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대상] “Drunken psychology counselor”
[2022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대상] “Drunken psychology counselor” -부제: 두 주먹 꽉 쥐고, 두발에 힘주고! 아직 젊다고 할 수 있는 30대 중반, 사회에서 인정받는 직업과 학위를 가지고 있던 저에게, ‘알코올중독’은 그 무엇도 보지 않고, 잔인하게 찾아왔습니다. 알코올중독이 찾아 온 것이 아니라, 저는 어쩌면 알코올중독이 될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태어난 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부터 다사랑중앙병원에서 원내 재활 일하지 않고, 병원의 수업을 들으며 재활병동에서 생활하는 ‘교육중심 재활’을 하고 있는 저의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저 혼자서 해결하려던 지옥 같던 시간들을 지나, 지금 가족과, 치료진과, 환우들, 협심자들과 함께 힘을 모아 그래도 그나마 한숨 돌리고 희망을 꿈꾸는, 아직 시작단계의 제 여정을 부끄럽지만, 솔직하게 들려 드리려고 합니다. 저의 음주는 10대 때부터 시작 되었습니다. 어떻게 술을 처음 마셨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제가 기억을 하는 순간부터는, 술을 잘 마시는 애, 놀 때 재밌게 노는 애, 돈 잘 쓰는 애가 저의 수식어였습니다.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가는 것보다, 안들어가는게 덜 혼난다는 저만의 생각으로, 핑계를 대며 날밤을 새서 술을 마시고, 끝을 봐야 술자리를 끝냈습니다. 많은 알코올중독자가 그렇듯, 저에게도 가족문제가 있었고, 또 어마어마한 어릴 적의 사건으로 그것을 잊기 위해, 어쩌면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미쳐버렸을지도 모르는 그 때의 사건들로 저는 점점 술을 더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았습니다. 내가 왕이 되는 것 같기도 했고, 돈을 쓰면 친구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고, 복잡한 생각들을 그때는 잊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사회에서, 학교에서 받았던 스트레스와, 내가 직면해야 했던 모든 감정을 피해 술을 마시며 허풍을 떨고, 되지도 않는 소리에 깔깔대며 저의 음주패턴은 점점 심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이야기를 하면, 다들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그리고 지금까지 술 마시는 핑계가 되기도 했던 가정의 어려움과 문제로, 여러 가지 사건들로 방황하는 10대부터 도망 치기위해 술을 마시기 시작 했고, 20대가 되어, 어릴 적부터 접한 밤문화로, 온갖 업소나 밤 세계에 통달한 저는, 점점 더 문제음주를 하게 됩니다. 밤에 마시는 것이 모자라, 아침술, 낮술을 시작 하게 되었습니다. 낮술은 정말 신세계였습니다. 낮에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은 식당이나, 24시간 호프집 등 싼 곳들 이었고, 아무리 마시고 취해도 해가 지지 않는 마법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저는 낮술 전도사가 되었고, 낮술에 그치지 않고 밤새 또 술을 마시고, 그렇게 20대를 보내게 됩니다.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됐던 저는, 대학을 다니며 술을 마셨고, 그마저도 처음엔 고도적응형 알코올중독자로 학교를 잘 다니는 듯 했지만, 낙제도 하고, 학교를 1년 더 다녀야 했으며, 휴학으로 대학을 길게 다니게 됩니다. 그때 까지만 해도 전, ‘젊은 나이에 군대도 안가니까’ ‘나 말고도 이렇게 노는 애들이 많은데’ 등의 생각으로, 유별나다고 생각하지 않고, 대학을 졸업하였습니다. 그렇게 겨우 대학 졸업을 하고, 일을 시작했습니다. 사회복지사로 취직하여 일을 하였고, 제가 겪은 아픔과 방황의 시간들이 지났다고 생각해, 청소년, 가족 상담을 해 보면 어떨까? 생각하며 대학원에 진학 했습니다. 대학원에 진학해, 일과 함께 대학원을 다녔습니다. 대학보다 더 심해진 알코올중독으로, 정말 겨우겨우, 아주 아슬아슬하게 학위를 받았습니다. 일과 대학원을 병행하며 저의 음주 문제는 알코올중독 말기 중 말기로 진행됩니다. 일을 하면서 일찍 조퇴하고 술을 마시고, 지각을 하고, 출장을 못가기 다반사고, 중요한 행사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공황, 우울, 불면, 불안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제 발로 정신과에 찾아가 진료를 받던 상황에서, 부모님께서 동네 부근에 유명하다는 자칭 알코올병원으로의 외래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때 이미 부모님은 알코올중독에 대해 공부하고, 정보를 모으고 있으셨습니다. 알코올중독임을 의사가 진단하고, 술을 마시면 절대 안 된다고 하는데도, 전 그냥 똑같이 술을 마셨고, 외래에 가서도 당당하게 술을 먹는다고 말할 만큼 병식이 없었습니다. 그 병원에 가는 것은 쉽게 수면제와 안정제를 받을 수 있다는 것 뿐 이었습니다. 입원을 몇 차례 권유했지만, 지금 하고 있는 일과 학업으로 당연히 단칼에 생각도 하지 않고 거절한 것은 당연합니다. 술 문제가 있다는 것은 인정하였지만, 알코올중독이라니, 솔직히 말해서, 대학원 나온 잘나간다는 심리상담사가 알코올 중독자라니? 라는 오만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 잘나신 심리상담사님께서 인생의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지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원래 하루 이틀 술을 마시면 끝이 나던 술이, 삼일이 되어도, 일주일이 되어도, 이주가 되어도 멈추질 않았습니다. 혼술은 못하겠다는 생각으로, 친구들을 바꿔가며 술을 계속 마셨고, 술을 사려면 돈이 필요했습니다. 상담비는 선불이라, 상담비가 들어온 것으로 술을 마시고, 코로나 핑계로 상담을 미루고, 취소하고. 그러다 돈이 떨어지니 대출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20대때부터 받은 대출이 있었기 때문에, 카드론이나 제2금융권으로 손을 뻗었습니다. 대출은 정말 쉬웠습니다. 핸드폰 하나로 간단하게 완료되는 것들이 많았고, 제가 있는 곳으로 친히 직원이 와서 태블릿 피씨에 싸인 몇 번으로 대출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 돈을 가지고, 유흥업소에 다니고, 친구들을 불러 모아 술을 사고, 집에는 안 들어가거나 옷을 갈아입을 때만 들어갔습니다. 대출은 점점 늘어났고, 카드한도도 꽉 차기 시작했습니다. 