고 단주는 몇몇 특정한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끊겠다는 열망만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위해 글을 다듬으시고 연습을 하십니다. 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제가 어떤 일을 하게 될 때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원동력을 얻었고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열정적으로 하리라 다짐했습니다.   단주하신지 2년 5개월 정도 되시는데 토요일 단주모임에서 사회자가 되셨습니다. 모임을 이끌어가는 책임감이 있으시지만 이 자리를 계기로 더욱 단주에 정진하시리라 생각됩니다. 토요일 단주 모임 때 어느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단주는 죽으면 끝나는 것이다.” 아버지의 알코올 의존증을 지켜보면서 이 이야기가 진리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아버지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알코올 의존증은 자신의 목숨과 바꿀 정도로 처절하게 싸워야 끊을 수 있는 병이다.” 이 말씀 속에 이 병이 얼마나 무섭고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 중병으로, 알코올 의존증의 폐해를 깊이 인지하고 있다면 사람들은 술을 멀리할 것입니다.   알코올 의존증 환자에게 중요한 것은 술을 끊는 의지도 필요하지만 주변의 지지 또한 중요하다고 봅니다. 알코올 의존증 치료는 결코 혼자 할 수 없습니다. 가족들의 사랑과 지지, 응원이 필요합니다. 그동안 아버지께 단순히 술을 드시지 마시라 이야기한 것이 공허한 울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알코올 의존증의 외로운 길에서 환자 혼자만의 몫으로 생각하기에는 그 병이 매우 심각합니다. 알코올 의존증 환자에게 필요한 것 세 가지를 꼽자면 첫째, 환자의 내면까지 치료하는 좋은 병원을 만나는 것이고, 둘째, 환자는 꾸준한 A.A. 단주모임으로 동병상련을 하는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변화를 받아 술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가족들의 사랑과 응원이 필요합니다.   마지막까지 술과 싸워야 하는 시간들을 마주하고 있지만 하루하루 단주하심에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단주로 인하여 저의 가족은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음주를 하실 때는 집안의 분위기가 암울하고 터널과 동굴에 있는 듯한 느낌과 원망과 비난이 난무하였는데 지금은 작은 일에서도 기쁨을 찾고 서로 사랑하며 이해하며 보듬어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틈나는 대로 알코올 관련 책을 읽으시고, 다른 분들의 수기 읽고 따라 적으십니다. 그리고 그동안 아버지의 알코올 의존에 대한 과정과 고통스런 시간들도 기록하십니다. 수기를 따라 적으시면서, 아버지의 경험을 기록하시면서 다시 단주에 대한 마음을 잡으십니다. 아버지는 종종 이야기하십니다 “오늘 5분 참았네, 오늘 10분 참았네.” 인내의 시간은 쓰지만 쓰디쓴 인내의 시간만큼 평온함으로 보상되어지는 아버지를 뵈면 오늘도 감사합니다.  

다사랑 2021-02-09

[2019 알코올 중독 가족수기] 더디지만 시작된 회복

[2019 가족수기 공모전 장려상]   더디지만 시작된 회복   이○○   이 글을 쓰는 것은 절망적인 분들에게 희망이 되길 바라며 저의 지나간 시간을 되돌려 봅니다. 다사랑중앙병원과 인연이 된 지 1년이 되어갑니다. 작년 4월에 입원했고, 2019년 3월 19일 화요일에 가족모임과 병원 교육을 마치고 2층 개방병동에서 남편을 면회했을 때 마음과 행동이 평온해 보였습니다. 집에 돌아와 오디오를 켜고 이루마의 피아노곡을 들으며 지나간 시간을 떠올려 봅니다.   30년 전 남편과의 만남을 이렇게 기억합니다. 남편의 첫인상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 같아 보였지만 잘난 척하지 않고 착해 보였습니다. 가끔씩 술 먹는 것도 보였지만 그것이 이렇게 큰 병이 될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우리 친정집은 남자 형제가 없어서 술이 문제가 된다는 것을 모르고 살았고 술을 조금 먹는 것이 더 좋아 보였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혼 후 매일 술에 취해 있는 모습에 심각성을 깨닫고 그때서야 결혼을 후회했고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살려고 했었습니다. 그리고 남편 직업이 국가공무원인지라 공무원의 아내로서 자부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술 문제만큼은 고쳐지질 않았고 술을 적게 먹게 하려고 지방에서 수도권으로 전출하기를 권유했습니다. 일을 바쁘게 하다 보면 술을 먹을 시간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생각했습니다. 술을 먹지 않으면 마음이 여리고 착해서 남에게 싫은 말도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이나 술로 실수를 수차례 저지르고 항상 무사히 들어와야 맘을 놓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가정에 충실하고 신앙으로 기도해 전념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2000년도에 남편이 단주했고 너무 신기할 정도로 변화된 삶이 지속되었고 우리 가족은 병에서 완전 치료된 줄 알고 마음을 놓았습니다. 저도 남편도 이 병에 대해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삶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살고 있던 분당 신도시 집값이 올랐고 커가는 아이들의 교육비 때문에 제가 부모님 말씀만 듣고 대출받아 지방에 사놓은 집이 이자는 오르고, 집값은 떨어지면서 늘어가는 채무를 감당하기 힘들어졌습니다. 저 역시 밖에 나가서 일을 할 수밖에 없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시어머님께서 암 투병으로 집 근처 병원에 입원하시게 되었습니다. 내성적으로 소심한 성격으로 누구와 의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너무 큰 상황으로 스트레스를 달래기 위해 술을 다시 마시는 이전으로 다시 되돌아간 것으로 기억됩니다. 저는 놀라서 수 없이 휴대폰으로 연락했지만 남편과는 통화되지 않았고 직장에서 없어져서 집에 들어오면 술 냄새가 너무 심했고 모든 일들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아는 지인으로부터 정신건강의학과를 소개받고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남편이 우울증이라고 하고 남편 직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개인 정신과 알코올병원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상황은 좋아지질 않고 심각해져 가던 중 직장에서 국장님께서 집으로 전화하셔서 집안에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국장님은 승진시험을 준비하고 있던 중에 이런 일이 일어나 안타깝다면서 가끔씩 직장 근처 편의점에서 술을 마시고 들어와 술 냄새가 난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분께 있었던 상황을 그대로 말씀드릴 수밖에 없었고 국장님께서 대책을 세워 주셨습니다. 일단 서울 공무원 임대 아파트로 이사하고 매일 퇴근 시간에 직장으로 와서 같이 집으로 같이 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습니다. 그때 남편은 직장인이라서 카드를 소지하고 있어 하루에도 술값으로 몇백만 원씩 쓰는 상태라서 혼자 두면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좋아지질 않아 1년 동안 휴직계를 내고 치료받은 후 다시 복귀하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두렵고, 팔이 후들후들 떨립니다.   그때부터 저는 집안의 가장이 될 수밖에 없었고 아이들 교육비와 병원비 때문에 돈을 움켜쥘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편을 처음 입원시킬 때는 다시 사회생활을 못할 것 같아 펑펑 울었습니다. 강제입원에 대한 원망으로 저에게 협박과 욕설을 했고, TV를 부수고 병원 직원과 싸우기도 하고, 성격이 날이 갈수록 난폭해졌고 저에 대한 원망으로 희망이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저는 강해져야 했습니다. 하지만 1년 동안 병원 치료를 해도 좋아지질 않아 병원에 입원시킨 채로 명예퇴직을 신청했습니다. 퇴직하는 날 감사패를 제가 대신 받고 돌아오면서 얼마나 울었던지요. 밖에 나오면 술을 무척 많이 먹고 죽을 것 같았습니다.   어느 개인병원 여자 원장님은 제가 불쌍해 보였던지 환자를 버리고 도망가라고 해서는 안 될 말씀을 하실 정도로 남편의 성격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과격해졌습니다. 그리고 입원과 퇴원을 수십 번도 넘게 했던 것 같습니다. 제 휴대폰에는 사설 구급차 번호가 입력, 저장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저는 담대하고 강해졌습니다. 이 짐을 제가 져야 아이들이 상처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결혼 후에 저희 남편의 형님이 술로 세상을 떠나신 것과 같이 남편은 유전적인 술 문제가 많은 가족력이 있습니다. 입원과 퇴원을 13년 동안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다사랑중앙병원에 오게 된 것은 작년 4월입니다. 남편이 퇴원 후에 외래로 병원을 다녔으나 치료되지 않아 어느 날 갈망감이 올라올 때 인터넷 검색 후에 제가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해 볼 것을 제안했습니다. 남편은 병원이라면 지긋지긋하다고 거부했습니다. 그냥 집에 두면 나가서 방황하다 조절이 안 되는 술 문제로 죽을 것 같아 고민 끝에 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마지막으로 죽더라도 다사랑중앙병원 치료를 받는다면 여한이 없을 것 같아 냉정하게 병원 치료에 모든 것을 맡기기로 했으며 상담사님과 함께 치료 계획대로 따라갔습니다.   입원 중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2년 전 지방에 사무실 개업한 것 때문에 은행 연장 건으로 외출과 지방 사업장에 내려갈 때 불안감과 스트레스를 받고 재발되어 삼일 만에 재입원한 일, 개방병동 3일 만에 소주 10병 먹고 차에 뛰어들어 경찰차에 실려 온 일, 다시 관리병동으로 입원한 일 등 놀라고 힘든 과정을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요. 저는 철저하게 병원 규칙에 따랐고 다사랑중앙병원 가족교육은 빠지질 않고 참석했습니다. 교육 내용은 환자가 모두 겪은 내용이었습니다. 작년 겨울 재활병동에서 지방 사무실에 가던 중 음주 충동이 와 남편은 결국 저희와 만나기로 한 장소에 오기 전 술에 취해 있었습니다. 지방 사무실에 어떻게 다녀왔는지 모를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다시 입원했습니다.   2019년 구정날 아들과 함께 면회했을 때 드디어 기적적인 말이 나왔습니다. 남편은 성격책과 노트, 필기도구를 갖다 달라고 했습니다. 강한 집중력으로 성경 필사 후에 변화되는 마음이 전과 분명 다른 모습입니다. 이제는 마음이 평온하다고 했고 특히 본인보다 아이들 걱정을 많이 하고 병원 치료를 더 받아보겠다고 합니다. 변화는 오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2019년 봄날 햇빛과 공기와 물, 자연이 주는 하나님의 선물같이 남편은 변화의 길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얼었고 시렸던 겨울의 땅 같았던 우리 가족에게 세상 욕심을 다 내려놓고 작은 것에 감사할 때 생각하지 않았던 축복이 온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나 자신부터 변화해야 한다는 것을, 남보다 더딘 회복이지만 그러나 변화되고 있다고 외치고 싶습니다.

