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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혼자가 아닌 함께
등록일 2021-02-09 조회수 897 이름 다사랑
첨부파일 2020환자회복수기_썸네일.jpg

[2020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최우수상]

 

혼자가 아닌 함께

 

○○

20175? 나는 다르다 -

 

정신을 차린 나는 우선 상황부터 파악했다. 분명히 밀양강 주변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낯선 곳에서 정신을 차린 것이다. 하얀 환자복이 우선 눈에 들어왔고 팔에 바늘이 꽂혀 있는 것을 보니 병원이 확실했다. M병원인가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고 복도에 나오자 무엇인가 단단히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고 복도에는 온통 환자복 입은 사람들 밖에 없었다. 데스크로 가자 보호사라는 분이 설명해주셨고 이곳이 알코올 전문 병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무엇보다 여기가 밀양이 아닌 경기도 의왕시라는 것에 놀랐다.

 

분명 멀쩡하게 상담까지 받고 입원 수속을 다 했다는데 기억이 하나도 없었다. 정신을 수습한 후 병원 구경을 다녔다. 원래 벌어진 일에는 크게 후회하고 집착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폐쇄 병동이 있다는 것이 또 알코올 전문 병원이 존재한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냥 술을 마신 후에 나타나는 몸의 이상 징후들이 조금 더 심각해지면 내과나 한번 가봐야겠다 생각했지 병원에 입원할줄 꿈에도 몰랐다.

 

단체 생활은 익숙해서 그다지 거부감은 안 들었지만 운영하던 학원 걱정이 됐다. 그렇게 나의 첫 번째 병원 생활을 시작했다. 딱히 힘든 일은 없었다. 다만 학생들의 대학수학능력시험이 걱정됐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3년간 우리 학원에서 함께 공부하며 수능까지 보게 되는 학생들과 끝까지 함께 하고 싶었다. 주변에서 주워들은 이야기로 보호자 동의가 있어야 퇴원이 가능하다고 했는데 우리 부모님 성향상 병원 프로그램을 모두 마쳐야 퇴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충 날짜를 헤아려보니 간신히 시험 100일 전에는 복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퇴원을 빨리 해야겠다는 생각에 병원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머릿속에는 온통 퇴원 생각으로 가득 차있었다. 병원 프로그램을 예정대로 끝내야 했고 중간에 어떤 변수도 생겨서는 안됐다. 그 당시 나는 병원에 있는 사람들과는 달라. 나는 그냥 하루 폭주했을 뿐이야, 너무 힘들게 일했어. 좀 쉬러 왔다 생각하자. 쉬면서 운동도 좀 하고 어차피 병원에 있으면 술을 못 마시니 끊어버리자.’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이 나올 정도로 심각성을 몰랐다.

 

20179? 좌 절 -

 

다사랑중앙병원에서 대학병원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온통 한 마디를 생각하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그동안 수고했다, 많이 아팠지, 이제 편히 쉬어라, 사랑해, 미안해, 고생했어 등 동생의 마지막 가는 길에 해주고 싶은 말을 생각해내려 애써 보았지만 울음만 나왔다. 내 동생은 2개월 전 술 문제로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했다. 3일 만에 몸상태가 너무 안 좋아져 대학병원으로 이송됐고 두 달간 응급실에 입원해 있었다. 오늘을 넘기기 힘들다는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엄청난 죄책감과 후회, 슬픔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온통 머릿속에는 동생과 술 마신 기억밖에 없다. 내가 동생을 죽이려고 그렇게 같이 술을 마셨구나, 동생 죽인 미친 새끼, 형이 그리 술을 처먹으니 동생도 술을 그렇게 마시지. 등등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렸다. 더욱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동생이 누워있던 응급실 침대를 보면서 두려움이 밀려드는 것이었다. 동생 대신 내가 그 침대에 누워있는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평소에 언제든지 동생을 위해 목숨도 내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살았었는데 순간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두려움을 느끼는 내 자신이 증오스러웠다. 가증스러웠다. 죽고 싶었다.

 

2017911일 오후 9:26분 동생은 죽었고 내 마음도 죽었다. 장례식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상주라는 자리가 참 힘든 자리였다. 오시는 분들마다 모두 나를 욕하는 것 같았다. 나는 단지 동생을 죽인 형이였다. 사형 집행일을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묵묵히 장례식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차라리 대성통곡하고 싶었다. 쓰러져 오열하며 동생의 죽음을 슬퍼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죄인이다. 장례식이 끝나는 순간까지 울지 않았다. 죄책감이 장례식장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있는 슬퍼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아 갔다.

