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알코올 중독 가족수기] 쓰디쓴 인내의 시간 끝에 찾아온 평온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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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21-02-09 | 조회수 | 947 | 이름 | 다사랑 |
첨부파일 | 2019-가족수기_썸네일.jpg | ||||
[2019 가족수기 공모전 우수상] 쓰디쓴 인내의 시간 끝에 찾아온 평온함 김○○ 취하시고 술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고 술을 드시고 토를 하시고 속이 아프셔서 몸을 계속 흔드심에도 떨리는 손으로 술을 찾으시고 여의치 않으실 때는 가게에 기어서라도 가셔서 술을 사오는 것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제 머릿속에는 술은 한 사람의 인생을 파탄시키는 것, 술은 가정을 파탄시키는 주범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술에 취해 부리시는 행패로 인해서 여러 번 집을 나가셨고 술로 인해 가정이 여러 번 파탄이 났으며 우리 형제?자매들은 어머니를 설득하여 집으로 오시라 간곡히 이야기를 드려 집으로 돌아오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께서 술을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식사를 하실 때면 늘 소주와 소주잔이 있었고 술을 드셔야 식사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알코올 의존증의 증상이었습니다. 그동안 술로 허비한 돈과 시간, 병원비, 인생을 허무하게 보셨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알코올 의존증이 될 수밖에 없는 환경적 요인(유년 시절 아버지의 음주 후 폭행, 부모의 이혼 등) 또한 받아들여졌습니다. 대?소변 조절 능력이 없고 고통이 극심하실 때에야 비로소 동네병원이나 대학병원 응급실을 찾았을 때 의사나 간호사 그리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알코올 의존증 환자를 무시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고 치료하고 싶지 않은 환자라는 생각을 보호자에게 은근히 압박하였습니다. 그리고 보호자인 저를 바라보는 눈빛은 경멸하는 듯 보였고, 불쌍하다 등의 눈빛을 보내 저는 병원에 가면 의도적으로 사람들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그 눈빛으로 제 마음이 상하면 아버지를 보호하고 안내해 드리는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었습니다. 2016년 1월 아버지는 지인의 소개로 두부?콩나물 사업을 시작하셨습니다. 일을 해 집안에 보탬이 되시고자 선택하신 두부?콩나물 사업은 새벽 1시에 시작하는 일로 아버지의 연세와 체력에 맞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젊은 사람이 하기에도 버거운 일을 70세의 아버지께서 혼자 운전을 하시면서 새벽과 아침까지 두부?콩나물 배달을 하셔야 하다는 것에 제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뒤늦게 알고 보니 술에 취에 술의 기운을 얻어 일을 하셨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두부?콩나물 사업이 뜻대로 되지 않고 낮과 밤이 바뀐 채 일을 하고 수면을 취하지 못하시고, 일을 하심에도 손해를 보는 것을 인지하시며 극도로 예민해지셨고 화를 많이 내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일을 마치시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집에 오시면 가족들은 아버지의 비위에 맞춰 행동해야 했습니다. 두부?콩나물 사업을 하는 곳은 집에서 자동차로 1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곳으로 환경이 낙후되어 있고 일을 마치시고 편히 누워계실 수 있는 곳이 안 되는 곳이었습니다. 가족들은 두부?콩나물 사업을 그만 하시라고 매번 이야기 드렸지만 투자한 돈이 아까워서 그렇게 못하시겠다고 하시며 강하게 뿌리치셨습니다. 그곳에서 혼자 숙식을 해결하시며 5개월 정도 일을 하며 지내셨습니다. 두부?콩나물 사업을 하시기 전에 6개월간 단주를 하셨습니다. 50년 만에 비교적 긴 단주 기간이었지만 두부?콩나물 사업을 하시면서 늘어나는 빚과 막대한 손실로 인하여 다시 술을 드시기 시작하였습니다. 혼자 계신 곳에서 식사도 하지 않고 술만 드셨던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술에 대해 제지를 하는 사람들이 없기에 10여분 거리에 있는 가게에서 술을 사와서 밥 대신 술로 배를 채우셨습니다. 술이 없으면 안 될 정도로 술의 노예가 되어 있었습니다. 가족들은 노심초사 하며 하루 하루 살얼음을 걷는 것만 같았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응급실에 계시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아버지의 두부?콩나물 사업을 하는 곳의 동네에 사시는 분이 아버지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구급차를 통해 대학병원 응급실로 갈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 당시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두부?