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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마시지 않을 때의 즐거움
등록일 2021-02-09 조회수 692 이름 다사랑
첨부파일 2020환자회복수기_썸네일.jpg

[2020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우수상]

 

마시지 않을 때의 즐거움

 

○○

 

엄마, 예전에 엄마 술 마실 때 내가 침대 밑에 숨겨 놓은 용돈 몰래 꺼내서 마셨던 거 기억나?” !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고 술 마실 때였다면 한 잔 마시고 변명이라도 해볼 텐데... “그런 적도 있었남? 엄마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나네. 미안해 딸.” 정말로 기억이 없다.

 

어디 기억 못하는 일이 그 뿐이겠는가. 아빠 닮아서 술 마신다는 소리가 듣기 싫어 28살 때부터 소주를 글라스에 마셨고 이후 거의 매번 필름이 끊어진 것 같다. 술이 센 편이라 많이 마셔도 얼굴색하나 안 변하고, 발음도 꼬이지 않고 같이 술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뒷정리까지 깔끔히 하던 나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술친구들과 헤어지고 난 후 내 손에는 소주 3병이 든 검정봉지가 들려져 있었다.

집에 도착하면 조용히 방에 들어가 딸들에게 들릴까 수건으로 뚜껑을 따고 병째로 꿀꺽꿀꺽 술을 마셨다. 그 많은 술로도 나는 깊이 잠들지 못했고 새벽이 되면 취한 정신과 몸을 이끌고 가게에 나갔다. 새벽부터 가게에 출근한 나는 직원들이 해야 할 일을 미리 해두었다. 직원들이 할 일까지 하는 부지런한 사장으로 인정받으며 술을 마셔도 괜찮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던 것 같다.

 

일을 마치고 가게를 나서면 동네 주태백들을 만나 대장 노릇을 하느라 술값 내는 통큰 여사장 흉내를 내고 멀쩡한 척 집으로 돌아가지만 다음 날 기억이 없다.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마찬가지다. 내일은 정말 마시자 말아야지 다짐하고 또 다짐해도 아침이면 똑같이 반복된 하루를 살았다.

 

! 젠장, 나도 진짜 똑같네.’

내가 술을 마시고도 멀쩡한 척했던 이유는 알코올 중독자인 우리 아빠(본인이 모임서 알코올중독자라고 했다)처럼 살고 싶지 않아서였다. 돈은 벌어오지 않고 평생 술만 마시며 어린 자식들에게 술값도 안주고 술을 사오라고 쫒아내던 아빠. 사오지 않고 학교로 도망가면 학교에 쫒아오고,때리고, 살림살이까지 부수며 온 집안을 지옥으로 만든 아빠처럼 절대 살고 싶지 않았다.

한 번은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친구가 어릴 적 내가 벙어리인줄 알았다고 말했다. 사실 당시 나는 아빠가 언제 학교에 쫒아올지 몰라 친구들 무리에 끼지도 못하고 고개 숙이며 지냈고, 남의 집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어른들의 입방아에 오르기 싫어 더 좁은 골목으로 숨어 다녔다. 그냥 누가 말을 시킬까 두려워 아예 말을 하지 않는 아이였다.

 

성인이 되면 사는 게 좀 나아질 줄 알았는데 육남매 중 남동생과 여동생 하나에게 술문제가 생겼다. 아빠와 남동생 그리고 여동생이 술에 취해 칼을 휘두르며 싸우는 날이면 평생을 남편 때문에 온갖 고생을 한 엄마도 겁에 질려 멀리 시집 간 나에게 다급히 전화를 하곤 했다. 다행히 당시에는 술을 조절하며 마실 수 있던 때라서 나는 차를 운전해 친정으로 갔고 먼저 남동생에게 맞고 있는 아빠를 몸으로 감싸며 피신시킨 후 119112에 전화해 상황을 마무리했다.

밤을 꼬박 새워 벌어진 일들을 정리하고 다시 운전해 집으로 돌아간 후에는 남편에게 엄마가 갑자기 아파 응급실에 가느라 말도 못하고 갔노라고 거짓말했다. 창피해서 도저히 처제와 처남이 장인이랑 칼싸움을 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런 일이 한 달에 2~3번씩 벌어졌고 그때마다 오는 엄마의 전화에 나는 거짓말로 남편을 속이고 친정으로 향했다.

 

내가 술을 마시면서도 긴 시간을 악착같이 버틴 이유는 바로 평생 고생한 엄마다. 나까지 잘못된다면 정말 엄마가 죽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코올 중독은 진행성 질병이었다. 아침마다 엄마와 아이들을 위해 마시지 말자고 다짐해도 저녁이면 나는 취해있었고 그런 스스로가 한심해 또 술잔을 들었다.

 

간 수치가 오르자 큰 병원에 가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서울 큰 병원을 다녀오는 차 안에서 배가 고프다며 엄마를 속여 식당에 가서 술을 마셨다. 결국 침대에 누워 술을 마시는 지경에 이르렀고 급기야는 그 불쌍한 엄마에게 폭력까지 휘둘렀다. 물론 기억은 없다. 엄마는 그런 나에게 간 수치만이라도 떨어뜨리고 나오면 다시 몸을 챙겨가며 술을 마시면 되니 알코올 전문병원에 입원하자고 설득했다. 엄마에게 한 짓이 미안해 알겠다고 했다. 어쩌면 내 맘속에서 더는 버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는지도...