다사랑 2021-02-09

[2019 알코올 중독 가족수기] 엄마가 행복하면 아들은 아무 문제가 없다

[2019 가족수기 공모전 장려상]   엄마가 행복하면 아들은 아무 문제가 없다   김○○   안녕하세요? 저는 다사랑중앙병원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해준 ***엄마입니다. 저희 아들은 이제 막 단주를 시작한, 걸음마 단계인데 이런 경험담을 쓸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지만 저의 경험담으로 인해 자식이 알코올의존증 환자인 부모님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아픈 상처를 끄집어낼 용기를 내었습니다.   저희 아들은 현재 단주생활 3년차 초년병입니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어디서부터 저의 마음을 적어나가야 할지 가슴이 먹먹함이 밀려오네요. 저희 집은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 아버지와 그저 아들의 말이라면 잔소리는 조금 하지만 다 들어주는 충실한 조력자 역할을 한 엄마인 저, 그리고 두 살 아래의 강직하면서도 마음이 여린 남동생을 둔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화목하고 평범한 가정이었습니다. 저희 시댁 가족들은 술을 아주 좋아해서 가족들이 모이는 날은 술병이 박스채 쌓이곤 합니다. 조상 대대로 술을 아주 좋아하는 집안입니다. 남편도 완전 애주가였습니다. 남편은 술은 어른한테 배워야 한다고 아들이 중학교 3학년 때 맥주를 한 잔 먹게 했습니다. 그 후에도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간혹 한두 잔씩 먹이곤 하였죠.   아들이 본격적으로 술을 먹게 된 시기는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때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면서 혼자 캔맥주를 사다 먹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우연히 아들 방 청소를 하는데 빈 캔맥주 깡통이 나오는 순간 당황했지만 크게 걱정은 안했습니다. 아들이 재수, 삼수를 할 때에도 술은 먹었지만 크게 문제는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군대 입대 하는 날도 술 먹고 늦게 들어와 군 입대도 술이 덜 깬 상태에서 간신히 들어갔습니다. 남들은 아들이 군대 간다면 마음 아파하고 슬퍼하지만 우리 가족은 아들의 옷이 도착하는 날 남아있는 가족이 서로 얼싸안고 박수를 쳤습니다. 이제는 되었다고, 군대 가서 사람 만들어 나온다고 좋아했고 잠시나마 아들한테 해방된 기분으로 저는 더없이 좋았습니다. 아들은 군 생활을 강원도 화천 GOP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천오백 계단을 오르내리며 요즘 말로 진짜 빡세게 했습니다. 아들은 둥글둥글한 성격으로 조직사회에 잘 적응하여 군 생활은 잘 하였습니다. 오죽하면 소대장님과 대원들이 말뚝 박으라고 할 정도로 충실히 잘하고 제대를 했습니다.   아들은 군 제대 후 다니던 대학이 싫다고 1년 재수를 하여 서울에 4년제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발표하는 날 저희 가족은 참 행복했습니다. 학기가 시작되어 아들 나이 26살에 20살, 21살 동생들과 공부하다 보니 처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고 수업은 잘 따라가지도 못했나 봅니다. 학교생활에 회의를 느끼던 차에 동생들하고 모임에서 사소한 싸움이 일어났고 소심한 아들은 자기가 왕따를 당했다고 생각해서인지 그때부터 학교 가는 날보다 안 가는 날이 더 많아지게 되었고 매일 매일 술독에 빠져 살았습니다.   아들은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는 게임에, 음악 듣고, 몰래 술을 사다 먹는 그런 생활을 반복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남편하고의 트러블이 잦아지게 되었고 이러다가는 부자지간이 웬수가 될 것 같아 원룸을 얻어 아들을 분리시켰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아들의 조력자 역할을 더욱더 완벽하게 했습니다. 술 먹고 쓰러져 잠자는 사이에 가서 방을 청소하고 냉장고에 먹을 것을 챙겨두고 밑반찬을 해놓고 용돈을 주고, 그렇게 집안이 시끄러운 게 싫어서, 그리고 아들이 마음잡고 학교에 나가길 바라는 마음에 하나도 아쉬운 것 없이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일주일에 3일은 학교에 가고, 3일은 술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는 생활을 하면서 결국 학교를 휴학하고 말았습니다. 그 와중에 요리를 배운다고 학원에 다닌다는 미끼로 저에게 용돈을 달라고 하는 등 갖가지 거짓말로 순간순간을 모면하려고 하곤 했습니다. 아들은 평상시에는 집에 오지 않다가 술에 취하면 집에 와서 남편과 싸우기 일쑤였고, 심지어는 아빠에게 욕을 하고 기물도 파손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아빠가 한 대라도 때리면 가정폭력이라고 지구대에 신고도 여러 번 했습니다. 저는 그런 남편과 아들 사이에서 너무나 힘들었지만 나이를 먹으면 좀 나아지겠지, 술 먹고 하는 주사려니하고 생각했습니다.   이밖에도 수많은 사건, 사고가 많았고 몇 년 동안 술만 먹으면 가게로, 집으로 와서 돈을 안주면 협박하고 힘들게 해도 시간이 가면 나아지겠거니 하고 아들이 술을 덜 먹게 하기 위해서 안 해본 짓이 없이 다 해보았습니다. 하도 아들이 술 먹고 가게 와서 저를 힘들게 하니 거래처 분께서 알코올병원에서 입원시키라는 말을 했는데, 이런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힘들어하면서도 조력자 역할을 참으로 잘했습니다. 그런 시간 속에 작은 아들도 형이 술 먹고 집에 오는 것을 싫어하고, 전화도 받지 않고, 작은 아들도 형을 병원에 입원시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말에도 어떻게 젊디젊은 놈을 입원시켜야 하냐면서 참고, 또 참으면서 하루하루 생활하던 중 아들을 병원에 입원시키게 된 결정적 계기는 아들이 저에게 폭력을 행사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들한테 한 대 맞는 순간, 별이 번쩍하며 치욕감과 모멸감을 참을 수가 없어 그 이튿날 바로 병원을 알아봤습니다. 술에 취한 아들을 사설 119를 불러 집에서 가까운 병원에 입원시키고 돌아오는데 참으로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습니다. 아들 원룸에 가서 방 청소를 하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뭐가 부족해서 아들이 저렇게 되었는지 신도 원망하고 조상도 원망하며 엉엉 울었습니다. 병원에 입원시킨 원장님을 통해 아들이 주사가 아니라 알코올의존증 환자라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아들의 주사가 나이가 들면 나아지겠지하는 마음으로 살았는데...   아들은 엄마가 아들을 병원에 입원시킨다고 저에 대한 분노가 많았기에 면회는 주로 남편이 했습니다. 한 달이 지났을 무렵 학교 문제도 있고 하여 다시는 술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을 받고 퇴원을 시켰습니다. 퇴원하는 날, 아들은 집으로 가자고 하니 싫다고 하면서 원룸으로 들어가는 길에 아빠 몰래 캔맥주 3개를 사달라고 하면서 다시는 술 먹고 문제 일으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 말에 저는 아들의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병원에서 퇴원하고 한동안 아들은 학교도 복학해서 잘 다니고 술은 먹지만 큰 말썽 없이 잘 지냈습니다. 그러다가도 술만 먹으면 아들은 자기를 왜 병원에 입원시켰냐고 따지면서 저를 힘들게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이 입원한 병원 시스템이 알코올중독자만 따로 입원한 게 아니라 장애인, 정신질환자랑 같이 생활하기 때문에 밤에 소리를 지르고 해서 잠도 못 자고 복용하게 하는 약도 수면제 위주로 주다 보니 병원을 퇴원하고 한동안 악몽에 시달리곤 했다고 합니다. 그 말에 아들이 아무리 힘들게 해도 다시는 병원에 보내지 않는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그러던 중 저희 가정에 불행이 닥쳤습니다. 평소에 술을 즐겨 하던 남편은 옆구리가 결려서 진찰을 해보니 식도암 1기였습니다. 남편은 늦깍이 공부를 시작한 만학도였습니다. 남편이 병원에서 수술하고 40일 동안 생사를 넘나들 때에도 작은 아들과 둘이서만 아픔을 같이 했지, 아들한테는 병원에 와서 술 먹고 소란 피운다고 알리지 않고 아들 뒤치다꺼리에, 남편 병 간호에 많이 힘들었습니다. 45일 만에 퇴원해서 집에 온 남편에게 아들이 술 먹고 집에 와서 하는 말이 병들었으면 죽지 왜 안 죽었느냐고 하면서 저희 가족을 너무나 힘들게 하고, 또 평소에 엄마 힘들까봐 불평 한마디 없던 동생을 너무 힘들게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병원에 입원시키지 않는다고 약속한지 1년 만에 남편은 반대했지만 병원에 다시 입원시키기로 마음먹고 알코올전문병원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던 중 보건복지부에서 인정한 다사랑중앙병원을 소개받고 만취가 된 아들을 입원시키게 되었습니다.   입원하는 날 병실로 가는 길에 아들은 저에게 폭언을 하면서 들어가더라구요. 아들을 입원시키고 돌아오는 택시에서 부끄러운 것도 없이 참 많이 울고, 집에 와서도 남편하고 부둥켜안고 많이 울었습니다. 남편이 울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든 아들을 사람 만들어 놓겠다고..   다사랑중앙병원은 시스템이 참 잘 되어있었습니다. 상담사님들이 환자의 아픈 마음까지도 다 보듬어주시고 담당 원장님께서 케어해 주시고, 아들이 병원에 입원해서 얼마 동안은 힘들게 했지만 상담사님과 원장님, 환우들 덕분에 서서히 적응을 해 나갔습니다. 관리병동에서 개방병동으로 내려와서 생활하면서 집에 오면 남편은 아들이 먹는 것에 특히 신경을 써주고 병원에 갈 때면 남편도 수술한 지 얼마 안 된 환자였지만 아들을 혼자 가게 하지 않고 꼭 병원에 데려다주었습니다. 병원을 가는 1시간 동안 아들은 아빠하고 27년 동안 못다한 대화를 참으로 많이 했다고, 지금도 가끔 이야기하곤 합니다.   다사랑중앙병원의 가족교육을 받으면서 이무형 원장님의 알코올의존증에 대해서 강의하시는 내용을 듣고 그동안 아들이 우리 부부에게 한 행동이 아들의 의지대로 한 행동이 아니고 무의식 상태에서 한 행동이라고 교육받고 나니 아들을 좀 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유전적 요인이 80%나 된다는 강의를 듣고 아들이 한없이 안쓰럽고 불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편도 권위주의 아빠에서 아들을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저보다 더 아들을 사랑했습니다. 