돈이 없어진 저는, 점점 싸고 허름한 곳을 찾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경제적인 밑바닥을 친 저를 당연히 친구들은 저를 외면했고, 몇몇 비슷한 자각하지 못한 알코올중독자 친구들끼리 의리를 외치며 저렴한 곳을 전전했습니다. 어차피 안주는 관상용이었으니, 되도록 안주도 한곳, 찾다 보니 할아버지들이 가는 전집이나, 식당 등에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코로나 때문에 밤늦게 술을 마시는 곳들을 찾아다니다, 단속이 심해지자, 낮에 편의점 말고 큰 마트에 가서 술을 사다놓고, 모텔에서 술을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어김없이 5시가 되면, 술이 깨기 시작하거나 모자라 아주 극도로 예민하고 불안한 마음을 이끌고, 식당이 열 시간이 가까워 졌기에, 잠깐 자거나, 술을 계속 마시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모텔 슬리퍼를 맨발로 신고, 며칠 씻지 않은 몸과 얼굴, 그래도 머리는 물만 묻히고 뜬 머리를 정리해 식당 문이 열자마자 술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온몸이 떨리고, 숟가락을 앉아있는 상태에서 명치 위로 들 수 없을 만큼 손을 떨면서도 ‘세 잔만 먹으면 괜찮아져!!’ 라고 외치며 소주를 원 샷 하고, 손이 안 올라가면 얼굴을 술잔에 닿게 숙여서 까지 술을 마시고, 술이 들어가면 또 괜찮아지는 몸에 또 밤까지 술을 마셨습니다. 그러다 온몸이 부서질 듯이 아프면, 집에 가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여관방에 불도 켜지 못하고 누워 식은땀을 흘리며 극도의 불안과, 환청, 환각에 시달리고 온몸이 경련이 일어나 금단을 하며 누워있다 또 술을 마시러 나갔습니다. 이때의 금단으로 저는 몸의 밑바닥을 쳤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몸으로 술을 마시고, 카드 값은 밀려오고, 상담은 코로나로 미뤄는 놨는데 진행하지 못하고, 직장도 될 대로 되라, 대출독촉이 들어오고, 극한으로 사람이 몰리니 정신이 나가, 이젠 술을 먹고 죽어야 겠다. 술을 먹고 죽으면 알아서 되겠지 하며 자포자기하고, 난 혼자다, 난 죽어야 한다는 환청과 함께 모든 것을 혼자 상상하고, 혼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웃었다 울었다, 화냈다 짜증냈다 하며 온갖 감정적 밑바닥을 치게 됩니다. 한번 집을 나가면 한 달, 두 달 술을 마시는 통에 엄마 아빠가 밤에 저를 찾아 다녔습니다. 경찰에 신고해 위치추적을 하기도 하고(성인이지만, 자살위험군에 있으면 신고가 가능), 제가 잘 다니는 술집들을 알아 찾아다니기도 하고, 제 공인인증서나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을 뒤져서 친구들한테 연락하고, 찾아오고. 잡아서 집에 놓으면 삼일정도 몸을 회복하고 또 나가고.. 일을 좀 시작하려고 하면, 극도로 불안한 금단을 못 참고 일하는 중간에 병원을 간다고 하고, 술을 마시러 가고, 정말 엉망진창의 삶을 살았습니다.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다른 직원들, 학부모들도 눈치를 채는 듯 했습니다. 그렇게 술을 마시다, 환청을 듣고,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 한 환촉과, 발이나 팔이 뒤틀리는 경련 등 극한의 말기 증상을 보이면서도 술을 마셨습니다. 그땐 술을 마시지 않으면 살 수 없고, 말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정말 술이라면 모든 것을 갖다 바칠 것 같이, of the 술, by the 술, for the 술(술에 의해, 술의, 술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모든 것의 중심이 술이었습니다. 엄마 아빠가 결심을 하시고, EMS를 대동하여 저를 찾아 다니셨는데 잘 피해 다니다 결국 붙잡혀 첫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입원을 권했을 때, 입원 했다면.. 이렇게 온 인생을 다 잃고, 이렇게 긴 시간동안 병원생활을 하지 않았을 텐데, 라고 후회도 들지만, 각자의 “때” 가 있다는 말을 절실히 공감합니다. 중독을 인정하지도 않는 알코올중독자의 첫 보호입원은 스펙터클 했습니다. 일단 도망갈 힘이 없어 붙잡혀 타기는 했는데, 점점 불안하고 화가 나는 마음에 욕을 하고 침을 뱉고, 빌기도 하다가 또 침을 뱉고 욕을 하고, 울어도 보고, 빌어도 보고, 오줌도 싸고.. 내리자마자 죽는다고 소리를 지르고.. 다사랑으로 가달라고 했던 EMS는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저를 이송하게 됩니다. 입원을 정말 죽을 만큼 거부하다 엄마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송아, 난 너를 살리고 싶다”라고 울먹이는 모습에, 그 정신에도 결심을 하고 병동으로 올라 가 병원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4개월, 6개월 정도를 그 병원에서 2번 입원을 하였습니다. 그 병원에 익숙해지고, 그 병원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는 형님들과 정이 들어 재입원도 그곳을 선택하였습니다. 두 번의 입퇴원 사이사이에 알코올중독자 자조모임에도 정말 열심히 나가보았지만, 재음주가 계속 되었습니다. 술을 일부러 안 마시기 위해 위절제 수술을 무리하게 예약을 했지만, 입원 당일 술을 먹느라 가지 않은 것도 모자라, 그 다음날 아침 만취해서 병원에 가서 수술해 달라고 떼를 쓰는 만행을 벌이고, 술이 거나해 링겔 맞고 코골고 자다가 부모님이 오셔서 집으로 가는 길, 그대로 도망쳐서 술을 마시러 또 나가는 정신 나간 인간으로 알코올중독은 점점 더 심해지고, 진행이 되었습니다. 제가 알코올 중독자라는 것은 인정하게 되었지만, 제가 술을 피할 수 있는 힘은 없었습니다. 이 핑계로 넘어지고, 저 핑계로 넘어지고, 부모님은 저의 의지로 끊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알코올중독이 병임을 인지하셨지만, 그래도 의지로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다사랑중앙병원에서 가족테라피 수업을 들으시고는 ‘뇌질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셨다고 합니다. 공부를 해서 머리로는 알고는 있었지만, 깨닫지는 못하셨던 것입니다. 점점 더욱 심해지는 불안과 압박감에 다시 술을 마시고, 안 마셔야 되는 것을 알면서도 술을 마시고. 자조모임에서 어떤 것을 배울 새도 없이 술을 마시고, 재 음주를 계속하였습니다. 이번에 입원 할 때엔, 술 시동이 걸려 이틀째 술을 먹고 있는데, 다사랑중앙병원 출신이셨던 전 병원 주치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송 선생님은 술을 이틀이상 마시기 시작하면 무조건 입원 하세요.” 