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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나는 감사함으로 알코올 중독으로부터 회복될 수 있었다
등록일 2021-02-09 조회수 535 이름 다사랑
첨부파일 2020환자회복수기_썸네일.jpg

[2020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참가상]

 

나는 감사함으로 알코올 중독으로부터 회복될 수 있었다

 

○○

 

저는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1960년대 이전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아버지는 온순하셨고 가족밖에 모를 정도로 가정에 충실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투전꾼들의 꼬임으로 도박을 시작하였고 그때부터 본전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가족 모두를 잊은 채 오로지 도박에 중독되어 지내셨다고 합니다. 결국, 술과 도박으로 모든 재산을 다 날리고 오롯이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형제, 자매 32녀를 남긴 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제 나이 4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께서 아버지를 대신해 그렇게 죽으라 막노동으로 가족 모두를 먹여 살리기란 역부족이었나 봅니다. 그때부터 가족들은 뿔뿔이 헤어지게 되었고, 정말 지옥과도 같은 나날을 보냈다고 합니다. 급기야 아무리 노력해도 너무나 큰 고통이었고, 버티기에는 역부족으로 우리 집에는 큰 변화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양로원으로 가셨고 큰형님은 원래 고향인 홍천으로, 누나들은 남의집살이가 시작되는 등 온 집안이 생이별하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그나마 공부 잘하는 작은 형과 막내인 저는 집에 남게 되었습니다. 작은 형은 줄곧 우등생이었는데, 저는 그렇게 오로지 공부만 하라는 엄한 형 밑에 남게 되었습니다.

 

저는 동네 친구들과 맘 놓고 놀지도 못했습니다. 작은 형은 늘 저를 책상에 앉으라 했고 만약 놀다 걸리면 형에게 죽도록 두들겨 맞는 상황이 거듭되었습니다. 이러한 결과로 저도 줄곧 우등생의 자리를 놓치지 않고 초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이듬해 우리 세 식구는 저의 중학교 입학을 위해 읍내로 이사를 하게 됩니다. 집은 단칸방 사글세 집이었습니다. 중학교는 수업료가 저렴한 고등공민학교로 입학하였습니다. 형의 계산으로는 제가 그나마 초등학교 시절 우등생이었으니까 나중에 검정고시를 보면 된다고 했습니다.

 

작은 형님의 스파르타식 교육을 통하여 고등공민학교 3학년 때에 치러지는 고입입학 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형님은 이미 공무원이 되었고 저는 정규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 형님은 입대로 집을 떠나게 되었고 어머니와 저 이렇게 단둘이 남게 됩니다.

 

습관처럼 학교에서 돌아오면 저는 늘 책상에 앉기는 했지만 이 습관도 얼마 가지 않았습니다. 그 무서웠던 형도 없으니 얼마나 해방이 되었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그때가 스스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친구가 찾아와 자신의 학교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하자고 하여 그러자고 했습니다. 그 친구의 학교는 남녀공학이었고 도서관에는 우리 둘 외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친구의 밀린 수학 과목을 가르친다며 같이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일인지 언제부터인가 학교 도서관에 학생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 여학생들도 도서관에 나타나게 되었고 자연스레 제게 수학 문제를 물어보는 여학생들도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과정에 한 여학생을 알게 되었고, 저는 얄팍한 수학 실력을 자랑하며 자만감에 취하여 공부를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여학생을 만나는 날만 기다리게 된 어느 날, 그 여학생의 남자친구라는 친구가 제게 싸움을 걸어왔고 그 계기로 저는 불량 학생의 길을 가게 됩니다. 매번 싸움 끝에 얻어맞은 상처와 아픔을 잊으려면 술을 마셔야 한다고 했고, 또 사과하면서 술을 마시게 됐고, 그렇게 제 생애 첫 잔은 싸움 끝에 남는 상처의 고통을 잊기 위해 시작된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19781월 한겨울의 이야기입니다.

 

나의 첫 잔은 포도주입니다. 포도주는 쓰지 않고 달다는 친구들의 가르침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술을 접한 게 난생처음이었습니다. 포도주 몇 잔을 마시고 나니 마시는 건지 먹는 건지 모를 정도로 취해 버린 저는 그만 정신을 잃게 됩니다.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샴페인, 그다음은 소주를 양재기에 벌컥벌컥 마셨다고 합니다.

 

첫 술자리부터 정신을 잃고 그야말로 폭주 중의 폭주를 한 것입니다. 친구 집 자취방에서 시작된 술인데 어떻게 된 일인지 나중에는 길거리에 쓰러져 동사 되기 직전 같이 마셨던 친구의 발견으로 구사일생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그때 상황을 기억하자면 친구 어머니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뭔 놈에 술이라며 화를 내셨고 함께 술을 마셨던 친구 두 명은 친구 어머니가 오시자 뒷문으로 피했습니다. 저는 방 한 쪽에 쓰러져 있었는데 친구 어머니께서 그런 저를 끌고 나와 길거리에 내동댕이쳤다고 합니다. 처음 마신 술로 인해 가혹하리만큼 큰 체벌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 소동으로 저는 3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고, 결국 내 어머니의 지극 정성스러운 간호로 살아나게 됩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 어머님이 받으셨을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늘 책상에 앉아 책만 읽었던 아들이 이런 날벼락을 가져올지 말입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평소 함께 하던 친구들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 친구들의 세계는 선후배들이 힘이 센 자들을 중심으로 모인 불량 학생들이었습니다. 그들과 어울리면서 저는 그들보다 더 불량스럽게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누가 어쩌고 어째? 어떤 패거리들이 내 조직의 친구를 때렸다고?’ 저는 늘 패싸움을 하면서 타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제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고등학교 2학년 2학기 때부터 말입니다.