아들은 재활병동에서의 생활도 열심히 하고 8개월 만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원룸을 정리하고 집에서 살기로 결정을 하고 하루하루 생활하는데 아들이 생각보다 적응을 잘 한 것 같았습니다. 우리 부부는 가족의 울타리가 얼마나 따뜻하고 소중한지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였습니다.   퇴원한 지 일주일이 지나 아들이 면허취득을 하러 면허시험장에 갔습니다. 면허취득을 위해 비고란을 읽던 중 알코올로 병원에 입원한 환자는 상담 후 운전면허 취득이 가능하다는 문구를 읽고 아들이 생각하기에 나는 그동안 열심히 병원 생활도 잘하고 최선을 다했는데 사회에서는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불안증세가 일어나 면허시험도 보지 않고 버스를 타고 집에 오던 중 평소에 다니던 미아삼거리 술집에서 소주 두 병을 시켜 먹고 있으면서 저한테 전화를 했습니다. 전화로 엄마 나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서 술 먹고 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은 터질 것 같았고 온몸에 맥이 쫙 빠졌습니다. 전화로 설득해도 소용없고 애원해도 소용없었습니다. 남편이 술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술을 두 병 이상 먹은 상태였고 아들의 감정을 추스릴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참 허무했습니다. 아들이 8개월 동안 병원에 입원해있을 동안 우리 가족들은 아들을 위해서 각자의 생활도 다 져버린 채 가족교육을 열심히 듣고 알아넌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남편은 회복도 덜 된 몸으로 아들이 원하면 뭐든 다 오케이였는데.. 아들의 재발에 배신감과 실망감은 이루 말 할 수 없었으며 우리 가족은 서로 내색은 안했지만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캔맥주 한 캔만으로 시작해서 조금씩 술을 먹기 시작하더니 성실하고 예의 바르고 착한 아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입원하기 전 모습으로 돌아가 그 전 생활을 서서히 시작했습니다. 또다시 남편과는 큰 소리가 나고 집안을 공포 분위기로 만들기 일쑤였고 작은 아들이 너무 힘들어하기에 다시 병원에 입원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사랑에 두 번째 입원시켰을 때는 학교 문제로 병원에서 반대했지만 아들한테 각서까지 쓰고 한 달 만에 퇴원을 시켰습니다. 퇴원 후 각서까지 쓴 약속은 온데간데없고 학교생활은 하는 둥 마는 둥하고 지냈습니다.   그러던 중 남편이 만학도의 꿈을 안고 대학교에 입학하여 2학기를 시작할 무렵 식도암이 재발하였고 손 쓸 틈도 없이 2017년 2월에 급성폐렴으로 저희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장례 기간 동안 아들은 그래도 술을 먹지 않고 장남의 역할을 하고 장례식을 마치고 집에 와서 도저히 안 되겠다고 술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은 항상 ‘엄마 나 캔맥주 딱 한 캔만 먹을게’로 시작해서 만취 상태가 되었고 갑작스런 남편의 죽음으로 너무나 힘든 저와 작은 아들을 두 배, 세 배 무던히도 힘들게 했습니다.   아들은 술 때문에 남편의 삼우제에도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아빠의 죽음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이전 생활을 반복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는 친구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택시기사님과 시비가 붙어 경찰서까지 가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박미희 상담사님께 전화를 걸어 입원시켜달라고, 아들을 치료해 줄 병원은 다사랑중앙병원밖에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제 생각으로 아들은 이무형 원장님을 존경하고 원장님 말씀을 가장 잘 들었습니다. 자기 주장이 강하여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놈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세 번째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해 관리병동에 있을 때는 아들을 면회하지 않았습니다. 아빠의 죽음으로도 정신을 못 차린 아들이 너무나 미웠고 작은 아들과 저도 이미 알코올 가족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아들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도 낯선 번호만 떠도, 경찰차만 봐도, 택시만 봐도, 간이 오그라들고 심장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개방병동에 내려가기 전, 발표하는 날 작은 아들과 처음으로 얼굴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입원했을 때 발표 내용보다 더 진실로 느껴졌고 아들 자신이 알코올에 무력했으며 알코올의존증 환자임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동안 가족을 힘들게 한 것도 진심으로 사과할 줄 알고 변해 있는 아들의 모습에 반갑기보다는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아들은 개방까지 마치고 퇴원을 해서 단주생활을 시작하면서 외래치료를 받으며 A.A.모임에 열심히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A.A.모임만이 아들이 살 길이라고 스스로 인정하고 생활하던 중 작은 아들이 술을 먹고 들어오는 날은 술 냄새에 아주 민감했고 예민하게 받아들여 두 아들 모두 다 힘들어하고 서로가 불편해했습니다. 결국 형이 술 문제로 힘들게 할 때나 남편의 죽음으로 의지할 곳 없는 저에게 큰 힘이 되고 의지가 되던 작은 아들을 원룸을 얻어 분리를 시켰습니다.   저는 외롭고 허전해서 힘들었지만 두 아들은 한결 마음이 편해 보였습니다. 아들은 주위 환경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단주생활을 하며 학교에 복학하여 32살 나이에 2018년, 1년 동안 학교생활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1년 동안 단주생활을 잘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까지 마친 아들을 꼭 안아주며 많이 칭찬해 주었습니다. 아들은 현재도 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거의 일주일 내내 A.A.모임에 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아들이 다사랑중앙병원에 처음 입원할 때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가족교육에 꼭 참석하여 그동안 알코올의존증에 대해 몰랐던 강의를 듣고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전문 지식도 없고 너무나 무지했던 저에게 아들이 퇴원한 후 케어하는 방법까지도 잘 가르쳐 주셨고 그로 인해 아들을 좀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하는 행동에 대해서 대처하는 힘을 다사랑 알아넌 모임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아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 자신을 위해서 알아넌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오늘도 행복 쌓기를 해 나가고 있습니다. 알아넌에 갈 때에는 고민을 안고 가지만 돌아오는 발걸음은 가볍고 ‘그래 나도 행복할 권리가 있어’라고 다짐하곤 합니다.   오늘도 신께 감사하며 아들에게도 한없이 감사합니다. 그렇게 좋아하던 술을 먹지 않고 저에게 그동안 아들을 못 믿던 불안증세를 떨쳐 버리게 해주셔서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그동안 저희 가족은 아들의 술 문제 때문에 정신과 상담도 받았고 전문상담사님과 개인 상담도 받았지만 별 도움을 못 받았습니다. 체계적으로 환자를 관리하고 상담하고 가족처럼 보듬어주고 퇴원 후에도 관리를 해주며 아들의 불안한 심리를 원장님이나 상담사님과의 상담을 통해서 하나하나 해결하면서 새 삶을 살게 해 준 곳은 다사랑중앙병원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아들 자신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겠지만요.   이 글을 적으면서 지난 아픈 기억들이 떠올라 조금 쓰다 말고 쓰다 말고 포기할까도 여러 번 생각했지만 지난 시간을 묻어둘 수만은 없기에 여기까지 써 내려왔습니다. 우리 가정의 사생활이 다 까발려진 것 같아서 고민했지만 저의 글을 읽고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앞으로도 아들이 평생 술을 먹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불안감은 있지만 사랑하는 우리 아들을 믿고 오늘도 저는 감사한 마음으로 행복하게 하루하루를 시작합니다. ‘엄마가 행복하면 아들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씀하신 알아넌 후원자 선생님의 말씀을 거울로 삼으며, “당신은 참 소중한 사람입니다. 힘내요.” 이 메시지를 나 자신에게 전하면서 글을 마치겠습니다. 그동안 저희 아들을 사랑으로 보듬어 주시고 한 인간으로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원장님들과 최혜영, 오지연, 박미희, 한성희 상담사님, 간호사님들께 진심으로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받침도 틀리고 띄어쓰기도 틀린데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s : 그동안 아들이 일으킨 사건, 사고가 무수히 많지만 일일이 글로 옮기기 너무 많아 정리해서 썼습니다. 그동안의 아들의 알코올 문제는 모든 게 엄마인 저의 잘못이 100%라는 것을 알아넌 모임을 통해서 알게 되었고 알코올에 너무 무지했다는 것을 깊이 반성합니다. 