무슨 생각인지 저는 부모님께 전화해 다사랑병원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병원에 입원한 때부터 일주일 동안은 기억이 없습니다. 보호사 선생님께서 “송 선생, 부모님한테 특히 엄마한테 잘해-!”라고 계속 말씀하셔서 여쭈어 봤더니, 일층에서 병동에 올라올 때, 엄마한테 신경질을 내며 화를 냈나 봅니다. 제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 병원은 왜 주치의도 안 오고, 상담사도 안와?’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동안 계속 면담도 하고 진료도 봤는데 기억을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관리병동에서 저는, 삼일만 있다가, 일주일만 있다가 술만 깨고 나가야지 하며 집에 갈 생각만 했습니다. 나름 자조모임도 열심히 나갔고, 어느 정도는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제가 아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저 뜬구름 잡는 단주, 그냥 술을 마시면 안 된다. 라는 맥락의 내용들만 제 머리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부모님과, 이왕 다사랑에 입원 했으니 한번 해보자는 결심으로 개방병동까지 수료 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습니다. 그러던 도중, 마지막 제 자존심이었던 석사 출신, 박사 학위 공부 중인 심리상담사(사회복지사)를 무급휴직상태로 이름만 유지하며 끈을 붙잡고 있었는데, 저를 지탱하던 그마저도 퇴사를 하여 아무것도 저에게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누구에게나 멋지게 보이려고 하고 있던 박사학위 공부를 중단했습니다. 이것은 제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멋진 모습의 가면을 벗는, 술주정뱅이인 나를 드러내는 엄청나게 중대한 결정이었습니다. 이왕 다사랑중앙병원에 온 김에, 왜 알코올중독 병원의 하버드라고 하는지, 구경이나 해보자, 그리고 개방병동 수료를 하면, 부모님도 아무 말 못하겠지!! 라고 생각 하며, 빨리 개방에 가기 위해 과제도 내주면 2시간 안에 해서 제출하고, 수업도 잘 듣고 생활했습니다. 그런데 제 성격적 결점 중 하나인 남들 눈치 보는 성격이 심각하게 발동하고, 마른주정이 와서, 환우들과 이야기도 하지 않고, 혼자 계속 있고, 관리병동 마지막쯤엔 누워만 있어서 120KG까지 나갈 만큼 살이 찌고, 저 혼자 6병동 전체를 왕따 시키고 있었습니다. 아침에는 일어나기 힘들었고, 명상은커녕 앉아있기도 힘든 몸 상태 였습니다. 그 안에서 감정적 요동이 엄청나게 일어났습니다. 술이 어느 정도 깨니,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라는 것이 물밀 듯 밀려오며 저를 혼란스럽게, 괴롭게, 아니 미칠 정도로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때, 제 인생에 전환점을 안겨준 담당 상담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왕 병원에 있는 것, 상담사 선생님께 모든 걸 털어놓고 나가자 하는 심정으로 괴롭혔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 한 시간을 꽉꽉 채워 상담을 하며 모든 것을 털어 놓았습니다. 상담사 선생님께서는 저를 상담전공자로 보지 않으시고, 환자로만 대해 주셔서 저는 아무런 가식 없이 욕도 섞어가며, 그냥 30대 중반의 청년으로 상담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때론 형처럼, 때론 친구처럼 상담사 선생님은 저의 모든 이야기를 들어 주셨습니다. 같은 상담사로써, 이런 엄청난 이야기들을 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상담자에게도 몸 적으로, 마음 적으로 힘들어 진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저는 살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냈습니다. 묵묵히 들어주시고, 제안해 주시는 것들로 전 점점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관리병동과 개방병동에서의 상담사 선생님의 상담은, 저를 병원에 있게 하는 이유 중 하나였고, 저의 회복의 시작에 상당히 큰 부분을 차지하였습니다. 다사랑은 다른 병원과는 다르게, 수업이 있었습니다. 사실 전에 병원에서는 인지행동 치료를 한다고 낱말 맞추기나 틀린 그림 찾기를 했습니다. 그와는 차원이 다른 수업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병원이 아니라, 연수원 같다는 느낌도 받을 만큼 수업이 있었고, 내용도 다양했습니다. 관리병동에서는 알코올 중독자임을 인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육과 활동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다사랑에 와서 알코올중독자임을 머리로 아는 것을 넘어가, 진정으로 알게(믿게) 되었습니다. 감기환자가 기침을 하는 것이 당연하듯, 알코올중독자가 술을 먹는 것은 병의 증상인 것을 알게 되었고, 술을 먹는 것이 잘못(죄)인 것을 논하기 전에, 병에 든 것이고, 병에 들어 한 행동들이 잘못(죄)인 것들이 많다는 것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혈우병 환자가 피가 멈추지 않는다고 비난하거나, 환자 탓을 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알코올중독자들은 손가락질 받고, 질타를 받을 수밖에 없을까? 생각도 했습니다. 관리병동에서의 기간이 지나가며 제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냥 버려지는 시간에, 책을 한번 읽어보자 시작하였고, 책을 읽고, 필사를 하였습니다. 하루하루 할 수 있는 만큼만 옮겨 적었고, 개방병동에 가기 전에 자조모임에서 많이 읽는 책들을 거의 다 필사 하게 되었습니다. 잠이 오지 않고 많은 잡념이 드는 밤마다 독서실에 가서 불을 켜고 한 자 한 자 필사한 기억이 납니다. 그때의 힘이 아직까지 저를 병원에서 생활 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 것 같습니다. 개방병동에 와서는 제가 눈에 띄게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마음의 변화인지, 아침에 일어나기 시작했고, 헬스장에서, 병동에서 무작정 걸어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추천도서를 1번 이상씩 읽었습니다. 그리고 수업을 들었는데, 수업은 원장님들, 상담사 선생님들이 전문분야에 맞게 수업을 맡으셔서 수업을 하셨고, 병에 대한 지식에 대한 수업보다는, 마음으로 수업의 중점이 맞춰졌습니다. 