 

그렇게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했고 알코올 중독에 대해 많이 듣고 배웠다. 그래도 그건 내 이야기가 아니라고 부인했다. 내가 평생 술을 마시면 안되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는 말에 심장이 멈추는 느낌이 들었고, 숨을 못 쉴 정도의 답답함이 밀려왔다. 인정하면 절대 안될 것 같았다. 그리고 억울했다. 나는 경제 활동도 했고 엄마한테 폭력을 휘둘렀지만 그것이 문제라면 나보단 동생들이 입원해야 맞다고 생각했다. 간 수치만 떨어지면 빨리 퇴원해서 불쌍한 엄마를 도와야 된다고 생각했다.

 

상담사 선생님이 병원 안에 있는 A.A.모임에 나가보자고 하셨다. 처음 나간 A.A.모임은 충격적이었다. 나보다 더 딱한 사람들도 많았고 아빠에게 더 많이 시달린 사람도 많았다. 그렇게 험하게 살아온 인생을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다니! 저들은 창피하지도 않은가? 심지어 심한 욕도 서슴없이 해댔다. 대리만족인지 내 속이 다 시원해졌다. 그리고 이 사람들에게는 내가 평생 살아온 이야기를 해도 될 것만 같았다.

이후 아침 일찍 병원에서 외출을 나오면 하루 종일 모임만 찾아다녔다. 모임 안에서는 쉼 없이 내 속의 이야기를 쏟아놨다. 심지어 오래된 멤버 선생님은 그런 나에게 정직하다고 했다. 그것이 나를 칭찬하는 소리 같아 기분이 좋아져 더 많이 경험담을 하고 다녔다.

그즈음 인천에서 12일로 진행되는 큰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가족 중 알코올 중독자가 있는 아이들이 모인 알라틴 모임에서 한 아이가 자신의 경험을 얘기했다. 그 아이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울면서 말했다. 두려웠고, 무서웠고, 도망가고 싶었고, 누가 말려줬으면 좋겠다고...

 

어릴 적 내 마음의 소리였다. 나도 어릴 적 엄마가 우릴 버리고 도망 갈까 두려워 하기 싫지만 힘든 집안일을 했었고, 술을 안 사온다며 재떨이를 던지고 낫을 들고 쫒아오는 아빠를 피해 도망갈 곳이 없었다. 심지어 어린 동생들까지 건사하다 보니 매는 항상 내 몫이었다. 그때를 떠올리니 눈물이 쉬지 않고 흘렀다.

 

울다울다 문득 집에 있는 두 딸이 생각났다. 내가 또 다시 술을 마시면 우리 아이들도 나처럼 삐뚤어진 시각으로 힘든 삶을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알코올 중독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술을 평생 못 마신다는 두려움보다 더 큰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만 둬야겠다.’

그 뒤로 나는 내 생각들을 접어두고 술을 안 마시려는 사람들만 만나러 다녔고, 안 마시려는 사람들의 제안대로 행동했다. 모임에 봉사를 오라면 로 답했다. 퇴원 후 지방의 집으로 내려갔으나 지역에는 모임이 없어 첫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모임을 참여한 후 막차를 타고 돌아갔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어쨌든 내 뜻대로 살다가 망가진 삶인데 또 마음대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감사하게도 술을 마시지 않으니 작은 딸이 나처럼 불편한 성격이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모임에서 들은 대로 나는 아이를 어쩔 수 없지만 누군가의 도움은 받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주변에 도움을 청해 서울과 춘천, 부천, 천안에 있는 알라틴 모임으로 아이를 데려갔다. 지금은 아이가 많이 편안해져 대학에 들어갔고, 사회복지를 전공으로 공부하고 있다. 아이의 꿈은 자기처럼 힘들었던 아이들을 돕는 거란다. 모임에서 어느 멤버 선생님이 그런 말을 했다. 술을 마실 때보다 마시지 않을 때의 즐거움이 더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마시지 못한다고...

 

알코올 중독자는 알코올 중독자를 느낌 적으로 알 수 있다. 병원에 입원하기 전 집에서 몇 달을 나가지도 못하던 어느 날, 혹시 집에 숨겨둔 술이 있나 비틀거리며 찾아 헤매다 다시 침대에 기어들어와 누워있었다. 그런데 그때 나만큼이나 술에 찌들어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아빠가 미친년이라는 말을 하고는 본인이 아끼던 소주 한 병을 내 머리 맡에 놓고 가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늘 내 걱정에 잠 못 자던 엄마보다 중독자 아빠가 내 마음을 더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퇴원 후 몇 해가 지난 지금, 술문제가 있던 남동생은 식구들을 모두 빚더미 위해 올려놓고 사라졌고 여동생은 6개월을 목표로 알코올 전문병원에 입원 중이다. 나는 마시지도 못하고, 안 마시지도 못하고, 무섭고 두려웠을 나의 사랑하는 여동생 귀에 어느 선생님의 귀한 단주경험담이 전달되기를 매일 기도드린다. 그리고 지금까지 평온하게 살 수 있게 도와주신 A.A.모임 멤버 선생님들과 하나님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