다사랑 2021-02-09

[2019 알코올 중독 가족수기] 나를 구한 어머니의 변화

[2019 가족수기 공모전 장려상]   나를 구한 어머니의 변화   윤○○   언제나 마음은 태양이라는 영화처럼 사람이 서로 다름을 알고 이해하는 것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서로가 가지고 있는 피부 색깔의 차이로 갈등을 겪던 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나 자신이 이런 힘든 세월 속에 남과는 다른 특이점을 가지고 있고 이를 수용하는 데에는 곱절의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통해 알코올 중독이라는 병이 세상 어느 것보다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병이라는 것을 처음 경험했습니다. 단지 한 가지 추측할 수 있는 건 세상 사람들이 술에 대해 여기는 마음가짐, 이 태도 하나에 ‘나 하나 정도는 술 취해도 돼’와 같은 작은 생각의 씨앗이 점점 줄기를 치게 되면 처음과 다르게 술잔이 늘어가죠. 그로 인해 생겨나는 자아의 변환과 고통과 고뇌의 시간 속에서 생기는 뇌 질환... 결국 술과 동반하는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살게 되는 불행한 길, 그것이 중독의 증상과 맞물려 사회적으로 큰 물의가 생겨나고, 가족들이 고통받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음주조절 불가능으로 일어나는 끝없는 고통이 단주와 병원치료 없이 삶에 가져다주는 고통과 가족들의 괴로움이 어떠한지... 제 경험을 돌이켜보면 너무나 아픈 상처입니다. 항상 자기 생각만으로 돌아가는 인생은 없듯이, 술을 조절하는 능력도 자기 스스로 기르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는 질병이라는 확신은 어머님의 Alcoholic Anonymous 줄여서 A.A.라는 단주 모임에 참여하시는 것에 동참하여 본 경험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술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취하는 이의 기분까지도 자유자재로 조절합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타인에게 무서운 존재, 중독자라는 모습으로 낙인 되어 스스로 자신감을 결여시킵니다. 항상 술만이 나의 친구이며 종교가 되어 자신을 낙인 짓는 것은 위험한 요소라는 것도 잘 알게 되었지만, 담배를 피우는 저 역시 중독자의 고통을 잘 압니다.   쉽게 조절할 수 없고 괴롭기만 한 고통받는 자아의 모습, 내가 만들어 간 나의 모습이 결국 나 자신을 잡아먹는 고통의 늪이 됩니다. 도무지 헤엄쳐도 헤어나올 수 없는 고통의 상황에서 누군가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면 빠져나올 수 없죠. 수많은 사람이 술독에 빠져 아픈 시간이 계속되면 그 아픈 시간이 내 자신인 듯 생각하게 됩낟. 결국 술 없으면 나 자신이 없다는 고민 속에 음주에 대한 열망은 늘어갑니다.   담배를 피우는 저 역시도 중독의 고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지만 참으로 다행인 것은 그나마 어머니께서 중독의 늪에서 헤어나와 최선을 다해서 하루하루 살아가시는 모습이 제게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되어 사는 삶이 아닌 술, 담배가 나 자신을 대체하여 사는 삶에는 어떠한 자존감도 남지 않고 단지 문제점만 남는다는 것을 아신다면 이 수많은 형용사만 굳이 나열할 필요 없이 좀 더 나은 내가 되도록 조금이라도 중독의 위험성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보잘 것없이 사는 술 한 방울로 인해 자신이 여왕이 된 듯한 착각도, 한 모금의 술로 지상낙원을 경험할 수도 있는 즐거운 시간도 마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자신의 모습에 점점 위축되어갑니다. 그 갈림길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자신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어머니는 알코올 중독자입니다. 제가 중학생 무렵 술에 빠지시고 10년이 넘는 생활 동안 술 없이 못 사는 알코올 중독자셨습니다. 일에 찌들어 사신 어머니에게 가족은 의무로서 부양하고, 술은 친구처럼 항상 같이하는 동반자와 같은 관계였습니다. 사랑에도 무너져 봤고 피가 어는듯한 고통에도 시달려 봤고 아픈 마음에도 사리를 만들 것 같은 인내와 고통을 이겨내며 하루를 사셨지만 술 끊는 건 그렇게 힘드셨다고 합니다. 항상 자신에게 가혹한 삶에 갇힌 어머니에겐 소주 한 병이 행복이지 않았을까요.   단지 전 상상해 봅니다. 흡연하는 처지에서 고통을 잊게 해 줄 매개체가 없는 삶은 고단하고 괴로운 법이겠죠. 하지만 오히려 종이 한 장 차이의 사소한 변화가 쌓여 큰 변화가 일어나듯, 중독을 위안 삼아 나의 목소리를 피하게 되면 점점 진짜 자신을 외면하게 됩니다. 저는 항상 슬펐습니다. 술도 알고 담배도 하게 되는 저 자신이 어머님만을 원망하며 변해가는 모습... 저는 그랬습니다. 저 역시도 반성하지 못하는 중독자인 것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술을 드셨지만 우리 가족은 피해자가 아닌 피의자였습니다. 누구 하나 고통스러운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서로 호통만치는 고통스러운 관계... 아픔의 갈림길에서 중독에 시달리며 고통도 무기가 되어 살아가는 처절하지만 경멸받는 사람…. 서서히 메말라가던 우리 가족으 사랑 없이 무너져 가는 왕조의 여신들처럼 자기 치장과 어두움을 감추려 착각과 진한 화장으로 남에게 스스로를 숨기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었습니다.   저는 조현병이라는 병이 있습니다. 슬픔을 가지고 살던 저는 술에 취한 어머니에게 원망이 크고 강하여 매번 멀어지는 관계 속에 소외감을 조장하는 역할이 되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저의 분노가 심해져 화를 낸 적도 많았습니다. 적어도 전 좋은 아들은 아닙니다. 항상 자기만을 위하고 남만 존중하며 아부를 하지만 가족에게는 차갑던 저의 모습때문에 어머니가 힘드셨을 겁니다. 적어도 제가 조현병으로 병원에 들어가고 어머니가 술을 많이 드시게 된 건 너무 고통스러워 선택한 하나의 모순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병원 퇴원 날이 어머니의 생일이었습니다. 병원 생활을 마치고 열심히 노력하셔서 현재는 개방 병동 졸업 1년이 얼마 남지 않으셨습니다. 항상 밝은 모습으로 A.A. 모임을 가시는 어머니의 모습은 아름답다 못해 평화롭습니다. 제가 잘못한 것들은 잊고 어머니만 원망하던 저 자신... 모든 걸 남 탓하고 사는 이런 아들이 미우실까 싶습니다.   8개월에 가까운 입원 기간 동안 손에 펜을 놓지 않고 공부하신 어머님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지금은 수원에 있는 중독관리센터와 후원자를 통한 12단계 교육을 하고 계십니다. 이같은 어머니의 꾸준한 자기 의지와 다짐으로 매일 진행되는 단주 생활을 통해 가족간의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아득하게 먼 미래인 줄 알았는데 말이죠.   어머니의 노력은 한 마리의 평화로운 새가 지저귀듯 저를 감싸며 저의 죽어가는 영혼을 구제해 주셨습니다. 저는 좀 더 활기차게 지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술에 무력했던 어머니를 용서하며 저 자신이 나태했고 부정적이 생각 속에서 썩어 갔다는 걸 배우고 있습니다. 변해가는 멋진 어머니의 모습에서요.   단주는 어렵습니다. 뇌의 인지능력 저하와 환청, 담배와 같은 끈질긴 중독성, 끈질기게 달라붙는 영혼의 고통까지... 제가 본 환자분들은 모두 한결같이 12단계 그 이상을 현실로 실천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을거라 생각됩니다. 최선을 다해 세상을 경배하며 위대한 어른이 되어 의지를 길러 술에 대한 갈망을 잘라버리는 그 모습. 가끔 갈대처럼 흔들거리고, 지나간 세월에 대한 후회와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스스로를 힘들게 할지라도 그런 분들에겐 반드시 축복이 찾아옵니다.   저희 가족처럼 힘들게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적어도 자신감이 있다면 알코올 중독도 극복될 수 있는 병이라고 생각합니다. 약이 좋아졌고, 자신의 노력만 있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가족이 알코올 중독이라는 것이 고통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술로 가족에게 피해를 주면 그만큼 가족의 고통이 배가 된다는 것또한 말이죠. 조금 더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가다 보면 언제든 기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파이팅입니다.