애니어그램 수업으로 나를 더욱 깊이 있게, 그리고 주변사람들을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되었고, 하루를 명상으로 시작하고, 조금은 자유로운 생활 속에서 수업을 들으며 생활했습니다. 관리병동보다 인원이 적기도 하고, 세심한 치료진의 생활지도와 케어로 안전한 생활을 하고, 제가 밖에서 술을 마시느라 듣지 못했던 12단계나, 4단계, 9단계 발표를 하게 됨으로 안전한 병원에서 단주를 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커리큘럼에 따라 개인맞춤형 상담과 함께, 공동체 회의나, 병동끼리 모이는 그룹상담시간을 통해 다른 사람의 생각도 듣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어떻게 해 나가야 하는지를 배웠고, 밖에 있을 때 알코올중독자 자조모임에 가서 열심히 다녔지만, 저는 그때 배울 수 없던 12단계, 사회기술훈련, 온전한 생활, 재발방지, 애니어그램 등을 병원에서 교육 받으면서,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고 알아야 술을 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밖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알려주지 않았던 것들을, 병원에서 심도 있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특히 원장님들이 직접 하시는 강의에 신뢰도 쌓이고, 누구도 알아들을 수 있게 수업해주시는 방식에 점점 제 마음의 힘이 길러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처음에 상담사 선생님의 제안으로 하루에 20분씩만 런닝머신에서 걷자는 것이, 점점 익숙해지면서, 20분이 30분이 되고, 30분이 1시간이 되고, 매일 먹던 야식 라면을 점점 줄여가며,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는 26kg을 감량할 정도로 운동량이 많아졌습니다. 살이 빠지며, 건강도 점점 좋아지고, 자신감과 나도 할 수 있다는 기쁨, 기본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개방병동의 하이라이트는, ‘받아드림 암송’, ‘4단계’ ‘9단계’발표일 것입니다. 단계발표는 퇴원과 밀접한 관계도 있고, 병원에서 중요시 하는 시간이기에 정말 거의 모든 환자들이 열심히 준비합니다. 저도 밖에서 용기가 부족해 하지 못한 4단계작성과 발표, 9단계의 보상계획까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준비하여 발표 하였습니다. 4단계 발표와 9단계 발표를 마치면 퇴원한다는 마음에 그날만을 기다렸는데, 저에게 갑자기 재활병동이라는 카드가 나타났습니다. 재활병동을 선택하기에는 제가 퇴원한다는 기대가 너무 컸기에, 또다시 불평, 불만과 극심한 답답함, 화가 났지만, 병원에서 배운 달라진 저의 대처 방법을 사용하는 발전을 보이며, 진지하게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세상으로 나가 부딪히기엔 저도 저 자신을 믿지 못했고, 수업을 듣긴 들었지만 9주라는 기간은 저에겐 충분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제 인생에서 술을 안마셔본 기간이 6개월 정신병원입원이 가장 길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단도직입적으로, 솔직하게 왜 재활에 가야 하는 질문에, 어찌 됐든, 1년, 2년 술을 안 먹는 경험을 한 번도 안 해봤으니 해보면 어떨까? 라는 상담사 선생님의 말씀에 솔깃했고, 여러 가지 사정상, 원내재활일은 하지 않고, 개인적인 공부를 하면서 수업을 개방 때처럼 듣는 교육중심 재활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결정하고 나니, 속이 시원했습니다. 그리고, 병원에 대한 믿음이 생겼기 때문에, 재활병동을 만든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많은 육체적인 질병들도 재활운동을 하듯, 나도 재활이 필요하겠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재활병동에서 생활을 잘 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하루가 천 년 같고, 일주일이 안 갔는데, 이제는 하루하루가 오롯이 지나갑니다. 알코올중독자에게는, 아니, 저에게 있어서 ‘아무 일 없는 하루’는 겪어보지도 못했고, 어떻게 보내야 할지, 내가 이렇게 아무 일 없이 하루를 살아도 되나? 라는 생각이 들 만큼. 매일 매일이 지옥 같고, 우울했고, 자살시도를 해야 할 만큼 힘들었으며,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고, 술에 쩔어 인간이하의 날을 살던 저에게 보통의 날들이 이렇게 있다는 것은 사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기도 합니다. 앞에서 아주 간단하게 가족문제와 나의 문제가 있다고만 언급했지만, 그 문제들이 누구보다 심각하고, 어렵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저를 괴롭히고, 죽을 때 까지 나를 쫓아다닐 것을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문제들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바뀐 것은 제 자신입니다. 일단, 귀로 들리는 것부터 달라지고, 그 문제를 바라보는 나의 눈과 마음이 달라졌고, 그것을 해결하려 애를 쓰기도 해야겠지만, 접근 하는 방식의 변화와, 나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변하며, 그대로 직면해서 나의 변화된 행동으로 조금씩 쪼개어 내가 할 수 있을 만큼 노력할 때, 어느 순간 그 큰 문제덩어리는 제 두 손가락에서 먼지가 되어 날아갈 것이라는 것을 병원에서 많은 훈련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술을 한창 마시던 그 지옥 같은 때에서 한 발짝 물러나 나의 이야기 속에 있지 않고, 그 이야기를 3인칭으로 바라보는 것을 느끼며, 술을 찾아서 마시지는 않겠지? 라는 용기도 납니다. 이렇게 변함에 있어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가족입니다. 