콩나물 사업을 그만하실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아버지 더이상 술로 고통받지 않도록 해 주세요’라며 아버지께서 술로 인하여 비참하게 사실 수밖에 없는지 삶이 한탄스럽고 원망스러웠습니다. 결국 두부?콩나물 사업을 청산하시고 집으로 오셨고 사업 실패에 대한 상실감과 그동안의 피폐해지고 황폐해진 몸으로 하루하루 좌절의 나날을 보내셨습니다. 가족과 이제는 술을 드시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약속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셨는지 방 안의 불을 끄고 늘 누워계셨고 매일 수면제에 취해 계셨습니다. 햇빛 보는 것이 싫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이 우울하게 보였습니다. 늘 어둠 속에 누워계시는 동안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지, 술을 한 모금만 마셨더라면 소원이었을 정도로 술에 의존되어 있는데 하루하루의 삶은 아버지께 가혹했을 것입니다. 2개월 단주 후 다시 술을 드시고 병원에 가시고 다시 1개월 단주하시고 병원에 가시고를 반복하신 후 알코올 전문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알코올 전문병원에 입원하신 것은 제가 고등학생 때로 기억됩니다. 아버지께서는 알코올 전문병원을 극도로 싫어하셨습니다. 환자에게 자유가 전혀 없고 격리되어 있고 수면제 등으로 환자를 조종하는 것에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알코올 전문병원에 가시기 전날 아버지의 속옷과 세면도구를 챙기면서 마음에 큰 슬픔이 찾아왔습니다. ‘가셔서 얼마나 대우를 못 받으실까?’,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아버지께 얼마나 많은 약을 사용할까’, ‘금단증상으로 얼마나 힘들어하실까?’ 이런 마음을 안고 알코올 전문병원에 입원할 때 건장한 남자들이 양쪽에서 아버지를 데려가는 모습을 보며 도살장에 끌려가시는 것만 같아 마음속으로 많이 울었습니다. 입원 후 정신이 또렷해지면 집으로 전화를 걸어 어머니께 절대 술을 먹지 않겠으니 퇴원하게 해달라 이야기 하시면 어머니는 더 입원을 하셔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 대답을 드리면 협박을 하시고 전화를 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결국 2주 만에 퇴원을 하셨고 다시 어둠의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알코올 전문병원의 짧은 입원 기간 후에 다시 술에 취해 방안에는 구토로 인한 냄새와 여기저기 널브러진 술병들, 흐리멍덩한 눈빛과 어눌한 말투, 딸국질, 앞뒤가 맞지 않는 말들, 혼잣말, 욕설, 속이 아파 몸을 흔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은 가족에게도 가혹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의 숨소리가 이상하게 들렸고, 숨을 너무 힘들게 쉬고 있었습니다. 걱정이 되어 동네 종합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보니 이상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진찰 후 집에서 숨 쉬는 것이 더욱 힘들어져 의사의 오진임을 가족들은 인지를 하고 고려대구로병원 응급실을 향했습니다. 알코올로 인하여 심장에 무리가 가서 숨 쉬는 것이 힘들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동네 종합병원 의사의 말만 믿고 아버지를 방치했다면 생각만으로도 아찔했습니다. 구로에 있는 대학병원에서 인공심장박동기를 장착하시는 수술을 하고 집으로 오셔서 정말 술을 끊겠노라 큰 결심을 하셨을 것입니다. 수술 후 병원에서도 절대 술과 담배를 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50년 정도 드신 술을 결심만으로 끊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수술 후 며칠이 지나 술병을 숨기고 가족 몰래 술을 드셨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탄로가 난 후에는 숨어서 드시는 것이 아니라 큰소리를 치며 술 드시는 것을 합리화하며 술을 드실 이유를 찾으셨습니다. 가족들은 하루하루가 불안과 초조에 시달렸습니다.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아버지께서 숨을 잘 쉬고 있는지 봅니다. 그럼에도 숨을 쉬고 계시면 안도를 하며 감사했습니다. 아버지는 통제 불능 상태, 몸이 고통으로 참을 수 없을 때가 되어야 병원을 찾아갑니다. 알코올이 조금 들어간 상황에 병원을 가면 모시고 가는 길이 다소 용이하고 치료도 빠를 텐데 이런 경우에는 절대 병원을 가지 않으십니다. 술로 인해 통제 불능이 될 때 가족들의 도움으로 응급차에 실려 끌려가듯 병원을 가십니다. 아버지도 가족도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의왕시에 있는 다사랑중앙병원을 알게 되었습니다. 알코올 전문병원으로 한방과 양방으로 치료한다는 광고가 눈에 크게 띄었습니다. 대외적인 긍정적인 평판도 병원을 선택하는데 큰 몫을 차지하였습니다. 알코올 의존증으로 수많은 개인병원, 종합병원, 대학병원, 알코올 전문병원 입원 경험이 있기에 다사랑중앙병원도 그 중의 하나라 생각했습니다.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할 당시 어려운 점이 많았습니다. 가장 큰 것은 아버지께서 심장박동기 장착을 하고 있고 걸음도 못 걸어 통제가 안 되는 위험한 환자라 판단한 것 같습니다. 