다사랑 2021-02-09

[2019 알코올 중독 가족수기] 8남매를 둔 가장의 알코올 중독

[2019 가족수기 공모전 참가상]   8남매를 둔 가장의 알코올 중독   김○○   "부모님이 사이가 참 좋으신가 보다." 제가 8남매 형제관계를 얘기하면 열이면 열 이 소리를 듣습니다. 그 말에 저는 웃으며 미소를 보이지만 사실 부모님 생각을 하면 매일 밤마다 눈물이 납니다.   저희 아빠는 심각한 알코올 중독입니다. 벌써 6년 전 일입니다. "아빠는 어디 갔어?" 휴가를 내고 집을 찾았을 때 아빠가 보이지 않아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정신병원 보냈어." 정말 눈이 고장 난 것처럼 눈물이 뚝뚝 흘러 떨어졌습니다. 울면 엄마가 힘들어 하실까 숨기느라 혼자 차안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됐나 상황이 한탄스럽고 아빠가 불쌍했습니다.   아빠를 병원에 보낸 엄마와 셋째 동생이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아빠의 알코올 중독 증상을 알고는 있었지만 아빠의 특별한 사랑을 받던 큰딸이었고 독립해 안양에 살면서 눈으로 직접 사는 모습을 보지 못하였기에 너무 가혹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에는 제가 사설구급차까지 불러 아빠를 5번이나 더 입원시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처음 입원한 곳에서는 아빠는 1개월 만에 퇴원했습니다. 보통 입원하면 6개월에서 1년 정도 치료를 해야 한다기에 굳게 마음을 먹었지만 처음 접하는 여러 상황들이 저와 엄마를 흔들었습니다. 병원 선택이 매우 중요했는데 급하게 근처로 알아보다보니 병원 선택부터가 고비였습니다.   그 병원은 알코올중독 환자와 정신치료 환자를 같이 진료하는 폐쇄병동이었습니다. 면회를 가면 정신치료 환자들이 떼로 구경난 듯 몰려왔고 무슨 행동을 할지 몰라 저도 겁이 났습니다. 아빠도 "나를 이런 미친놈들과 같이 두지 마!"라며 괴로워했고 저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었습니다. 거기다 간경화와 복수로 내과 치료도 병행해야 하는데 병원과의 연계 없이 약물치료만 계속되는 것이 마음에 쓰였습니다. 아빠의 삶이 너무나 초라해졌습니다. 참 아는 것도 많고 자기주장도 강했었는데 그곳에선 무척 수척했고 기운이 없었습니다. 매일을 기록한 일기에는 '내가 왜 이런 곳에 있어야 하나... 너무 후회스럽다. 자식들이 너무 보고 싶다. 아내에게 너무 미안하다. 차라리 죽고 싶다...' 라며 외롭고 괴로운 흔적이 가득했습니다. '크게 소리 한번 질러보고 싶다. 밖에 나가 땅 한번 밟아보고 싶다.' 라며 당연한 권리를 잃고 자유를 잃은 아빠의 모습에 저도 매일 가슴이 아팠습니다. 종종 당시 입원했던 병원에서 일어나는 믿을 수 없는 처우에 관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국이 짜다고 하니 밥을 굶겼다. 식판을 들고 무릎 꿇고 벌을 섰다. 큰소리를 내면 코끼리 주사를 맞춰서 독방에 가둔다.' 모두 믿을 순 없었지만 폐쇄형 시골병원이니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특히 감독하는 남자 선생님의 지시에 아빠가 즉시 반응하는 모습에 너무나 혼란스러웠습니다. 가장 결정적으로 퇴원하게 된 계기는 아빠의 친형제들이었습니다. 우리 가족의 삶을 보지 못한 아빠의 형제들은 입원소식에 난데없이 저희 가정을 들쑤시기 시작했습니다. 아빠는 잘못이 없다며 우리 가족을 탓하고, 특히 엄마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며 죄인 취급했습니다. 면회를 다녀온 날이면 저에게 전화해 병원을 욕하고, 당장 퇴원시킬 것을 요구하고, 회유도 하고, 화도 냈습니다. 거기다 아빠는 불난데 불 지르듯 매일 공중전화로 저와 엄마, 형제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얘기했고 절대 술은 먹지 않겠다고 입이 마르도록 얘기했습니다. 결국 1차 입원치료는 그렇게 실패했습니다. 처음에 퇴원 후 며칠 동안은 금주를 하시길래 성공한줄 알았습니다. 거기다 내과치료도 며칠 꾸준히 받아 아빠는 점점 좋아지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술을 먹는 순간, 이전보다 더한 지옥이 시작 되었습니다. 술만 먹으면 힘없는 어린 동생들을 쥐 잡듯이 잡았고 특히 엄마에 대한 원망과 복수심이 무서울 정도로 컸습니다.   아빠가 병원에 있는 동안 같이 하던 장사를 혼자 도맡느라 한 달 만에 10kg가 빠진 엄마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엄마를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더 이상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의처증은 더 심해져서 주변 상인들과 자신의 형제들에게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내면서 갈등은 더 커졌습니다. 초등학생인 막내가 있는데도 입에 담지 못할 무시무시한 욕설은 기본이며, 다 죽자며 휘발유를 사와 집에 붓기도 하고, 동생들을 앉혀놓고 밧줄로 죽이려는 시늉도 했습니다. 결국 아빠가 칼을 옷 속에 숨기고 다닌 날, 저는 두 번째 병원에 아빠를 강제 입원시켰습니다. 이전보다는 훨씬 좋은 시설과 프로그램을 가진 광주에 있는 병원에서 두 번째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폐쇄형이지만 이전보다 자유로워졌고, 알코올 치료만 전문으로 하는 병원이었습니다. 잘 짜여진 프로그램에 신뢰가 갔고 담당 상담선생님이 계셔서 아빠의 심리 상태를 항상 체크해 주셨습니다. 그 난리를 치던 형제들도 인정하는 병원이었습니다. 다만 치료의 중심에는 아빠만 있진 않았습니다. 가족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했고 엄마의 역할이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그 시점에 엄마는 아빠를 무서워하고 있었고, 생계에 바빠 면회도 쉽지 않았습니다. 거기다 아빠는 더 좋아진 병원 시스템을 거부하며 악용했고, 결국 산책시간에 도망을 나와 두 번째 퇴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또 입·퇴원의 반복이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아픈 일들이 있었고 사태는 더 심각해졌습니다. 나중엔 엄마, 아빠의 분리가 시급하여 제가 있는 안양까지 아빠를 모시고 와 여기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을 시켰습니다. 이 병원에서는 제가 엄마의 역할을 하며 아빠를 곁에서 지켰습니다.   기억에 남는 어떤 날이 있습니다. 저녁 면회를 마치고 헤어지는데 엘리베이터 유리 밖에서 아빠가 밝게 웃으며 배웅을 해주신 날이 있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체육대회 달리기를 나간 제가 꼴등을 하는데도 힘차게 손 흔들어 주시던 그 옛날 그 모습이었습니다. 얼마나 벅차고 감격스러운지 집에 가서도 내내 울었습니다. 그렇게 아빠가 잘 치료를 받으며 잘 적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몇 차례 입원 경력으로 병원 시스템을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 아빠는 시스템을 또 악용했고 결국 또 병원을 나와 이전과 같은 날들을 반복하셨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계시냐구요? 2018년 5월 8일 어버이날 통화를 마지막으로 결국 처음 입원했던 병원에서 홀로 돌아가셨습니다. 아빠와 알코올 치료를 하는 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치료 내내 예전의 아빠가 그리웠고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아빠는 참 변덕스럽게 희망을 짓밟았고 한창 힘들 땐 나만 이렇게 힘들게 사는 게 억울하고 지겨워 죽음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땐 아빠가 너무 미웠고  몹쓸 말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돌아가신 후 죄책감이 저를 매일 괴롭혔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아빠 얼굴이 떠올랐고, 눈물이 나서 일을 하기 힘들 지경이었습니다. 심지어 결혼한 저였지만 아기도 갖지 않기로 했습니다.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는 점과 자식으로써 부모를 포기한 것에 대해 환멸을 느껴 저는 부모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만약 다시 돌아간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상황을 만들 수 있을까? 100% 자신할 수 없습니다. 다만 지금 이 상황이 현재 진행형이신 분이 있다면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아빠에게 폭언하지 마세요.  너무 많이 후회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이기적인 행동, 폭언을 보더라도, 그 상황이 너무 괴롭더라도... 똑같이 폭언하고 아빠에게 상처주지 마세요. 겉모습만 멀쩡하지 정신적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이고 우리보다 더 많이 우울하고 외롭고 절망적인 상황이니 그나마 건강하고 상처 회복이 가능한 우리가 좀 더 이해해줘야 된다.’고 말이에요.   그리고 많은 알코올 중독 환자로 인해 가정이 파탄 나고 삶이 불행한 분들... 몰라서 그렇지 주변에 참 비슷한 사연 있으신 분들이 많더라구요. 만약 병원치료를 망설이고 있다면 더 늦기 전에 입원 치료하시길 바랍니다. 저처럼 많은 아픈 일들이 생기겠지만, 병원 말처럼 냉정한 사랑이 필요한 때입니다. 병원을 믿고 치료기간을 넉넉하게 두고 지켜봐야하며 그 동안 환자가 병원에 방치되는 기분이 들지 않도록 꼭 가족이 적극적으로 도와줘야 합니다. 분명 나아질 수 있습니다. 꼭 아빠를 포기하지 말아주세요. 이상으로 지난 6년간의 이야기를 마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사랑 2021-02-09