병원에 있을 수 있는 것도 가족의 희생으로 있을 수 있었고, 3번째 입원 할 동안 지옥 같은 시간과 악마같은 저를 묵묵히 견뎌준 가족들이 있기에 이때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관리에서, 개방에서 퇴원하는 환우들, 그리고 이미 회복에 길에 들어선 선배 선생님들을 보며, 병원에 잘 있다가도 하루에도 열두 번 씩 마음이 오락가락 하지만, 저의 때가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가 병원 문을 힘차게 나설 그 순간이 언제 일지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내며 그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병원에 있어서 친동생의 상견례도, 사랑하는 외할머니의 임종과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이걸 계기로, 내가 회복하여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온전한 모습으로 있는 것이 저의 회복의 목표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긴 터널을 지나고 있지만, 언젠가는 끝이 있을 것이라는 저희 부모님, 그저 묵묵히 견디는 것만이 할 일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술자리에 있을 때, 연락을 일부러 피하면 엄마는 문자를 보내셨습니다. 카톡은 읽으면 표시가 나서 안 읽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마다 엄마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두 주먹 꽉 쥐고, 두 발에 힘 주고, 그 자리를 박차고 집으로 와라” “너의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다” 정말 일어나기 힘든 술의 자리지만, 일어나기 싫고, 일어날 수도 없는 술의 자리였지만, 지금 그래도 술 마시지 않은 정신에 회복을 꿈꾸며, 하루를 살아내는 내 자신에게 이젠 스스로 수고했다 말 할 만큼의 여유도 생겼습니다. 가장 극심했던 순간들을 기억하려고 애쓰며, 맨 정신에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감정들을 처리 하는 연습을 하고, 술로 도피하는 것이 아닌, 당당히 서서 맞서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한마디에, 한 눈빛에 밤새도록 고민하고, 좌절하던 저의 모습에서, 피하지 않고 그것에 당당히 맞서고, 아직 마음의 근육이 약해, 좌절하고, 쓰러지고, 포기하고 싶을 때, 어두운 방에 혼자 있지 않고, 안전한 병원에서 옆에서 도와주시는 치료진과 환우들, 가족들이 있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고 다시 일어나고 있습니다. 재활병동이 정답도 아니고, 개방병동도 정답이 아닙니다. 알코올중독자에게는 모든 것에 밑바닥을 치고, 스스로 항복하고 시인하는 것이 가장 큰 치료(회복)의 시작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 항복이 언제 될지도 모르고, 심각하게 엮인 감정과 문제들이 풀리기 시작할지는,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그저 그 ‘때’를 기다리며, 지옥 같은 알코올중독을 앓으며, 바라보며, 견디는 시간은 개개인마다 다를 것입니다. 지금도 한 순간 한 순간 힘든 고비를 넘기고 있는 알코올중독자들과 가족들, 그리고 협심자들과 치료진들께 제 감사와 응원을 전하며 이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지금 이 글을 읽어주신 다양한 사연을 가진 여러분,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두 주먹 꽉 쥐고, 두발에 힘주고!“일어나, 함께 갑시다!”
1389031911 2022-11-17
[2022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최우수상] 사람마다 마음의 그릇이 있다!
[2022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최우수상] 사람마다 마음의 그릇이 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어머니께 맞으며 자랐고, 아버지는 ‘말’로 나의 마음을 때렸다. 유아기에 받아야 할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자란 나는 애정결핍이 있는 사람이다. 아버지는 “너 때문에 엄마랑 싸운 것이다. 너 때문에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너 때문에”라는 말을 많이 하셨다. 이런 말을 계속 듣고 맞다 보니 부모님이 싫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싫다는 감정은 원망이 쌓여서 계속 불어났다. 부모님이 나를 이렇게 키웠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된 것이라고 탓을 할 이유는 충분했다. 투사는 어머니의 말이 증폭제 역할을 했다. 어머니는 “어렸을 때 너무 때려서 미안하다. 사랑을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나 때문에 네가 이렇게 된 것 같다”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살아오면서 내가 가족에게 상처 준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 말은 당연히 내가 들어야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어머니의 말은 내가 술을 마실 이유가 충분했다. 어머니의 감정을 이용해 더 심하게 술을 마셨다. 이기적인 내 마음은 옆에서 마음의 병을 얻고 있는 가족을 보지 못한 채 조금씩 천천히 나는 나를 파괴하고, 가족을 갉아먹었고,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가정환경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부모님도 나를 이렇게 키우고 싶어서 이렇게 키운 것도 아니고, 나는 알코올중독에 걸리고 싶어서 걸린 것이 아니다.나로 인해 가족이 병들어가는 것이 보였을 때, 감당할 수 없는 죄책감과 자괴감이 나를 감싸 안았다. 마음속에 있던 원망과 증오했던 감정이 사그라들었을 때, 나는 술 마실 이유를 만들기 위해 그 자리에 죄책감과 자괴감이라는 다른 감정을 마음속에 눌러 담았다. 이렇듯 알코올중독에 걸린 나는 정말 간사하고 합리화를 시키면서까지 술을 마셔왔다.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나와 내 가족이 병들어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술을 마시는 행동은 멈출 수 없었다. 감당할 수 없게 된 내 감정들을 술로 달랬고, 술로 나를 학대해왔다. 2019년 10월을 첫 입원으로, 27살부터 다사랑중앙병원에 여섯 번의 입퇴원을 반복해왔다. 3년 동안 입퇴원을 반복하면서 처음 입원 당시 무지했던 나는 알코올중독자가 아니라고 부정하고 합리화했지만, 점점 나의 술 문제가 더 심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마음속에선 ‘아니다 나는 술을 마실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했다. 본질적인 문제는 ‘술을 안 마시는 것’인데, 과거에 병식이 없던 시절부터 생각해보면 음주 방법과 주종, 양, 패턴 등을 바꿔보려고만 무던히 노력했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서서히 알코올 의존의 단계를 넘어 알코올중독의 깊고도 긴 빛이 없는 어둠의 길로 계속 숨어 들어갔었고, 결국엔 극단적인 선택까지 해버렸던 나는 이제는 알고 있다. 