가족들은 필사적으로 입원을 해야 한다고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수많은 일반병원, 종합병원, 대학병원, 알코올 전문병원을 다녀보았고, 이곳에서 거절이 된다면 알코올 의존증으로 평생 사실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힘들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어떻게든 입원을 해서 치료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간병인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알코올 의존증 환자의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아버지 또한 알코올 전문병원에 입원하시는 것을 못마땅해 하시고 가족들에게 험한 이야기와 원망을 쏟아 내셨습니다. 입원 후 정신이 또렷해지면 퇴원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이 애처롭지만 병원에서의 구체적 치료 없이 다시 나오게 된다면 같은 상황과 결과가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가족들은 무엇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 가족들은 강한 마음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되돌아보니 가족들에게 힘이 된 것은 매주 토요일에 있는 가족 교육이었습니다. 가족 교육을 통하여 알코올 의존증 환자의 특성 ? 건강상의 문제 ? 정신상의 문제, 알코올 의존증 가족의 정서적인 문제, 알코올 의존증 환자에게 가족이 도울 수 있는 방법 등을 강의를 통해 알려 주었습니다. 가족 교육을 받으면서 단순히 알코올과 차단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며 알코올 의존증 환자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는 가족들의 도움과 지지가 중요함을 알았습니다. 제가 알코올 의존증에 대해서 무지했을 때는 단순히 술을 드시지 않는 것이 방법인 줄로만 알았던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동안 아버지께 도움을 드리지 못하고 술을 드시면 아버지께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던 일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아버지는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 하신 후 일주일 동안은 많이 힘드셨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입원을 하셔서 간병인의 도움을 받으셨는데 간병인의 비용도 높았지만 다시 격리되는 병원에서 지내야 한다는 사실이 한탄스러우셨을 것입니다. 제가 병원에서 가족 교육을 받았다고 이야기 드리니 아버지께서는 부정적인 인식으로 이야기하셨지만 가족들은 조금씩 다사랑 중앙병원의 회복프로그램에 신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매주 토요일 가족 교육이 있는 날에 여러 명의 상담사님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상담사님들의 모습은 병원의 일을 사무적으로 처리하는 모습보다는 마음이 닿을 수 있게, 진심이 통하도록 가족들을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는 다른 병원에서는 볼 수 없는 다사랑중앙병원만의 특화된 장점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환자나 환자 가족들은 긴 알코올 의존으로 인해 마음이 무너져 있습니다. 알코올 의존이라는 고통의 끈을 끊고 싶지만 의지적으로 결심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황폐해진 환자나 가족들에게 상담사님과의 대화는 희망의 촛불과도 같았습니다. 아버지의 입원 기간이 이 주일, 삼 주일을 지나면서 아버지께서도 마음의 평온을 찾으셨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의 평온은 상담사님과의 대화 시간과 정기적으로 이루어지는 알코올 의존에 대한 바른 교육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처음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했을 때 가족들의 마음과 다사랑중앙병원에서 퇴원했을 때의 마음이 달라져 있음을 느꼈습니다. 이는 병원이 환자에 대한 마음을 상업성보다는 환자 한 분 한 분을 귀중히 여기며 시간이 더디 가더라도 환자들이 알코올 의존증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가족 교육 때 퇴원 후에 꼭 해야 할 것이 있는데 아버지께서 A.A.(익명의 알코올 중독자들) 단주모임에 참석하는 것이었습니다. 10년 전에 A.A. 단주모임을 이야기 드렸을 때는 화를 내시며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셨는데 다사랑중앙병원 퇴원 후 다시 A.A. 단주모임 이야기를 드렸을 때는 예전과 같은 부정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퇴원을 하신 후 이틀이 지난 후 토요일에 명동성당에서 A.A. 단주모임이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고 처음 단주모임에 참석하시는 것이므로 저와 언니, 여동생이 아버지와 함께 명동성당(범우관)의 단주모임에 참석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각자 알코올 의존에 대한 경험을 공유하였습니다. 세상에서 아버지 혼자 알코올 의존증인 것만 같아 위축되고 숨기고 싶었는데 이곳의 사람들도 아버지와 같은 경험과 고통이 있었다는 것에 위로가 되었고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되었습니다. 처음 모임에 참석하시는 아버지는 어리둥절하셨지만 싫지는 않아 보였습니다. 