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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인생은 채우고 또 비우는 과정의 연속
등록일 2021-02-09 조회수 1197 이름 다사랑
첨부파일 2020환자회복수기_썸네일.jpg

[2020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대상]

 

인생은 채우고 또 비우는 과정의 연속

 

○○

 

안녕하세요. 올해 43세인 알코올 중독자 김입니다. 2009년 다사랑중앙병원 첫 입원을 시작으로 2020년 현재까지 병원에서 회복을 기대하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11년 동안 병원을 오가며 짧게는 1개월에서 길게는 26개월까지 술을 안 마시고 지내봤지만 그 기간들은 병원이란 울타리 안에 있었기에 아직 퇴원 후 단주 1년을 넘겨보지 못한 만성 초심자입니다. 저같은 환자를 중독자들 사이에선 병원 의존에 걸렸다고 말합니다. 병원 안에서는 2년 동안 술을 먹지 않았지만 퇴원 후에는 1년을 버티지 못하고 다시 입원을 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이 굴레를 벗어나고 싶어 저의 10년의 시간을 정리해 봅니다.

 

2007, 어머니께서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어릴 적부터 의존 성향이 짙었던 저는 어머니에게 의존하던 마마보이였습니다. 아버지가 무서워 어머니에게만 의존하면서도 어머니의 말은 잘 듣지 않는 청개구리였습니다. 2006, 어머니의 암 선고 이후 6개월 동안 병간호를 했지만 어머니의 건강이 아닌 저에게 어머니가 필요해 마지못해 했던 일이었습니다. 저는 평소에도 술을 많이 마셨던 터라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의 부재에 당황한 제가 마음을 달래고자 다시 술병을 드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와 형에게 의존해 살아보자는 생각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내세워 방에 틀어박혀 술을 먹었습니다. 우선 같이 살던 아버지가 대상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께서 폭언과 폭행으로 격한 감정을 표출하셨지만 저는 아랑곳 하지 않고 시내에 월세 방을 얻어 술을 먹었습니다. 형이 제 친구들에게 수소문해서 찾아내기 전까지 저는 그렇게 개·돼지처럼 살았습니다.

 

20091, 형은 저를 이곳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시켰고 그렇게 의왕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처음 입원했을 땐 크고 깨끗한 시설 그리고 학교처럼 교육을 한다는 것과 같이 생활하는 사람들이 멀쩡하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집안 가족 중 알코올 중독자인 삼촌이 정신병원을 다니셨는데 그때 들은 것과 내가 들어온 이곳과는 분명 차이가 있었습니다.

 

관리병동 생활이 적응될 무렵 상담사가 개방으로 가볼 것을 권유했고 처음엔 거절했지만 내려가면 밖으로 산책도 가능하다기에 알았다고 했습니다. 개방으로 내려가려면 1단계 발표를 해야 한다기에 연극으로 가족과 치료진에게 단주 각오를 보여준 뒤 더 자유로운 개방병동으로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산책을 갔을 때 슈퍼에 들러 소주병을 봐도 그렇게 갈망이 오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제 성격상 남들보다 튀는 행동을 잘하지 않는 성격이어서인지 그런 상황은 쉽게 넘길 수 있었습니다.

 

개방병동 9주 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원내에서 3개월 동안 재활을 했습니다. 처음 병원 생활에서 원내 재활까지 하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라고 주위에서 추켜세웠지만 사실 저에게 돌아갈 집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만의 집에서 생활했고, 형은 형의 집에서 생활했기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제가 갈 곳은 없는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재활의 목적은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생계유지를 하는 것이 제가 재활을 하는 목적이었습니다. 별다른 기술이 없었기에 젊음을 믿고 막노동을 시작했습니다. 힘들었지만 병원 환우들 속에 끼어 몇 달을 다녔고 퇴원할 즈음 월세보증금 정도를 모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퇴원을 했습니다.

 

하지만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다시 입원해야 했습니다. 병원에서는 잘 참고 하던 일도 병원 밖에서 해보니 쉽지 않았습니다. 잘하면 잘한다, 못하면 못하다 반응이 있어야 하는데 막노동에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새벽같이 일어나 직업소개소를 거쳐 일을 구한 뒤 일을 하고 돌아온 집은 찬바람만 맴돌았습니다.