아니 살면서 계속 마음에 새기고 있을 것이다. 술을 마시면 결과는 죽음 밖에 없다는 사실을. 타 병원에도 한 번의 보호입원이 있었고, 다사랑중앙병원 여섯 번의 입원 중 마지막 입원을 제외하고 다섯 번이 보호입원 이었다. 다사랑중앙병원 마지막 입원 전, 다사랑중앙병원이 아닌 타 병원에 입원했다. 그 병원에서의 8개월 동안 폐쇄병동 생활은 내 의견과는 상관없이 입원 기간이 늘었고, 병원 복지도 좋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병원에 보낼 수 있는지 부모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알코올중독 환자분들 말고도 정신병 환자분들도 많았다.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고, 예민해져 갔다. 부모님께 수도 없이 퇴원 요구를 했지만, 절대 들어주지 않았다. 반복되는 퇴원 요구에 부모님과 마찰이 잦았다. 퇴원을 위해서 교묘하게 나는 알코올중독자인 ‘척’을 했다. 진심인‘척’, 인정하는 ‘척’했고, 퇴원을 위해 부모님께 가지고 있는 좋지 않은 감정을 숨겼다. 퇴원 직후에 강제로 입원하지 않을 정도로만 술을 마셨고, 음주 생활이 가능하다고 억지로라도 믿었다. 4개월의 조절음주 끝엔 장취로 이어졌고, 약과 술병을 손에 쥐고 있었다. 마지막 술잔을 든 날, 여름이라는 계절 어느 날 하늘에서 태양이 하염없이 빛을 내리쬐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아침부터 하루하루를 바쁘게 지내고 있는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나는 그 사람들 사이에서 오직 술만을 생각하며 초라한 행색으로 식은땀이 나고, 불안한 시선으로 편의점에 술을 사러 가고 있었다. 괜히 혼자 제 발 저리듯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고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걸음을 이어 나갔다. 마스크를 쓰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 나를 본 사람들은 내 얘길 하는 듯 한 느낌을 받으며 집 근처의 술을 사러 갔던 편의점을 들어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페트병 소주 3병을 집어 들고 계산했다. 자주 갔던 편의점이라 아침에 술을 사가는 나를 이상하게 보진 않았다. 편의점 사장님은 술을 너무 자주 마시는 것 아니냐고 걱정을 해주었지만, 얼른 그 자리를 뜨고 싶었던 나는 괜찮다며 실없는 웃음으로 대화를 끝내고 도망치듯 편의점을 나왔다. 검은 봉투에 소주를 들고 바로 옆에 있는 약국도 들어가 수면 유도제와 타이레놀 두 팩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님이 외출하고 아무도 없는 집에서 방으로 들어가 하염없이 울기 시작했다. 술로 찌들어 있던 내 정신은 나 자신을 경멸하고 또 경멸했다. 살면서 가장 서럽게 울고 또 울고 흐느꼈다. 지금도 이날을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술을 마시는 이유는 간단했다. 나를 최대한으로 불쌍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만들면 그만이었다. 나는 술을 마시기 위해서 나를 쓰레기로 만들어야 했고,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람도 나보다 불쌍한 사람이 있겠느냐고 합리화했고 반복적으로 생각했다. 나를 살아갈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취급했다.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로 마음을 먹었다. 술을 병째로 들이키면서 약 흡수가 빨리 되게 하려고 원래 가지고 있던 수면제와 약국에서 사온 약을 하나씩 하나씩 반으로 쪼개기 시작했다. 다른 생각은 나질 않았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모든 상황이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세상에서 사라지기를 결심하고 다 쪼갠 약을 입에 다 털어 넣고 남은 술이 다 떨어질 때까지 들이부었다. 내가 죽은 뒤에 있을 일은 생각도 하지 않고 아무런 고통 없이 죽기 위해 약을 선택한 그 순간까지도 나는 이기적이었다. 약기운과 술기운이 몸으로 퍼지는 게 느껴졌다. 의식이 조금씩 사라져갔다. 죽지 못한 채 다음 날 아침이 돼서야 긴 잠에서 깼다.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고, 숙취로 속은 장이 꼬이고 뒤틀린 듯한 고통을 느꼈다. 깨고 나서 마음속에 자리 잡은 자괴감과 자책감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내 마음을 후벼 팠다. 약과 술을 입에 털어 넣는 행동을 이틀을 더 반복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아무것도 먹지 않은 나는 계속 헛구역질을 하며 바닥에서 나뒹굴었고 몸은 감당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고, 그 모습을 안쓰럽게 방에 들어온 부모님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창피하고 자책감이고 뭐고 없었다. 부모님께 말했다. 살려달라고, 진심으로 술 마시지 않겠다고, 다사랑중앙병원에 보내달라고 울부짖었다.죽음의 문턱까지 갔을 때 살고 싶다는 생각은 정말 대단했다. 살면서 처음으로 생존본능을 느껴볼 수 있었다.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하기 전 일반병원 응급실에서 하루를 보냈다. 응급실에서 누워있는 동안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를 깨닫게 되었다.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져 있는 상태였지만,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30년 동안 살아온 내 인생 필름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에서 빠르게 지나갔다. 여태까지 술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한 내 마음을 바꾸게 된 날이었다. 나를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다. 나로 인해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보냈던 가족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집으로 똘똘 뭉친 제 머릿속의 실 뭉치가 조금씩 풀려가는 느낌이었다. 더 이상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과거에 얽매여 나를 불쌍하게만 생각했던 마음을 덜어냈다. 