 

세월이 흘러 형님께서 군 복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제일 먼저 하신 일이 동생 학교에 찾아가 담임선생님을 만나 제 성적부터 확인하는 일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생각지도 못했던 큰 충격과 실망을 준 것입니다. 성적도 성적이겠지만 변해 버린 동생의 행동거지가 완전히 깡패 새끼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당연히 대학 입학 예비고사 성적은 형편없었고 대학 진학도 못 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저는 형의 모든 희망을 저버리게 됩니다. 늘 동생의 일상은 깡패 같은 친구들과 어울리고 형이 넌 뭐냐?’라고 충고라도 할라치면 결국 큰소리가 오갔고 끝내 따귀라도 치게 되면 이제는 나도 컸다고 같이 주먹질까지 하는, 형도 몰라보는 개망나니가 된 것입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날마다 술과 담배, 다방 아가씨들과 냇가에 텐트 치고 놀며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형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제발 이곳을 떠나 지금 어울리는 친구들과 관계를 끊고 새로 출발하라는 권유를 받게 되고 저도 마음 한구석에 이렇게 살아서는 더는 안 되겠다 싶어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차분히 나를 찾아 다시 공부를 해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서울 남양동에 있는 경일학원 종합반에 들어가 재수생이 되었습니다. 서울 학생들의 학구열은 대단했습니다. 시골에 있던 제가 지내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학원 문이 열리자 서로 앞자리에 앉으려고 뛰는 학원생들의 모습부터 학구열의 환경이 전혀 달랐습니다. 저는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의지로 바로 적응할 수 있었고 재수생 생활 3개월 정도가 지났을 때 형님의 권유로 공무원 시험을 치르게 됩니다. 그런데 필기시험에 합격했을 때, 아직 면접도 남아 있는 상태에서 무슨 면접이냐며 모든 짐을 싸서 다시 집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대학은 무슨, 그저 형님처럼 나도 공무원이나 하자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다시 친구들을 만나 강변으로 가서 바로 술을 마시며 놀았고, 그동안 못 마신 술 한꺼번에 다 마시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며 지내다가 결국 면접시험에서 떨어지게 됩니다. 공무원 시험에 떨어졌다고 또다시 술을 찾았고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가 입대를 앞두고 더 술을 많이 마셨습니다. 그렇게 술을 마시다가 군에 입대했습니다.

 

군대 생활 30개월은 나의 무질서했던 생활이 정리 정돈이 되는 시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나니 직업을 가져야 했습니다. 다시 공무원 시험 준비를 시작하고 이후 여러 번 실패하며 고전 끝에 29살의 늦은 나이로 최종 합격을 하게 됩니다.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며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되었고, 그때 아내는 이미 공무원 생활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해 바로 결혼도 하였습니다.

 

나의 방황이 여기서 막을 내리나 싶었는데. 처음 발령지가 시골에 있는 면사무소였습니다. 공무원 생활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마을 이장님들과 술자리부터 직원들과 술자리, 회식, 동창회, 체육대회 술자리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같이 술을 마셨던 사람들은 제게 술을 잘 마신다며 그들이 술을 마실 때마다 저를 찾았고 저는 늘 신바람이 나며 술을 마셔댔습니다. 그러던 중 인사 발령도 여러 번 났고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술을 마셨어도 출퇴근만큼은 정확히 지키는 등 제 역할은 확실히 해냈습니다.

 

그렇게 공무원 생활 12년째가 되던 해, 제 나이 41세에 술 문제로 병원으로 입원하는 사태를 밟게 됩니다. 병원은 대학병원 정신과로, 외부로부터 통제된 병실이었습니다. 제가 13일 동안 아무것도 못 먹고 계속 술만 마시고 그러다가 술에 깰 때 즈음에 다시 또 마시는 생활을 하다가 끝내 의식을 잃자 아내는 제가 죽을까 봐 병원 구급차를 불러 병원에 입원시키게 됩니다.