 

하지만 화장터에서 동생의 유골함을 받고 난 후 돌아오는 버스에서 울음이 터졌다. 유골함을 처음 받았을 땐 뜨거워 놓칠 뻔했다. 동생은 얼마나 뜨거웠을까? 죽고 싶었지만 부모님이 생각났다. 아들 하나를 잃으시고 이제 하나밖에 안 남았다. 그런데 하나밖에 안 남은 아들이 정신병자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었다. 술로 현실에서 도망갔던 것처럼 죽음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그래서 부모님보다 하루만 더 살기로 결심을 했다. 죄인으로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자고 결심했다.

 

동생의 뼈를 산에 뿌려줄 때 다짐했다. 내가 다시 술을 마신다면 개라고..

 

201711- 더 깊은 곳으로 -

 

모든 것을 다 잃었다. 동생이 죽은 지 2개월 후, 병원에서 퇴원한 지 3. 학원을 정리하고자 밀양으로 내려왔다. 세상에 얼마 안 남은 내 편이라고 생각했던 동업자들과 밤새 책임 공방을 펼쳤다. 어차피 정리하려고 간 길이였지만 너무 서러웠다. 언제 또 경상남도에 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남해로 향했다.

 

남해 독일마을은 학원을 창업했을 때 놀러와 동업자들과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곳이다. 펜션에 처음 들어갈 때 두 손에는 탄산수와 몇 가지 간식거리가 있었다. 배불리 먹고 일찍 자야지 하는 생각에 챙겨갔다. 병원에서 퇴원한지도 얼마 안 됐고 술을 마실 생각은 전혀 없었다. 텔레비전을 보다 잠들었고 눈을 떠보니 새벽 1시였다. 바닷가라도 구경하자 하고 나갔고 돌아오는 길 두 손에는 소주가 들려있었다.

시원하게 마시고 죽자. 어차피 서울에 가도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나 같은 자식은 차라리 없어져 주는 것이 효도하는 거야하는 미친 합리화가 시작됐다. 지금 생각해 보니 술 마시려는 핑계였을 뿐이었다. 그 후로 10일 동안 흔히 말하는 장취라는 것에 빠졌다. 마치 영화에서 나오는 좀비처럼 생활했다. 아무 생각 없이 오직 술만 찾아 마셨다. 방에서 하루에 10병이 넘는 소주병이 매일 같이 계속해서 나오자 모텔 주인도 걱정이 됐는지 믹스커피 한 박스와 귤 몇 개를 주시면서 아저씨 안주도 좀 먹어가면서 마셔요. 몸상해요.”라고 하셨다. 고마웠다.

 

고마운 마음이 드는 순간 주변 상황이 신경쓰였다. 부모님은 어쩌고 계실까, 학생들 시험은 잘 봤을까 하는 생각들이 들었다. 그러다 새벽에 한 아저씨의 울음소리에 잠을 깼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돌아가신 어머님이 생각이 나서 운다는 인터뷰 소리를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동생 화장터에서 오열하시던 부모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우나에 가서 목욕을 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아버지께 죄송하다, 병원에 다시 입원하겠다고 말씀드리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병원 치료진들을 볼 면목이 없어서 술은 깨고 입원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엄청난 금단에 시달렸다. 이불을 아무리 덮어도 추웠고 몸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왔다. 죽은 동생의 시퍼런 얼굴이 눈앞에 떠다녔고 목을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로 갈증이 들었다. 재음주를 하게 된 나에게 남은 것은 죽을 죄를 지은 죄인이라는 죄책감과 자기혐오, 그리고 알코올 중독자라는 주홍글씨뿐이었다.

20181? 혼자가 아닌 함께 -

 

그렇게 두 번째 병원생활이 시작됐다. 다사랑중앙병원은 이제 익숙한 곳이고 편안한 곳이었다. 무엇보다 술 생각과 떨어져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치료진들도 모두 잘해주셨고 같이 입원해 있던 형, 동생들과도 친했다. 같이 운동도 하고 교육도 받으며 술의 갈망을 이겨나갔다. 동생 장례를 치르면서 다짐했던 단주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컸는지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고, 동생을 떠나보낸 후 바로 이어진 재음주 때문에 스스로가 알코올 중독자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혼자는 술을 끊을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퇴원일이 가까워지면서 걱정이 됐다. 병원이라는 보호막이 없어지면 또 술을 마시겠지 하는 두려움이 생겼다. 또다시 술을 마신다면 이젠 확실하게 죽음을 선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앞으로는 동생을 죽인 형으로 죄인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래야 죽어서 동생 얼굴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술이다. 자신이 없었다. 무엇이든 해야 했다.

