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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술 마시지 않는 알코올 중독자
등록일 2021-02-09 조회수 523 이름 다사랑
첨부파일 2020환자회복수기_썸네일.jpg

[2020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장려상]

 

술 마시지 않는 알코올 중독자

 

○○

 

21녀 중 장남으로 서울 태생이다. 미군에서 일하시던 아버지와 전업주부셨던 어머니. 지극히 평범한 가정이었고 행복했다. 마냥 개구쟁이던 내게 변화가 시작된 것은 초등 3학년. 설명하시던 선생님께 그거 책에 있는데요!”라고 말했다가 짧은 몽둥이로 머리를 맞고 잠시 기절했었는데 그 이후 밤마다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밤이 두려웠고 심한 모멸감에 친구들이 이를 알게 될까 전전긍긍했다.

 

그렇게 성격이 소심해지고 감추는 버릇이 생겼다. 친구들과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잘 사귀지 못했다. 중학교 2학년이 지나면서 문제는 멈추었지만 집안 환경은 내게 또다른 시련을 주었다. 아버지가 파킨슨병으로 투병하게 되셨고 어머니는 부업을 시작하셨다. 학교에서 투명 인간처럼 행동했고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같은 어릴 적 환경이 나의 중독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상담사 선생님께서 읽어보라고 권해주신 `상처받은 내면아이 치유라는 책을 접하고 나서다.

 

내가 처음 술을 마신 건 초등학교 때이다. 아버지 심부름으로 주전자에 막걸리를 받아 오면서 길에서 홀짝홀짝 마셨는데 그 맛이 아주 달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친구가 오시거나 옆집 아저씨와 바둑을 두시면서 아버지가 막걸리를 드셨던 모습을 슬쩍 본 것을 빼고는 아버지가 술을 마시는 모습은 거의 보지 못했다. 아마 내 중독이 아버지로부터 유전된 것은 아닌 듯싶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집에서 나는 착하고 부모님 말씀을 잘 듣는 아이였다. 어머니께서도 니들 키울 때는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러나 사실 그건 순전히 어머니의 생각으로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아픈 아버지를 돌보는 어머니의 억척스러움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 마음을 숨기고 성년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반항하고 싶은 10대였지만 그렇게 억누르며 보냈다.

술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첫 잔은 고3 학력고사가 끝난 12월 어느 날이다. 친구가 집에 술을 준비하고 나를 초대했다. 한 잔으로 그 자리는 끝났지만 머리가 빙빙 돌던 기억은 지워지지 않고 강렬하게 남아있다.

 

이후 대입에 실패한 나는 동네에 있던 방위산업체에 다니면서 일이 끝나면 동료들과 술을 마셨다. 취한 동료가 진열장 유리를 몸으로 깨고 들어가는 모습도 보았고 술 마시고 싸우는 동료를 말리려다가 병으로 어깨를 맞아 찢어지는 상처를 입기도 했다. 처음 겪는 격렬한 사건들이었다. 부모님이 아실까 두려워 집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내 꼴을 봐줄 만하다. 이렇게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나를 걱정하는 부모님께 죄스러운 마음이 있었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술의 양이 본격적으로 늘기 시작한 건 군복무 시절이다. 점호가 끝나면 침상 밑에 늘 대기하고 있던 술을 꺼내 내무반 전체가 물컵으로 마셨다. 강제성이 있었지만 난 즐기고 있었다. 제대 후 사회생활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일과가 끝나면 술을 마시는 게 일상이었다. 그리고 걱정하는 부모님의 말씀이 잔소리로 들려 대들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커지고 화를 이기지 못해 주먹으로 벽을 치고 대문 옆에 있던 화장실 유리창을 손으로 쳐서 12바늘을 꿰매기도 했다.

 

올바른 이성이 작동하지 않았다. 옳고 그름 없이 무의식에서 올라오는 감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한 잔으로 시작된 술이 어느새 3차까지 가서는 필름이 끊겨 길거리에서 팬티만 입은 채 깨어난 적도 있었다. 고작 서른을 시작하는 나이였다. 아마 이때부터 중독이 시작됐다고 생각된다. 거의 매일 마시기 시작했으니까.

 

부모님과의 갈등은 점점 심해져 결국 따로 살자 선언하셨고 부모님은 서울을 떠났다. 그런데도 나는 그런 결정이 부모님 때문이지 나의 행동 때문이라고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홀로 떨어져 생활하는 동안 부모를 원망하며 술병을 기울였고 어떤 날은 직장상사 때문이라고 또 어떤 날은 세상이 나를 몰라준다고 술을 마셨다. 쉬는 날은 심심해서 TV를 보면서 마셨다.

 

몸에서 술기운이 빠져나가지 못하고 늘 축축하게 젖어 있도록 술을 마셨다. 화장실 가는 것도 귀찮아 주방 싱크대에 소변을 보기도 하고 자면서 침대에 그대로 싸기도 했지만 부끄러운 마음도 없었기에 청소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술이 떨어져 술을 사러 자전거를 끌고 가다가 골목길에서 자빠지고 나서야 조금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이러다 죽겠다고...

 

이런 모습을 보게 된 어머니는 집으로 가자고 설득하셨다. 그래도 살겠다고 뻔뻔하게도 순순히 응했다. 부모님과 생활하면서 술을 끊고 운동도 하고 어머니가 차려준 밥도 거르지 않고 잘 먹었다.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고 정신도 맑아졌다. 그러나 다시 일하면서 잠이 잘 오질 않는다는 핑계로 한 병씩만 마시기로 약속했고 얼마 간은 그랬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아 두 병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부모님에 대한 원망은 없었다. 나를 살려주셨기에...