이 날 과거의 일로 후회하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3년간의 방황이 끝나고, 나의 의지로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한 것은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다시 태어났다는 마음가짐으로 병원 생활에 임했다. 잦은 입퇴원으로 병동 생활은 금방 적응할 수 있었고, 병원 치료진분들도 모두 잘해주셨다. 응급실에서 하루를 보내고 입원했더니 신체적으로는 금방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 관리병동에서 건강을 회복하고 여태까지 제대로 읽어본 적 없는 알코올에 관한 책들을 정독했다. 다 아는 내용이라며 대충 들었던 교육을 빠짐없이 집중해서 들었다. 상담사님과의 지속적인 면담을 통해 얻게 되는 지식과 도움은 단주하겠다는 나의 의지를 더욱더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었다. 교육 시간에 집중하니 알코올중독 문제에 대해서 새롭게 배우는 느낌이 들었다. 게을러지지 않으려고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 다사랑중앙병원의 힘은 참 신기했다. 그렇게 1단계 발표를 준비했다. 총 세 번의 1단계 발표가 있었지만, 진심으로 단주하겠다고 마음가짐이 달라지니 정말 신기하게도 더 정직하게, 심도 있게 술 문제들을 되짚어 보면서 진심으로 나는 술 앞에 무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시인할 수 있었다. 알코올중독자임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시인하고 개방병동으로 전동 했다. 개방병동에서의 나의 중점적인 목표는 ‘자기 객관화를 생활화하기’다. 일단 술이다. 개방병동에서만이 아니라 인생 살면서 술에 대한 경각심을 더 철저하고 깊이 있게 내 인생에서 떨어뜨려 놓을 것이라 다짐했다. 자기 객관화를 할 수 있으면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것,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 살아가면서 어떤 것이든 배워가는 것이 영적 성장이라고 생각한다. 내 인생에서 주인공은 가족도 아닌, 다른 누구도 아닌 ‘나’다. 궁극적으로는 내 마음을 건강하게 하고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힘쓰고 있다. 내 인생을 술로 인해서 더 이상 낭비하고 싶지 않다. 개방병동에서는 더 철저하게 나의 감정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감정의 요동이 있을 때는 상담사님과의 적극적인 대화를 통해서 하루하루 나를 검토해나갔다. 전동 후에도 교육을 빠짐없이 집중해서 들었다. 의구심 따위는 사치였다. 치료진들이 도움을 주면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따랐다. 모든 것은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던 마음가짐부터가 알코올중독의 시작이었다. A.A의 중요성도 받아들이고 인지했다. 조금씩 들리는 경험담들이 많아지고, 공감하고, 느껴보고, 내 경험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A.A의 효과는 굉장했다. 과거의 술 문제들을 꺼내놓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평온함을 찾을 수 있었다. 알코올중독자는 술로 인한 고통의 시간, 상황, 환경이 사람마다 다르지만, 술로 인한 고통과 아픔의 감정은 서로 비슷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A.A가 단주에 가장 효과적이라고 이야기하며, A.A의 멤버들이 A.A에 계속 매달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아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보다 더 많이 A.A에 매달릴 것이고, 억지로 믿는 것이 아닌, 믿어진다고(믿게 되었다!) 하는 A.A의 이야기처럼 점차 A.A가 나에게, 내가 A.A에 스며들 수 있도록 계속해서 노력하고 참여할 것이다.사람마다 마음의 그릇이 있다. 한번 금이 가고 깨진 그릇은 다시 붙여도 언젠간 다시 깨진다. 이제는 예전에 깨졌던 내 그릇을 다시 붙이려고 노력하지 않으려 한다. 대신 나는 담을 수 있을 만큼의 크기와 모양의 새로운 그릇을 빚고 있다. 아무리 잘했던 선택에도 모든 선택에는 후회가 따른다. 앞으로 내 선택에서 오는 조금의 후회도 책임질 것이고, 그 책임을 지면서 더욱더 단단한 그릇을 빚을 것이다. 최고가 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지 않고, 최선을 목표로 삼고 살아갈 것이다. 이 다짐이 나의 단주의 길이자 신념이다.
1389031911 2022-11-17
[2022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우수상] 술과 죽음, 인생의 목표는 이것뿐이었다.
[2022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우수상]술과 죽음, 인생의 목표는 이것뿐이었다. 한쪽에 자리한 돼지 저금통을 꺼내 들었다. 다행이다. 묵직한 저금통은 다행히 코 부분을 열수 있게 되어있다. 동전을 쏟아 500원짜리 동전을 골라내어 안도감에 동네 슈퍼로 술 사러 가는 나는 너무나도 발걸음이 가볍고 세상 근심 없는 사람이 된다. 어느새 저금통엔 100원짜리도 찾기가 어렵고 50원짜리 10원짜리로 술값을 맞춰서 다시 술 사러 가는 나는 이미 창피한 생각마저 할 수 없는 그저 술만 내 목구멍에 넘기면 되는 사람이 되었다. 음식을 먹을 수가 없다. 먹어야 하는데 이러다가는 무슨 사단이 벌어질 것이 분명한데 어떤 것도 모래를 씹는 것 같아 들어가지도 않게 된지 오래다. 살고 싶다는 희망도 이유도 잃어버리고 더 이상은 나로 인해 가족들에게 고통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나만 없으면 다 잘 살거라는 생각에 세상을 등지려고 몇 번을 했지만 그것마저도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얘기하면 죽을 용기도 죽으려는 마음보다 살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에 술 먹는 나를 그냥 놔두라는 쇼를 했다고 봐야 맞을 것이다. 삼성병원 정신병동의 두 차례의 입원 치료도 2014년 작년 두 번의 이곳 다사랑중앙병원에서의 입원 치료도 나는 항상 퇴원해서 알코올 중독에 대해서 자신감이 있었다. 그래 당신들이 말하는 병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잘 알겠다. 그리고 난 술을 끊을 수 있다. 언제든지 보여주겠다. 