[2019 알코올 중독 가족수기] 당신을 지켜줄게

[2019 가족수기 공모전 참가상]   당신을 지켜줄게   신○○   남편은 세브란스 병원 정신의학과를 큰집 드나들 듯 했다. 알코올로 인해 위협받는 장기를 잠시라도 쉬게 해주기 위해 입원을 해야만 했다. 계속되는 음주로 간, 췌장 질환과 알코올성 치매까지 진단을 받았다.   남편은 표창장도 여러 번 받은 성실하고 우수한 서울시 공무원으로 퇴직했다. 오직 직장과 집밖에 몰랐던 사람이었다. 술을 좋아하면서도 단주를 해야 할 곳에서는 정확하게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다. 2년 동안 단주도 했었다. 나는 그 때가 봄날처럼 따뜻하고 행복했다. 그런데 행복도 잠시, 위에 암으로 가는 혹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날부터 본인은 마시고 싶은 술을 참아서 스트레스로 혹이 생겼다며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오전 10시만 되면 직장에 출근하듯 술을 마시러 나갔다 늦게 만취상태로 집에 들어왔다. 안주로 장모님이 서운하게 했던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기억해 가면서 6~7시간을 쉬지 않고 마구 떠들어댔다. 아파트에 살면서 이웃에 창피하고 미안했다. 이웃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이려고 여름에는 문을 꼭 닫고 에어컨을 켰다. 집에 혼자 있다가 남편이 들어오는 문소리만 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덜덜 떨었다. 나는 제 빠르게 숨었다. 남편은 온 집안을 뒤지며 아내인 나를 찾아 다녔다. 몇 시간 숨을 죽이고 쪼그리고 앉아있으면 안 아픈 곳이 없었다. 매일매일 똑같은 생활에 멀미를 느끼며 죽고만 싶었다. 나는 베란다에 꽃을 가꾸기 시작했다. 화원에 가서 1그루, 2그루 사다 심은 꽃들이 어느새 100그루가 되었다. 남편이 들어와 주정을 부릴 때면 나는 베란다로 나갔다. 꽃은 내 마음을 아는 듯 눈웃음으로 나를 감싸주었다. 꽃은 내 친구, 꽃들과 이야기 하다보면 울적했던 마음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르르 정화되었다. 파란 잎이 새로이 돋아나고 꽃이 피는 나무들을 바라보면서 힘든 생활을 이겨낼 수 있었다. 술 하나로 인해 가족을 힘들게 하고 인생을 의미 없이 살아가는 남편이 미웠다. ‘어쩌다가, 어쩌다가! 여기까지 이렇게 왔는지’ 본인정신이 아니라는 안타까운 생각에 측은지심이 들었다.   종합병원 정신의학과 외래가 있는 날로 뇌 MRI 결과가 나오는 날이었다. 검사결과 남편의 전두엽이 많이 작아졌다고 했다. 전두엽은 우리의 마음과 행동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는 부위로 술을 마시지 않도록 제어해주는 마지막 브레이크라고 했다. 그런데 남편은 이 브레이크가 과음으로 인해 파열됐다고 했다. 뇌가 술이라는 자극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려면 5년간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아야 한다고 주치의는 말했다. 환자분은 심장 수술을 두 번이나 해서, 심장에 부담이 될까봐 약을 더 이상 높게 쓸 수가 없다며 환자를 격리 시키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하지만 종합병원은 장기간 입원이 어려웠다. 주치의는 “저의 병원에서 3주간 입원해서 알코올 해독시키고, 우리가 추천해주는 의왕에 있는 알코올 전문 다사랑중앙병원병원으로 가세요.” 라고 했다. 나는 남편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여보! 알코올 치료 잘 받고, 젊었을 때처럼 성실하고 자상했던 아버지로, 남편으로 돌아가서 노후를 남이 부러워하는 멋진 삶을 살아봅시다.” 그랬더니 남편은 그렇게 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우리는 퇴원해서 곧바로 다사랑중앙병원으로 갔다. 집에서 꽤 먼 거리였다.   원장님과 상담을 하고 입원 수속을 마쳤다. 선생님이 안내하는 입원실로 갔다. 사람들이 들어가면 문이 자동으로 철커덕 잠겼다. 모두 색이 다른 환자들을 보호하려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모든 시설들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넓은 옥상이 공원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환자들은 옥상에 나가 좋은 공기를 마시며, 가벼운 운동도 할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깨끗해서 마음에 들었다.   남편이 금방 환우들과 이야기 나누고 있는 것을 보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담당 선생님이 자상하고 친절하게 환우들의 병원생활 이야기를 설명해 주셨다. 선생님은 “궁금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하며 전화번호를 줬다. “여보 잘하고 있어, 자주 올게.”하며 돌아서 오는데 큰 가시에 찔린 듯 온몸이 따끔거렸다.   병원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가족 교육이 있다. 설레는 마음으로 간식을 준비해 연애 할 때처럼 남편도 만나고 교육도 받으러 꼬박꼬박 먼 길을 갔다. 남편을 쳐다보았더니 얼굴도 좋아지고 한결 안정된 모습이었다.‘ 아! 이래서 전문 병원이 필요구나’라는 것을 느꼈다. 다른 환자 보호자들과도 단주에 관한 좋은 의견을 서로 나누며 연락하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코피를 많이 흘렸다고 한다. 심장병 환자이기 때문에 항상 위험부담이 있었다. 와파린을 복용하면 혈관이 얇아져서 코를 세게 풀기만 해도 코피를 심하게 쏟았다. 남편은 “이제 술 생각도 안 나고 술 마시는 것도 잊어버렸으니 한 번만 믿어줘.” 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남편을 퇴원시킬 마음의 준비도 안 됐고, 나와서 실패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앞섰다.   일단 가족회의를 했다. 자식들은 술집이 없는 지방으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가시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우리는 그렇게 유배를 떠나는 것마냥 충남으로 떠났다. 원룸을 얻었다. 바다가 있고 산도 있는 공기 좋은 곳이었다. 남편과 산책도 하고 바다에 나가 바지락도 캐고 다시 신혼처럼 행복을 느끼며 6개월을 넘게 살았다. 남편은 전혀 술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이제는 집으로 가도 되겠다는 믿음이 생겼다. 다시 굳은 약속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왠지 항상 불안했다.   현실을 직시하고 변화를 결심 할 수 있는 자아가 남아 있다면 아직 희망은 있다. 중독자로 남아 세상을 탓하며 고난이 가득한 삶을 감내할지, 회복자가 되어 변화를 시작할지는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다. 불안하고 조급한 마음에 남편에게 도움이 될까하고 치매와 알코올 중독에 관한 두 권의 책을 읽었다. 한 줄기 빛이 보였다. 아직, 아직도 늦지 않았다는 것을......   알코올 중독자가 술을 끊는 것은 가장 절친한 친구와 절교하는 일과 같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남편은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몇 년이 지나도 변함없는 생활 속에 보람을 느낀다. 다사랑중앙병원 입원 중에 선생님들의 교육과 영상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우리의 노후를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게 해준 다사랑중앙병원 원장님과 여러 선생님들께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

다사랑 2021-02-09

[2019 알코올 중독 가족수기] 신이 당신에게 허락하지 않은 한 가지

[2019 가족수기 공모전 참가상]   신이 당신에게 허락하지 않은 한 가지   정○○   2006년, 희망과 기대로 결혼했다. 주변 모든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부푼 꿈을 갖고 티비에 나오는 드라마 같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란 기대로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남편은 결혼식 날부터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보였다.   남편은 저녁마다 식사가 아닌 술과 안주로 배를 채웠다. 소주 1병에서 2병 그리고 맥주 한 캔을 마시는 것이 하루 일과의 마무리였다. 그러나 남편은 술을 마시고 나면 조용히 잠들었고 그 다음날 숙취 없이 출근하는 모습에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래, 피곤하니깐 스트레스 받는 걸 술로 풀고 자나보다...’라고 생각하며 술을 마셔도 다음날이면 멀쩡하게 출근하는 남편이니 아무런 문제가 없는 줄 알았다.   처음에는 먹지 말라며 달력에 표시도 하고 잔소리도 했지만 그것이 싸움의 원인이 되는 것 같아 그냥 받아들이며 지냈다. 그것이 알코올 의존증인지도 모르고... 결국 술은 하나 둘 모든 것들을 엉망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큰아들 돌쯤 남편은 술의 양이 많이 늘었고 술 없이는 불안해 낮에도 술을 마셔 음주 사고를 일으키기도 했다.   2007년, 부모님과 시댁식구의 도움으로 남편은 알코올 전문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짧은 병원 생활 후 퇴원 후 다시 재입원하게 되었다. 2번의 짧은 입원이었으나 남편은 퇴원 후 A.A.모임 참석과 노력으로 단주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술을 먹으면 죽는다는 생각에 단주를 하게 된 것이다.   8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남편은 단주를 하면서 모든 것에 최선을 다했다. 나는 ‘남편이 알코올 의존증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이제 술에 대한 걱정은 다시 하지 않아도 되겠어.’라는 생각 속에 지내게 되었고 모든 일상은 평범하게 돌아갔다.   그러던 2016년, 가족여행 중 남편이 몸에 이상한 느낌이 든다고 호소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불안증의 초기 증상이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아무것도 몰랐던 당시에는 병원보다 다른 방법으로 치료해 보려했고 결국 치료 시기를 놓치고 불면까지 겹치면서 남편의 몸은 이상해져갔다.   그래도 처음에는 병원과 한의원을 다니며 여러가지 치료를 받는 모습에 희망을 갖고 지냈다. 그러나 남편은 여러가지 약을 복용하면서 이명까지 생기게 되었다. 불안해 하면서 하루종일 약을 먹고 누워만 있었다. 나중에 보니 남편은 본인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약만 꺼내 먹고 있었다.   이명까지 생기자 불안이 최고치에 이른 남편은 이 방법 저 방법도 안 통하니 술을 먹으면 잠을 잘 수 있겠단 생각이 든다며 내 앞에 맥주를 사가지고 왔다. 그때 말렸어야 했는데... 결국 괴로워하던 남편은 실험을 한다며 술을 벌컥벌컥 마셨고 정신과 약까지 같이 먹었다. 그때부터 다시 남편의 알코올 의존증이 시작되었다.   맥주 한 캔은 8년의 단주와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집에서는 나 때문에 술을 마시지 못하니 남편은 혼자 나가서 몰래 마시고 들어왔다. 분명 알코올 냄새가 나는데도 아니라고 우겨 결국 음주측정기까지 사게 되었다. 남편도 겁이 났는지 다사랑중앙병원에 가서 약을 타오기도 했지만 약으로는 막을 수 없었다. ‘내가 약도 관리하며 챙겨주면 괜찮아지겠지...’라는 생각에 같이 병원에 열심히 따라다녔다.   이런 노력에도 싸움이 시작되었다. 시댁과의 갈등이 발생했고 직장 문제에 부부 문제까지 모든 것이 엉망이 되기 시작했다. 시댁 식구들은 남편이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하는데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오해했으며 나또한 이런 시댁에 서운해 갈등이 깊어졌다. 일하는 나 때문에 친정 식구들은 번갈아 가며 남편이 술을 먹지 못하게 보초를 섰다. 온 집안이 남편으로 인해 엉망이 되어버렸다.   두 아이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이것저것 신경쓰면서 남편에게 이혼 협박을 하며 강제 입원을 진행했다. 몇 번의 반복 입원으로 남편의 입원이 더 편하다고 느끼는 지경에 이르렀다. 술을 먹고 하루종일 잠만 자는 모습, 거짓말하는 모습 등등 남편에 대한 모든 원망과 분노가 나를 변하게 만들었다. 강제 입원 시키는 차 안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남편에게 차갑게 냉정하게 변해버린 내 모습... 남편이 입원하러 들어가는 모습에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지만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버티며 살았다.   그러나 남편은 더 많은 양의 술을 먹지도 않았고 술을 마시면 바로 입원을 시켰는데도 불구하고 입원 횟수가 늘어날수록 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말도 더듬고, 바보같이 행동도 어눌해지고, 기억력도 저하되고... 주치의 선생님께선 다른 사람들처럼 많이 먹은 것은 아니지만 술이 원인은 맞다며 특이한 케이스라고 하셨다. 2016년부터 시작된 음주는 2017년 12월 8일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하면 끝이 났다. 남편은 한 해의 마무리 시점에서 3주간 마지막으로 입원했었다.   그러나 퇴원 후 남편의 상태는 더 심각해졌다. 바보같이 변해버린 남편은 직장도 잃게 되고 예전같지 않은 상태에 스스로 자멸감에 빠지게 되어버렸다. 주치의 선생님께서 알코올로 인한 뇌 손상은 돌아온다며 희망적인 말과 함께 2년 정도 걸린다고 하셨다. 그러나 남편은 답답하고 불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계속해서 여러가지 검사를 받았다. 뇌 MRI를 비롯 치매 인지능력검사 등 다양한 검사를 받았지만 정확한 병명은 없었다.   결국 결론은 알코올로 인한 뇌손상으로 의사 선생님들은 시간이 약이라며 단주를 하며 기다리라고 했다. 남편은 그럴수록 더 불안해했지만 나는 희망을 조금씩 느낄 수 있었다. 단주 시간이 지날수록 남편이 말 더듬는 것과 눈빛 행동 속도가 조금씩 좋아지고 있는 것을... 그리고 남편이 술만 먹지 않으면 난 버틸 수 있다는 것을...   여러 카페와 알코올 의존증 가족을 위한 책, 글들을 읽으면 희망을 가지고 하루하루 버텼다. 그러자 남편은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했다. 상담사 선생님도 주치의 선생님도 좋아졌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렇게 단주하며 하루하루 버틴 것이 어느덧 일 년이 넘었고 남편은 이제 말도 더듬지 않고 모든 것이 많이 좋아졌다. 아이들도 무기력하게 누워만 있던 아빠의 모습을 가끔 기억하고 있지만 지금은 활기차게 지내고 있다.   알코올 의존증은 정말 무서운 병이다. 어쩌면 난치병인지도 모르겠다. 난 가끔씩 생각한다. 남편이 또 술을 먹으면 어쩌지... 그럼 난 어떻게 해야하지... 남편이 입·퇴원을 반복할 때, 난 방문도 잠그지 못하고 잠을 청했다. 혹시나 또 술을 먹으면 어쩌지 하며 불안한 마음에 밤새 온 신경을 곤두새우고 남편이 술을 마시면 다시 병원에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음주측정기와 가족관계증명서 등본을 늘 챙겨두며 지냈던 날들이 가끔씩 떠오른다.   가끔 가입한 카페에 가족들이 남기는 좌절하고 포기하는 글들을 보면 나또한 불안한 마음에 눈물을 흘리곤 한다. 그리고 구구절절 공감하며 나보다 힘든 사람도 많구나 하며 지난 날을 돌이켜 본다.   다시 단주한지 1년이 넘어가고 있지만 8년 동안 단주했다가 맥주 한 캔으로 다시금 시작되었던 알코올 의존증... 주치의 선생님께선 나에게 재발 또한 회복의 한 과정이라고 말씀해주셨지만 내겐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일이다. 알코올은 정말 무서운 존재이다.   난 남편에게 말한다. 눈 감는 날까지 다른 건 다 먹어도 술은 먹으면 안 된다고 신이 남편에게 허락하지 않은 한 가지는 술이라고...  