 

그래도 먹고 살아야 했기에 십여 일을 나갔지만 돈의 여유가 생기자 생계보다는 공허함을 메우려는 욕구가 거세게 일었습니다. 욕구충족 뒤로 생계 일을 미루는 행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거기에 알코올을 더하니 생계고 뭐고 살아가는 것까지 부정하기 시작했습니다. 끼니를 대신해 술을 먹었습니다. 배는 별로 고프지 않았지만 술이 필요했고 술만이 때때로 찾아오는 신체적, 정신적 허기를 채워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다시 형이 나를 발견하고 또 입원을 시켜주었습니다. 다시 입원하자 담당 상담사가 왜 술을 먹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나는 돌아가신 어머니 핑계를 대고 있었습니다. 예전 교육에서 들은 것을 기억해내 입원 시기가 어머니 돌아가신 시기와 겹쳐 심적으로 우울해서 마셨다고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그 당시엔 그런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밝혀 낼 수 없는 핑계일 뿐이었습니다. 그런 핑계와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고 재활로 다시 왔습니다.

 

저는 저번과 똑같이 또 급한 대로 막노동을 시작했고 그렇게 원외 재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생겼습니다. 제가 믿고 있던 제 몸에 이상이 생긴 거였습니다. 몸에 생긴 이상으로 급기야 수술을 받아야 했고 그 후로는 막노동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수술 후 병원의 배려로 재활 병동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몸을 회복하는데 무려 1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몸을 회복하는 1년의 시간 동안 아버지께서 병원비를 부담해 주셨습니다. 그냥 돈을 받는 것이 마음에 걸려 1년 과정의 기술 학교를 다녔습니다. 하지만 몸이 회복이 되기 전에 매일 학교에 다녔던 것이 저의 몸에 약간의 장애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매월 나오는 병원비와 생활비는 아버지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아버지의 목소리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1년간 학교에서 배울 기술을 토대로 직장을 구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고, 저는 배운 것과 전혀 다른 직종에서 직업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병원에서 출·퇴근을 하면서 퇴원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퇴원 준비라는 것은 내가 나가서 살 집을 구하기 위해 돈을 모으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치료진이 A.A.모임을 권유하면서 퇴원 후 단주와 회복에 대해 가르쳐주셨지만 건성으로 대답하고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새로 얻은 직업은 예전 막노동과 전혀 달랐습니다. 내 노력에 대한 성과도 분명했고 병원에서 생활하며 술도 마시지 않고 착실히 다니니 빠르게 승진해 퇴원 할 무렵에는 회사에서 중요한 직책까지 올라갔습니다. 퇴원 할 무렵에는 전보다 훨씬 좋은 집에, 열심히 일할 회사까지... 이제 병원생활은 그만하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퇴원 후 직장을 다니면서 회사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술이 두려워 망설였지만 회사 내 제 위치와 높은 급여가 저의 눈을 멀게 했습니다. ‘내가 저들보다 훨씬 뛰어나고 잘나가는데 이깟 술 한 잔 정도야하며 회사 사람들과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음주가 계속되자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술만 찾아다녔습니다. 경쟁사회에서 술에 정신이 뺏기자 도태되는 것은 한순간이었습니다. 실적이 미미하자 회사의 압력은 저 같은 중독자가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내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꽤 괜찮은 모습으로 퇴원을 했었기에 다사랑중앙병원을 다시 간다는 것이 내키지 않아 일반 병원에 잠시 입원을 해보았지만 그때뿐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술만 먹은 게 아니라 수면제를 같이 먹었습니다. 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환시와 환청에 시달렸고 급기야 제 손으로 112에 신고해 경찰이 찾아오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달리자 제 발로 다사랑중앙병원으로 찾아가게 되었고 다시 병원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증상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1단계를 인정하게 되었고 나름 진실 된 1단계 발표 후 개방으로 내려왔습니다. 개방 9주 동안 병원 근처에서 진행되는 A.A.모임에 참석했지만 모임 속에 완전히 녹아들지 못해 한쪽 발은 빼놓은 행동으로 일관하다가 집이 아직 있다는 핑계로 형을 설득해 개방만 마친 후 아무런 계획 없이 퇴원하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내가 어질러놓은 집을 치우면서 다시 잘해보자 다짐하였고 몇 차례 집 근처 A.A.모임에도 참석했지만 참석만 하는 노력은 단주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실천 없는 열망은 이내 식어버렸고 생활비를 부담하고자 전세를 월세로 돌리고 직업을 구하려 했으나 몇 년 전 수술 후유증으로 무릎이 아파 다리를 절고 다니니 직장이 구해지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전세를 뺀 돈으로 스포츠 경기에 베팅하는 사행성 게임에 손을 댔습니다. 처음에는 흥미로 시작했지만 이내 점점 빠지게 되었고 술만 먹지 못할 뿐 생활은 엉망으로 변해 사설 도박으로까지 이어져 남은 돈도 모두 날리고 말았습니다.