저는 인터넷으로 서울지역의 A.A. 단주 모임을 검색해 보았습니다. 장소와 시간을 고려하여 토요일 신림동 성당에서 이루어지는 A.A. 단주 모임에 참석하려 했습니다. A.A. 단주모임은 퇴원 후 바로 참석하는 것을 권유 드립니다. 퇴원 후 단주모임 없이 외롭게 단주를 하게 되면 연결의 끈이 없어 다시 무너질 수 있을 것입니다. 토요일 신림동 성당에서 하는 단주모임에 처음 참석하는 것이라 아버지와 제가 함께 참석하였고 양해를 구해 1시간 동안 모임에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곳은 다사랑중앙병원의 상담사님께서 모임을 주도하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단주모임에 참석하는 분들 중 다사랑중앙병원에서 입원 경험이 있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많은 단주모임 중에서 이곳에 올 수 있게 도와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아버지 또한 다사랑중앙병원의 입원 경험이 있는 분들과 의사소통이 잘 이루어짐에 안도하셨습니다. 토요일 단주모임을 매개로 하여 매주 수요일(60대 이상 노인 환자) 다사랑중앙병원에서 하는 단주모임에도 참석하시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A.A. 단주모임에 참석하시고 금주하신지 2년 5개월 정도 되셨습니다. 요즘은 화요일에 다사랑중앙병원 환우분들을 위해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10년 전 A.A. 단주모임에 대해 이야기 드릴 때 “술은 혼자 끊는 것이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말아라.”하며 모임을 거부하시고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시던 아버지께서 환우분들을 위해 메시지를 전하신다고 생각하니 예측할 수 없는 길로 인도해 주시는 큰 힘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지난날 아버지는 술이 있어야 살 수 있었지만 지금은 A.A.모임이 있어야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환우분들에게 희망과 용기가 되고자 아버지의 경험을 솔직히 공개하시고 단주는 몇몇 특정한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끊겠다는 열망만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위해 글을 다듬으시고 연습을 하십니다. 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제가 어떤 일을 하게 될 때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원동력을 얻었고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열정적으로 하리라 다짐했습니다. 단주하신지 2년 5개월 정도 되시는데 토요일 단주모임에서 사회자가 되셨습니다. 모임을 이끌어가는 책임감이 있으시지만 이 자리를 계기로 더욱 단주에 정진하시리라 생각됩니다. 토요일 단주 모임 때 어느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단주는 죽으면 끝나는 것이다.” 아버지의 알코올 의존증을 지켜보면서 이 이야기가 진리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아버지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알코올 의존증은 자신의 목숨과 바꿀 정도로 처절하게 싸워야 끊을 수 있는 병이다.” 이 말씀 속에 이 병이 얼마나 무섭고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 중병으로, 알코올 의존증의 폐해를 깊이 인지하고 있다면 사람들은 술을 멀리할 것입니다. 알코올 의존증 환자에게 중요한 것은 술을 끊는 의지도 필요하지만 주변의 지지 또한 중요하다고 봅니다. 알코올 의존증 치료는 결코 혼자 할 수 없습니다. 가족들의 사랑과 지지, 응원이 필요합니다. 그동안 아버지께 단순히 술을 드시지 마시라 이야기한 것이 공허한 울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알코올 의존증의 외로운 길에서 환자 혼자만의 몫으로 생각하기에는 그 병이 매우 심각합니다. 알코올 의존증 환자에게 필요한 것 세 가지를 꼽자면 첫째, 환자의 내면까지 치료하는 좋은 병원을 만나는 것이고, 둘째, 환자는 꾸준한 A.A. 단주모임으로 동병상련을 하는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변화를 받아 술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가족들의 사랑과 응원이 필요합니다. 마지막까지 술과 싸워야 하는 시간들을 마주하고 있지만 하루하루 단주하심에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단주로 인하여 저의 가족은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음주를 하실 때는 집안의 분위기가 암울하고 터널과 동굴에 있는 듯한 느낌과 원망과 비난이 난무하였는데 지금은 작은 일에서도 기쁨을 찾고 서로 사랑하며 이해하며 보듬어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틈나는 대로 알코올 관련 책을 읽으시고, 다른 분들의 수기 읽고 따라 적으십니다. 그리고 그동안 아버지의 알코올 의존에 대한 과정과 고통스런 시간들도 기록하십니다. 수기를 따라 적으시면서, 아버지의 경험을 기록하시면서 다시 단주에 대한 마음을 잡으십니다. 아버지는 종종 이야기하십니다 “오늘 5분 참았네, 오늘 10분 참았네.” 인내의 시간은 쓰지만 쓰디쓴 인내의 시간만큼 평온함으로 보상되어지는 아버지를 뵈면 오늘도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