 

병원 수업 시간에 배운 것들을 이용해보기로 했다. 우선 잡념이 들지 않게 바쁘게 생활하자라는 생각에 개방 병동에서 규칙적인 생활과 운동에 집중했다. 성인이 된 후 80kg 밑으로 내려가 본 적이 없던 몸무게는 어느새 70kg초반이 되어있었다. 새벽에 운동을 하고 낮엔 병원 수업을 듣고 밤엔 A.A.모임을 나갔다. 딱히 A.A.모임이 좋아 참석한 것은 아니다. 밤에 병원에 누워있어 봤자 잡념만 들었다. 그러다 혹여 잠이라도 들면 새벽에 깨어나 온갖 생각에 길고 괴로운 밤을 보낼 것이 뻔했다. 그럴 바에는 모임이나 참석하자 하는 마음으로 다녔다.

 

병원에서 퇴원하고 A.A.모임 생활이 시작됐다. 오전에 운동을 하고 3, 5, 730분 모임을 다녔다. 처음에 가장 힘들었던 것은 역시나 사람을 사귀는 일이었다. 원래 낯을 좀 가리는 스타일인데다 여러 가지 일들로 의기소침해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접근하기가 힘들었다. 경험담이라도 자주하면 사람들과 금방 친해진다던데 그것 마저도 쉽지 않았다. 경험담을 한 번 하면 집에 돌아가서 악몽을 꾸고 가위에 눌리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우선 경험담은 포기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방법을 생각해봤다. 모임이 끝난 후에는 여러 가지로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모임 1시간 전에 도착해 준비를 돕는 것이었다. 사람들도 별로 없고 그룹에서 봉사하시는 분들과 개인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봉사자분들과 친해졌고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다른 멤버 선생님들과도 어울리게 됐다. 이후 경험담도 가끔씩 할 수 있게 됐다. 처음에는 아무래도 동생에 대한 트라우마가 심했기에 동생에 대한 경험담을 주로 했다. 가족의 죽음을 겪은 멤버 선생님들께서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나처럼 알코올 중독 때문에 가족을 잃은 경우가 무척 많았다.

 

경험담엔 신기한 힘이 있다. 다른 사람의 경험담을 듣다보면 그 사람과 굉장히 오랫동안 만나왔다는 착각이 든다. 공감의 힘일까? 어느샌가 모임 시간이 기다려졌고,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스케줄이 A.A.모임이 되었다. 후원자도 생겼고 후원자의 제안으로 3개월이 지난 후 바로 사회봉사를 시작했다. 사회봉사 덕분에 사람들과 더욱 잘 어울릴 수 있었다. 모임을 진행하며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눈을 마주치게 됐고, 먼저 알아봐주시고 인사해주시는 멤버들도 많아졌다.

 

후원자를 처음 만났을 때 나에게 해주신 말씀이 있다. “선생님, 모임에 다닐 수 있는 여지를 많이 만들어 두세요.” 이 한 문장은 모임 생활을 유지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사람들 마다 모임에 나오는 이유가 각자 다르다. 봉사를 맡아 책임감을 갖고 소속감을 느끼며 다니는 사람들, 멤버들과 맛있는 식사를 하러 오는 사람들, 이야기를 하러 나오는 사람들, 당구를 치러 오는 사람들 등등 모임에 다니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존재한다.

 

이런 이유들이 모임에 참석 하게 되는 여지가 되고 이런 여지들이 모여 모임 생활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게 해준다. 항상 즐거울 수는 없지만 적어도 술 마실 때의 아비규환 속으로 되돌아가진 않을 것이다. 하루하루 자신이 모임에 참석할 이유를 만들면 된다. 꼭 이유가 하나일 필요도 없다. 정답은 없다. 하지만 목적은 하나다. 우리는 오늘 하루 술을 안 마시기 위해 모인다. 그리고 나는 알고 있다. 나는 혼자 술을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읽어주신 선생님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