다사랑 2021-02-09

[2019 알코올 중독 가족수기] 사랑하는 아들에게...

[2019 가족수기 공모전 참가상]   사랑하는 아들에게...   박○○   시골에서 자란 나는 집안에 술 먹는 사람이 없어서 술에 대한 상식도 없었다. 더구나 옛날에는 먹고 살기 바쁜 시절이라 술에 대한 문제가 생길 여유도 없었던 것 같다. 지금은 술값도 저렴하고 아무데서나 쉽게 살 수 있어 더 문제가 되는 것 같다.   결혼해서 3남매를 낳았고 자식들은 아무 탈 없이 건강하게 잘 자라 사회생활도 잘 하고 결혼도 했다. 그런데 큰아들이 술에 빠지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원래 시아버님과 남편이 술을 무척 좋아했다.   내가 결혼한지 54년째, 남편의 강원도 산골 현장 때문에 시골에서 살았다. 그 시절 철없이 세상물정 모르고 인심 좋은 남편의 회사 동료들과 친척보다 더 좋은 관계로 재미있게 살았다. 여름에는 너무 시원해서 선풍기를 안틀고 살았고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고 지냈다.   그렇게 지내는데 아들이 이혼을 하고 손녀딸 둘과 함께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회사도 안다니고 사업을 한다며 일을 벌려 놨다. 술 속을 헤매던 아들이 사업을 한다고 빚을 잔뜩 지자 그 빚은 남편의 몫이 되었다. 아들의 술버릇은 끝이 안 보이는 전쟁이었다. 술만 마시며 음식을 잘 안 먹었고 한 번 마시면 멈출 줄을 몰랐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부딪치고, 넘어지고...   아들은 자기 자신을 감당하지 못하면서도 병원에 가는 것을 엄청 싫어한다. 아직까지도 입·퇴원을 반복하며 힘들게 살고 있다. 아들이 자기 생활 할 능력이 없으니 경제적으로 부담스럽고 감당하기 힘들다. 아들과 손녀 딸들이 우리 집에 온지가 벌써 16년이나 되었지만 이제 80이 다 된 늙은이가 세 식구 밥해주고 살림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아들이 술에 빠져 있을 때, 울기도 많이 울고 신세 한탄도 많이 했다. 젊어서 자식들 키울 때는 말썽도 안 부리고 잘 커줘서 재미있게 잘 살았는데 늙어서 고생하니 걱정만 느는 것 같다. 그래도 애미로서는 아픈 손가락이고 생각하면 불쌍한 생각이 든다. 옆에서 지켜주는 마누라도 없고 손녀 딸들도 아빠를 꼴도 보기 싫어한다.   오랜 세월 힘든 생활이 지속되니까 도망가고 싶고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애미가 자식을 포기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들이 정신 못 차리고 있을 땐 아들에게 휘둘려 나도 의존증 환자가 되는 느낌이다. 이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안 다니던 교회에 나가 ‘하느님, 도와주옵소서.’하고 간절히 기도드리고 있다. 그리고 밝게 긍정적으로 모든 것에 감사하고 노력하며 항상 책을 많이 보려고 한다.   사랑하는 아들아, 인생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수도 있어. 벌써 네 나이 50이 넘었는데 정신차고 술에서 벗어나야지. 두 애들도 대학교에 잘 들어가고 식구 모두 건강하니 너만 정신 차리면 우리 집은 행복할 것 같아. 네 동생들도 다 잘 살고 있는데 큰아들인 네가 집안을 보살펴야지. 니 자신도 마음대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만 어쩌겠니, 너 자신이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하는 수 밖에...   아들아, 온 힘을 다해보자. 나는 할 수 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I can do it! This too, shall pass away.) 힘든 시기 다 같이 최선을 다해 노력해 보자구나.   우리는 과거의 사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자신의 삶을 결정한다. - 미움받을 용기2 中-  

다사랑 2021-02-09

[2019 알코올 중독 가족수기] 나의 작은 소망

[2019 가족수기 공모전 참가상]   나의 작은 소망   염○○   공모전 마감일을 며칠 앞두고 수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긴 세월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의 시간을 보내 온 자식에게 위로와 격려의 뜻으로 애비의 심정을 글로나마 표현하고 싶어 펜을 들었습니다. 또한 환자 본인은 물론 우리 가족 모두가 겪은 적지 않은 세월의 무게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가족의 아픈 역사를 기록한다는 마음으로 쓰고자 합니다. 그 간의 일들을 기억 나는대로 복기해 과거를 거울삼아 미래의 지침으로 삼고자 합니다. 알코올 질환 또는 알코올 의존증이라는 말이 다소 생소했던 시절, 그러니깐 15·6년 전쯤 이 병이 무서운 병이라는 말을 듣기는 하였으나 막상 내 아들을 데리고 병원을 찾아갔을 때 의사선생님이 처음 하신 말씀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이 병은 암보다 무서운 병이라고... 암은 수술이라도 할 수 있지만 이 병은 수술도 안 될 뿐더러 두고두고 괴롭히면서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 모두를 황폐하게 만들 것이라는 절망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무슨 의미인지 몰랐지만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면서 무섭도록 실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번 입에 술을 대면 고장 난 브레이크 마냥 멈출 줄 모르고, 곡기는 끊은 채 술만 퍼 마셔 방에 빈 병이 쌓이고, 귀신같은 몰골로 아들이 어정어정 걷는 모습을 보면 사람 같지도 않았습니다. 아들은 술을 못 마시게 말리면 죽일 듯이 덤비고 날 뛰는 사나운 짐승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점점 웃음이 사라지고 하루하루가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맏이가 그렇다보니 동생들도 불안과 걱정 속에 지내다 보니 가족 간의 사이가 멀어졌습니다. 가정의 온기는 사라지고 증오와 원망이 자리를 잡아 집안이 점점 황폐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집에 차가 있었으나 항상 위급한 상황이라 앰블런스를 이용했고 구급차의 기사가 가는대로 수 없이 많은 병원을 이용했습니다.   처음에는 서울 시내에 있는 병원을 다니다가 김포, 강화, 성남 등지로 확대했고 성과가 없자 조금 규모가 큰 병원을 찾아 전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다사랑중앙병원을 알게 되었고 병원 시스템이나 직원들의 헌신적인 보살핌에 마음이 끌려 아들을 입원시키게 되었습니다. 그 인연을 시작으로 수년간 7차례나 아들은 입·퇴원을 반복했습니다.   저도 가족교육 프로그램에 참가하며 몇 달간 병원을 드나들었고 덕분에 알코올 중독에 대한 지식과 치료방법에 대해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다사랑중앙병원 외에도 부천에 있는 병원에 5회, 고양시에 있는 병원에 5회, 이천시에 있는 병원에 2회 등 많은 병원을 다녔지만 퇴원 후 가정과 사회생활에서 문제가 야기되어 실패를 반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와 가족들은 억장이 무너지고 너무 큰 절망감에 무엇이라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항상 문제는 퇴원 후에 있었습니다. 아무리 안 좋은 상태라도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면 의사선생님과 상담사 선생님들께 의지해 안심을 하다가 막상 퇴원하는 날이면 긴장과 걱정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퇴원 후부터 가족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적절히 대처하지 못해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다사랑중앙병원에서 가족교육을 받을 때 알게 된 환자 어머니께서 가끔 저희 집으로 전화해 저희 아들의 근황과 상태를 묻곤 합니다. 저는 있는 그대로 설명하면서 그 어머니의 심정이 오죽하시면 이렇게 전화를 하실까 생각하지만 아들의 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드릴 말씀도 없고 오히려 짜증스런 반응을 보일 때가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에게 기회가 된다면 이 글이 도움이 되고 조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집안 사정이 안 좋아지면서 저희 부부가 아들 문제가 아닌 일에 관심을 쏟던 시점에 고맙게도 아들은 스스로 서서히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항상 독립해 나간다고 알바 등 돈이 되는 일이면 마다하지 않던 아들이 어느 날부터 도서관에 간다고 엄마에게 약간의 용돈만 타서 나갔다가 돌아오곤 했습니다. 수중에 돈이 있으면 항상 문제를 일으킨다는 생각에 직업을 반대했던 저희 부부로서는 이 현상을 좋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한 동안 잘 견디며 성실히 도서관에 다니던 아들이 작년 여름 어느 날, 잔뜩 술에 취해 들어와 집에서도 계속 다음날까지 술을 마셨습니다. 가족들은 다시금 깊은 시름과 걱정에 쌓이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앰블런스를 불렀습니다. 평소 치욕적이라고 싫어하던 구급차에 아들을 싣고 서울 시내에 있는 알코올 전문병원으로 급히 옮겨 입원시켰습니다.   입원 후 며칠 만에 아버지를 보자고하여 갔더니만 술을 많이 마신 것도 아닌데 왜 구급차까지 불러서 입원을 시켰느냐며 이 병원은 치료하는 병원이 아니라 환자를 방치하고 수용하는 곳이니 병원을 옮겨달라고 했습니다. 당시 아들이 공인중개사 자격시험을 준비 중이어서 비교적 가깝고 입·퇴원이 수월한 일산의 알코올 전문병원으로 옮겼고 아들은 1개월 만에 퇴원했습니다.   퇴원 후 시험을 치른 아들은 1차 합격을 하고 지금은 2차 시험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퇴원한 지 6개월 남짓, 이제 아들의 표정과 행동에서 안정과 자신감을 읽을 수 있으나 이 더러운 병의 속성을 의식하는 순간 가슴이 무겁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희망적인 모습을 보면서 모두에게 감사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에 다사랑중앙병원같은 훌륭한 병원의 관계자들에게 감사하고 환자 본인의 의지에도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요즘 아들은 전에 입원했던 병원 과장님이 개원했다는 정신과 의원에 다니며 A.A.모임에 나가고 친구들과 교류도 하면서 한층 성숙되고 여유 있는 생활을 보이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병원 약도 저를 시켜 수령하였으나 지금은 본인이 직접 가서 처방받아 와 마음의 여유라고나 할까 매사에 걱정을 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아직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해 집에 올 시간에 맞춰 애 엄마가 전철역에서 만나 둘이 손잡고 들어온답니다.   평생을 제가 짊어지고 갈 십자가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는데 이처럼 대견하고 고마울 때가 없습니다. 지금도 아들과 있을 때에는 말과 행동을 조심하며 희망을 얘기합니다. 저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고 생각합니다. 쉽지 않은 과정이지만 애정과 관심을 갖고 계속 지켜보고자 합니다. 이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여 아들의 인생에도 봄이 오고 꽃이 만개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것이 저의 작은 소망입니다.    