 

몇 년은 그래도 평화롭게 흘러갔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태어났다. 하지만 고부간 갈등이 빚어졌고 문제는 점점 복잡해졌지만 해결책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술을 찾았다. 수레바퀴처럼 다시 술이 나를 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내와의 갈등 역시 술이 주범이었고 부모님과의 갈등 역시 술이 주범이었다. 왜 이때는 몰랐을까? 술이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을. 후에 `중독성 사고라는 책을 보니 이에 관련된 비유가 잘 되어있었다. (p59 중독자의 난독증)

 

결국 부모님과 분가했다. 갈등을 피하려고 그런 것이었지만 술은 내 곁에 있었다. 난 너 때문에 마실 수밖에 없다고 계속 외쳤다. 술로 한 달에 한두 번은 결근하고 아내는 내 대신 회사에 아프다는 핑계를 대야만 했다. 급기야 필름이 끊긴 상태로 아내를 죽이겠다 협박했고 두려움에 휩싸인 아내는 경찰을 불렀고 나는 구급차에 묶여 병원으로 실려 갔다. 이 사건이 내가 처음 입원하던 11년 전 일이다. 병원에서 한 달을 보내고 퇴원한 이후 A.A.모임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많다는 것에 놀랐고 위안이 되었다.

 

본격적으로 술에 대한 해결책을 찾으려고 알코올 전문병원에서 보호사로 일했다. 그러나 절주는 되었지만 단주는 이루지 못했다. 처음부터 나를 지켜보던 선생님께서 입원을 하라고 권했지만 많은 알코올 환자를 보면서 나는 절주할 수 있다는 자만심을 키워가고 있었다. `왜 그들은 못 하지?‘하는 허무맹랑한 생각만을 가지고 있었다. 밤 근무가 끝나면 낮에 잠이 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내의 동의를 억지로 끌어내 술을 마셨다. 그러다 결국 술에 취해 출근하지 못해 잘리는 신세가 되고야 말았다. 이것이 보호사로 근무한 18개월의 기록이다.

 

알코올 병원이라는 족쇄가 풀리자 나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다. 퇴근하고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운전하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술은 음주 후 뺑소니까지 저지르게 만들었다. 다시 단주하리라 마음먹고 스스로 병원에 입원해서 9개월을 보냈다. 그러나 잘 될 것 같은 마음과는 달리 갈 길이 멀었다. 결국 단주 3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술을 마셨다. 이제는 이유도 없었다. 그럴듯한 이유도 없이 그냥 어쩔 수가 없었다.

 

결혼해서 사는 동안 술을 끊겠다고 아내에게 써준 각서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나열할 수도 없다. 입만 열만 거짓말이었고 나 자신도 스스로에게 질려 거짓말하는 것도 싫었다. 그냥 죽고 싶었다. 술 한 병만 마시겠다고 아내가 일하는 일터에 찾아가 애원하기도 하고 협박하기도 하고... 새벽에 눈을 뜨면 집에서 멀리 떨어진 24시간 마트까지 걸어가 술을 사서는 바로 반병을 꿀꺽 마셔야 편안해지고 숨이 쉬어졌다. 그리고 후회. 아내와 마찰...

 

물병에 술을 부어 길거리에서 버젓이 마시는 짜릿함도, 운전하면서 술을 마시는 전율도, 화장실에서 토사물을 확인하고 다시 조금씩 목으로 흘려 넣어야만 했던 비참함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나가서 술 먹다 죽어버리라는 아내의 절규에 그러겠다고 술과 수면제 수십 알을 먹었다. 깨어난 것은 병원 중환자실. 퇴원하는 날 점심에도 술을 마셨다. 아내는 지쳐 화도 내지 않았다. 다음날 법원으로 가서 합의 이혼을 작성했고 난 또 술을 마셔 병원에 입원했다. 어떻게든 이혼은 피하고자 입원했지만 도무지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병원에서 개방 과정을 수료하고 재활까지 끝나면 술문제도 끝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중독 관련 책을 통해 그렇구나이해했다고 생각만 한 것이다. 원장님 수업에서 회복은 단주+변화다. 그 변화는 실천이었다. 습관을 만들기 위해 책, 모임, 일기를 적어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기질적으로 지속성이 부족했다. 성격은 변화될 수가 있지만 기질은 어렵다고 한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만 싶었다. 술에 지쳤다.

 

그래도 이혼만은 피하고 싶었다. 혼자 산다는 것은 내게 곧 죽음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아내의 잔소리 없이 술을 멀리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내가 살기 위해 이혼은 불가능했다. 그러려면 술을 끊어야만 했다. 그리고 술을 끊으려면 실천해야 했다. 술을 마시지 않는 알코올 중독자로써 내가 살아야만 하는 길이 이 길밖에 없다는 것에 눈물이 났다.

 

더는 이렇게 살아선 안 된다는 의지가 다시금 나를 모임으로 이끌었다. 모임에서 감춰왔던 나를 끄집어낼수록 홀가분해졌다. 자유를 찾은 느낌이 들었다. 과거의 난 술 마시는 모습을 감추기 위해 얼마나 애썼던가. 또 그 부작용을 덮으려고 아니라고 얼마나 부정했던가. 나를 드러낼수록 이렇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술에 취해 있던 시절, 새벽에 잠에서 깨어 일어나면 고작 화장실에 갈 뿐인데도 아내가 벌떡 일어나 도끼눈을 한 채 어디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아내가 코를 고는 소리를 들어본 기억이 없다. 지금은 내가 새벽에 깨도 일어나지 않는다. 코고는 소리도 들린다. 아내의 코고는 소리가 나를 미소짓게 하고 행복을 느끼게 한다. 지금도 조바심을 느낄 때가 있고 분노가 파도처럼 밀려올 때도 있다. 다만 그런 나를 인정하고 토닥토닥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