 

정신을 차리고 기력을 찾았을 때 치료진들은 제가 병원을 입원한 지 5일째라고 했습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저는 왜 나를 밖에도 못 나가고 꼼짝할 수도 없는 곳에다 가둬 놓았느냐며 아내에게 전화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당장 퇴원시키라고 화를 냈습니다. 저는 그때 아내한테 갖은 욕설을 다 퍼붓고 오직 내가 갇혔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아내가 왜 거기까지 나를 데려갔는지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병원 입원 기간 분통만 터지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28일 만에 퇴원하게 되었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술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어쩌다 출장이라도 가게 되면 산과 들, 자연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한 잔 술을 마시고 싶다고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병원에서 퇴원한 지 3개월을 채 넘기지 못하고 또 술 한 잔을 입에 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또다시 술자리를 찾게 되고 이런 생활을 반복하다 결국은 3개월을 채 못 넘기고 술 한 잔이 장취로 이어지고 끝내 병원에 실려 가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41세가 되도록 병원이라고는 모르고 살았는데 왜 이런 일이 반복되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퇴원 후 다시 사무실 출근하는 일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직원들이 다 저를 멸시하는 거 같고 저만 쳐다보는 것 같았습니다. 대학병원 정신과를 수없이 입·퇴원 하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아 도대체 왜?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이런 생각조차도 못하며 술버릇의 악순환은 계속되었습니다.

 

아침이면 머리가 너무 아프고 속이 메스껍고 너무 괴롭다 싶으면 술이 깨기도 전에 한 잔을 마시고 또 그 한 잔의 술로 결국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술이 깨기도 전에 한 잔, 그렇게 해장술이란 것도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면서 아내는 저를 어떻게든 치료해보겠다고 여러 정보를 찾아 결국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시키게 됩니다.

 

다사랑중앙병원의 관리병동, 개방병동, 재활병동 이런 체제는 우연이 아니라고 봅니다. 관리병동에서의 12단계 중 1단계 발표를 통해 지난날 나의 술 문제를 뒤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하면 단주를 할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보호자 참석 하에 진행된 1단계 발표를 저는 가슴으로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머리로 발표했었습니다. 원장님께서 회진 시에 늘 하시던 정직이란 그 말씀을. ‘? 내게만 주문을 하시나?’ 하는 제 속의 양심을 들킨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역시나 머리만으로 진행된 저의 1단계 발표와 4단계, 9단계 발표는 무용지물이었습니다. 퇴원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재발하고 재입원하는 나날이 반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관리병동보다 개방병동의 생활을 통해 얻는 자유로움이 좋았습니다. 다사랑중앙병원의 단계별 치료 시스템은 정말 훌륭한 시스템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환자들이 알코올 중독 문제에 적응하고 해결하는 단계별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병원에 입원했을 때 제 상담을 맡으신 윤희숙 상담사님이 제게 하셨던 말들. 12단계 필사를 해보자, 불완전한 영성, 아직도 가야 할 길 등 필독 도서, 수요일 A.A.모임이 있을 때마다 맨 앞에 앉으라는 감독의 눈초리, 병원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그 말들이 결국 나를 위한다는 것임을 왜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는지. 상담사님이 진정으로 환자를 위하는 마음으로, 제게 그렇게 열과 성을 다했음을 말입니다. 지금도 되돌아보면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다사랑중앙병원에서 수없이 진행되는 토론과 학습은 제 단주 생활의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폭주로 시작되었던 제 음주 습관이 멈춘 지 이제 3년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제게는 단주 생활 밑거름의 양식이 된 것입니다. 내가 가장 즐겼던 술과 담배는 끝내 나를 죽음의 문턱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2018년 지주막하출혈로 의식을 잃고 2회에 걸친 수술 끝에 사경을 헤매다가 겨우 살아났습니다. 뇌출혈의 원인은 바로 술과 담배였습니다. 너무도 끔찍한 병을 직접 체험한 저로서는 그렇게 내 몸에 휘감았던 술과 담배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된 원인이라는 걸 고백하고 싶어서 이렇게 수기를 쓰게 되었습니다.

 

저는 글을 잘 쓰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저처럼 누군가가 술로 인해 이 지경까지 가지는 말게 해야겠다는 신념이 생겼고 그래서 경험담을 나누고 싶어졌습니다. 지금도 저는 뇌출혈 후유증으로 그렇게나 좋아했던 축구도, 족구도, 잘하지 못합니다. 뇌 신경과 의사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지금까지 사용했던 운동 신경이 다 죽었다고, 그래서 옆에 있던 뇌 운동 신경을 다시 살리는 재활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고 합니다.

 

변화된 삶을 살아야 했기에, 늘 일상에서 대하는 모두에게 긍정적인 마음으로 감사함을 표현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저의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매사에 갖는 감사함은 늘 마음에서 소용돌이치는 갈망감과 내적 갈등을 사라지게 하고 늘 평온함이 유지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 감사함이야말로 나의 유일한 백신이구나를 매일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저의 모습부터 조금씩 달라지고 있습니다.

 

오늘도 맑은 하늘을 만끽하며 이 모든 것들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중입니다. 술과 담배를 접하지 않은 지 이제 3년이 넘었습니다. 얼마 전, 제 아들의 결혼식이 있었고 그때 주변의 많은 사람으로부터 축복의 인사를 받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술을 끊고 온전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얻은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다사랑중앙병원의 여러 치료진과 또 환우들과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지금 회복의 길을 걷고 있는 저는 너무도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이 모든 기초를 다지게 해 준 다사랑중앙병원 치료진들께 거듭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