다사랑 2021-02-09

[2019 알코올 중독 가족수기] 나의 작은 소망

[2019 가족수기 공모전 참가상]   나의 작은 소망   염○○   공모전 마감일을 며칠 앞두고 수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긴 세월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의 시간을 보내 온 자식에게 위로와 격려의 뜻으로 애비의 심정을 글로나마 표현하고 싶어 펜을 들었습니다. 또한 환자 본인은 물론 우리 가족 모두가 겪은 적지 않은 세월의 무게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가족의 아픈 역사를 기록한다는 마음으로 쓰고자 합니다. 그 간의 일들을 기억 나는대로 복기해 과거를 거울삼아 미래의 지침으로 삼고자 합니다. 알코올 질환 또는 알코올 의존증이라는 말이 다소 생소했던 시절, 그러니깐 15·6년 전쯤 이 병이 무서운 병이라는 말을 듣기는 하였으나 막상 내 아들을 데리고 병원을 찾아갔을 때 의사선생님이 처음 하신 말씀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이 병은 암보다 무서운 병이라고... 암은 수술이라도 할 수 있지만 이 병은 수술도 안 될 뿐더러 두고두고 괴롭히면서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 모두를 황폐하게 만들 것이라는 절망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무슨 의미인지 몰랐지만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면서 무섭도록 실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번 입에 술을 대면 고장 난 브레이크 마냥 멈출 줄 모르고, 곡기는 끊은 채 술만 퍼 마셔 방에 빈 병이 쌓이고, 귀신같은 몰골로 아들이 어정어정 걷는 모습을 보면 사람 같지도 않았습니다. 아들은 술을 못 마시게 말리면 죽일 듯이 덤비고 날 뛰는 사나운 짐승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점점 웃음이 사라지고 하루하루가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맏이가 그렇다보니 동생들도 불안과 걱정 속에 지내다 보니 가족 간의 사이가 멀어졌습니다. 가정의 온기는 사라지고 증오와 원망이 자리를 잡아 집안이 점점 황폐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집에 차가 있었으나 항상 위급한 상황이라 앰블런스를 이용했고 구급차의 기사가 가는대로 수 없이 많은 병원을 이용했습니다.   처음에는 서울 시내에 있는 병원을 다니다가 김포, 강화, 성남 등지로 확대했고 성과가 없자 조금 규모가 큰 병원을 찾아 전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다사랑중앙병원을 알게 되었고 병원 시스템이나 직원들의 헌신적인 보살핌에 마음이 끌려 아들을 입원시키게 되었습니다. 그 인연을 시작으로 수년간 7차례나 아들은 입·퇴원을 반복했습니다.   저도 가족교육 프로그램에 참가하며 몇 달간 병원을 드나들었고 덕분에 알코올 중독에 대한 지식과 치료방법에 대해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다사랑중앙병원 외에도 부천에 있는 병원에 5회, 고양시에 있는 병원에 5회, 이천시에 있는 병원에 2회 등 많은 병원을 다녔지만 퇴원 후 가정과 사회생활에서 문제가 야기되어 실패를 반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와 가족들은 억장이 무너지고 너무 큰 절망감에 무엇이라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항상 문제는 퇴원 후에 있었습니다. 아무리 안 좋은 상태라도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면 의사선생님과 상담사 선생님들께 의지해 안심을 하다가 막상 퇴원하는 날이면 긴장과 걱정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퇴원 후부터 가족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적절히 대처하지 못해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다사랑중앙병원에서 가족교육을 받을 때 알게 된 환자 어머니께서 가끔 저희 집으로 전화해 저희 아들의 근황과 상태를 묻곤 합니다. 저는 있는 그대로 설명하면서 그 어머니의 심정이 오죽하시면 이렇게 전화를 하실까 생각하지만 아들의 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드릴 말씀도 없고 오히려 짜증스런 반응을 보일 때가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에게 기회가 된다면 이 글이 도움이 되고 조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집안 사정이 안 좋아지면서 저희 부부가 아들 문제가 아닌 일에 관심을 쏟던 시점에 고맙게도 아들은 스스로 서서히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항상 독립해 나간다고 알바 등 돈이 되는 일이면 마다하지 않던 아들이 어느 날부터 도서관에 간다고 엄마에게 약간의 용돈만 타서 나갔다가 돌아오곤 했습니다. 수중에 돈이 있으면 항상 문제를 일으킨다는 생각에 직업을 반대했던 저희 부부로서는 이 현상을 좋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한 동안 잘 견디며 성실히 도서관에 다니던 아들이 작년 여름 어느 날, 잔뜩 술에 취해 들어와 집에서도 계속 다음날까지 술을 마셨습니다. 가족들은 다시금 깊은 시름과 걱정에 쌓이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앰블런스를 불렀습니다. 평소 치욕적이라고 싫어하던 구급차에 아들을 싣고 서울 시내에 있는 알코올 전문병원으로 급히 옮겨 입원시켰습니다.   입원 후 며칠 만에 아버지를 보자고하여 갔더니만 술을 많이 마신 것도 아닌데 왜 구급차까지 불러서 입원을 시켰느냐며 이 병원은 치료하는 병원이 아니라 환자를 방치하고 수용하는 곳이니 병원을 옮겨달라고 했습니다. 당시 아들이 공인중개사 자격시험을 준비 중이어서 비교적 가깝고 입·퇴원이 수월한 일산의 알코올 전문병원으로 옮겼고 아들은 1개월 만에 퇴원했습니다.   퇴원 후 시험을 치른 아들은 1차 합격을 하고 지금은 2차 시험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퇴원한 지 6개월 남짓, 이제 아들의 표정과 행동에서 안정과 자신감을 읽을 수 있으나 이 더러운 병의 속성을 의식하는 순간 가슴이 무겁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희망적인 모습을 보면서 모두에게 감사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에 다사랑중앙병원같은 훌륭한 병원의 관계자들에게 감사하고 환자 본인의 의지에도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요즘 아들은 전에 입원했던 병원 과장님이 개원했다는 정신과 의원에 다니며 A.A.모임에 나가고 친구들과 교류도 하면서 한층 성숙되고 여유 있는 생활을 보이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병원 약도 저를 시켜 수령하였으나 지금은 본인이 직접 가서 처방받아 와 마음의 여유라고나 할까 매사에 걱정을 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아직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해 집에 올 시간에 맞춰 애 엄마가 전철역에서 만나 둘이 손잡고 들어온답니다.   평생을 제가 짊어지고 갈 십자가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는데 이처럼 대견하고 고마울 때가 없습니다. 지금도 아들과 있을 때에는 말과 행동을 조심하며 희망을 얘기합니다. 저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고 생각합니다. 쉽지 않은 과정이지만 애정과 관심을 갖고 계속 지켜보고자 합니다. 이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여 아들의 인생에도 봄이 오고 꽃이 만개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것이 저의 작은 소망입니다.    

다사랑 2021-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