 

술도 모자라 도박까지...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 이럴 수 있나 싶었습니다. 그렇게 노력해서 얻은 직장에 집까지 모두 날리고 살겠다고 끼니를 챙겨 먹는 내 자신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상황을 이 지경까지 만들어 놓고 술 때문에 고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슈퍼에 들러 술을 사는 제 모습에 스스로를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삶에서 독립적으로 성취한 게 별로 없는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기생충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디가서 죽을 용기조차 없어 그마저도 제일 잘하는 술을 먹고 죽자며 계속 술만 마셨습니다. 10일이 자나자 온몸이 마비되는 것을 느꼈지만 계속 술을 마셨습니다. 술에 취해도 정신을 잃지 않고 발작이 오는 것을 또렷이 느끼며 침대에 쓰러졌습니다. 다시 눈을 뜨자 대학병원 응급실이었습니다. 일생을 무책임하게 가족들을 피 말리면서 그렇게 쉽게 죽으려고 한 게 잘못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형은 이번에도 저를 살려주었습니다. 미안하다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대답대신 한숨만 나왔습니다.

 

그렇게 대학병원에서 일주일 동안 치료를 받고 다시 다사랑중앙병원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기 위해 계획표를 작성해 실천하는 습관을 기르고 매일 일기를 쓰면서 나의 감정 상태를 알아가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원외 재활보다 상대적으로 시간 여유가 있는 원내 재활을 하면서 남는 시간에는 A.A.모임에 다녔습니다.

 

그렇게 전에는 해보지 않았던 회복 프로그램들을 수행하면서 순조롭게 퇴원할 수 있을 듯 했으나 유례없는 코로나 사태가 발생해 준비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임시방편으로 아는 지인의 집으로 퇴원했습니다. A.A.모임까지 중단되자 병원 생활을 오랫동안 했지만 초심자였던 제가 버티기는 힘들었습니다. 하루하루가 막막했습니다. 그렇게 버티다 또 재음주를 하였고 아는 지인의 도움으로 그리고 다사랑중앙병원의 배려로 다시 입원해 관리, 개방병동을 지나 현재 재활 병동에서 원내 재활을 하면서 다시 희망을 꿈꾸고 있습니다.

 

저희 집안은 알코올 중독에 대한 가족력이 있습니다. 게다가 저는 음주를 하기 전부터 의존이 심한 성격이었습니다. 주위 가족들의 노력으로 기생충처럼 살았음에도 내가 복이 많은 것이라고 착각하며 살았습니다. 10년 전 이병원에서 알코올 중독 진단을 받았음에도 끝까지 부정하고 저를 도와주려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의심하며 나는 평생 젊고 건강할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살았습니다. 제 고집대로 살다가 실패를 해보고 나서 이렇게 10년을 정리해보니 후회가 많이 되지만 과거 속에 사는 것 또한 회복하는 삶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병원에서 배운 대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2층 테라스에 적혀 있는 글귀가 생각이 납니다.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채우고 또 비우는 과정의 연속이다.-

 

단주를 하면서 행복으로 채우고 병원에서 배운 회복 프로그램과 A.A.모임 참석을 통해 비우는 연습을 계속 하겠습니다. 힘들면 천천히 가더라도 계속 가겠습니다. 두서없는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