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 자만심은 술을 내가 컨트롤해서 마실 수 있다는 조절망상으로 이어졌고 여지없이 상황은 이전보다 더 악화되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알코올 중독은 진행성 질병이라 다시 마시게 되면 전에 마셨던 것보다 더 마시게 되고 그 피해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더욱 커지는 질병이라는 것을 알았다.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그것 역시 내가 직접 경험을 하고서야 알았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술을 목구멍에 털어 넣기 위해 잠에서 깨고 술기운이 몸에서 빠져 나가면 심한 불안감과 손을 주체할 수 없이 떨리고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헛것이 보이고 무언가가 다른 소리가 들리는 지경까지 되어 버린 나를 발견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술을 먹기 위해 하루를 버티며 온통 머릿속에는 여기저기 감춰놓은 술을 찾는데 다 써버리는 인간이 되어 버렸다. 언제부터인가 이제는 술도 넘기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넘기려하면 손에 들려진 술병을 입으로 가져가는 나에게 ‘도대체 너 지금 뭐하고 있는 거냐! 이 미친놈아!; 하면서 자책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술을 마실 수도 없고 안마실수도 없는 나의 의지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이 현실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서서히 미쳐가고 있구나,,,, 벌레만도 못한 상태로 살아 갈 수밖에 없구나, 또다시 자기 연민에 이렇게 하면 죽을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그렇게 조금 시간을 두고 금단을 견디며 버티다 술을 넘길 수 있는 상태가 되면 다시 술을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몸무게가 10kg이 넘게 빠져 이미 육신은 피골이 상접하고 걷기도 힘든 지경에 이르러 한번 몸이 기울어지면 중심을 잡고 바로 세우지 못하고 넘어지는 일도 많았다. 균형 감각도 다 죽어버린 모양이다.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닌 몰골로 오직 밖으로는 술 사러 가기 위해서나 담배를 피러 나가는 상태인데도 일요일 주일엔 예외였다. 아내의 지갑에서 몰래 훔친 돈으로 나를 만족시킬 만큼의 술을 먹기도 어느 때부터는 부족했다. 이렇게 되어 버리니 가족들은 나에게 카드도, 돈도 줄 수가 없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아내가 얘기한다. “ 당신 교회 갈수 있겠어?” “가야지” 대답하고는 휘청휘청 씻고 옷을 갈아입고 교회 갈 준비를 한다. 아내가 나와 결혼할 때 결혼 조건으로 유일하게 내놓았던 것이 있었다. ‘함께 교회 열심히 다니며 신앙생활 하는 것’ 딱 한가지였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몸도 제대로 못 가누면서 교회에 가겠다고 채비하고 나서는 게 아니었다. “헌금”이다. 나에게서 돈을 끊어버린 아내였지만 교회에 가면 나에게 만원의 헌금이 생긴다. 나는 그 돈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오로지 술을 사기 위해서... 그렇게 나는 주일날 헌금을 가지고 술을 사기 위해 교회로 향한다. 교회에서도 온통 내 머릿속엔 빨리 끝내고 나가서 술을 사야한다는 생각밖에 없다. 결국 예배가 끝나기 전에 교회를 빠져나와 편의점에서 술을 사들고 집 입구에서 몇 모금 들이킨 후 남은 술을 곳곳에 숨겨 놓은 후에야 안도 한다. 교회에서 다른 신도들이 인간의 모습이라고는 볼 수 없는 나를 쳐다보는 시선 따위는 전혀 느낄 수도 없고 관심도 없는 나의 정신상태였다. 이런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엄마의 심정을 어떠했을까... 억장이 무너지셨을 거다. 하염없이 가슴을 치며 통곡의 기도를 하셨을 어머니시다. 머지않아 이렇게 쓰레기 같은 나도 죽게 되리란 생각을 하고 이제는 죽기위해 술을 마신다는 한 가지 이유를 더해 잠도 잘 수 없는 상태에까지 가게 되는 상황까지 와 있었다. 이 세상에 나 하나만 없으면 된다. 끝내자 이만... 그런데 어느 날 불현 듯 나를 깨우는 소리 없는 외침이 가슴을 때렸다. 나는 나 하나쯤은 이 세상에 없어져도 아무 상관이 없다. 하지만 어머니와 나의 아내는 지금까지 이런 나를 붙잡고 버리지 않고 그들이 믿는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하고 살아온 세월은 그 억울함과 맺힌 한은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이기적이고 나 하나 편하자고 죽어버리면 그만이지만 그들이 평생 가지고 가야하는 고통스런 인생은 어떡하란 말인가. 어떻게 그 순간 정신도 희미한 상태에서 나에게 그런 외침이 들렸는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시 살아 내라는 위대하신 힘의 이끌림이었던 것 같다. 이제 살아야겠다. 아주 조금이라도 사람 구실하면서 살아보고 싶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이 없었다. 철저하게 술 앞에 항복한 나로선 술업이 사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이전에 두 번의 입?퇴원을 했던 다사랑 중앙병원이 떠올랐고 아내에게 생일이라고 차려진 저녁 식탁에서 이제 나에게는 오늘이 마지막 술잔이라고 나는 술을 먹어서는 도저히 살수 없는 놈이라고 술업이 남은 인생을 살아 보겠노라고 그렇게 나는 나의 생일날인 4월 20일 다사랑 중앙병원에 입원을 선택했다. 그렇게 한 달간 6병동(관리병동)에서 생활하고 개방병동으로 전동하기 전에 1단계 발표를 하던 순간은 나에게 잊지 못할 날이 되었다. 12단계 중 1단게... “나는 알코올에 무력...” 여기까지 읽고 나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고작 이 몇 글자 속에 있는 ‘무력’을 인정하는데 너무 많은 것을 잃었고 가족과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며 너무 멀리 오랜 세월이 걸렸다는 통한의 눈물이었던 것 같다. 겨우겨우 발표를 마치고 개방병동으로 전동해서 나에게는 정말 소중한 개방병동 생활을 시작했다. 개방병동 생활은 나를 뒤돌아보고 앞날을 설계하는 시간으로 보낼 수 있었다. 12단계 책이 읽으려고 해도 책장이 넘어가지 않았는데 문칠균 상담사님의 4단계 수업에서 정말 감동을 받아 그동안 왜 어려운 프로그램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철저하게 술에 항복했다고 하더라도 회복하고 유지하면서 살아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것이 비단 술만 끊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도덕적 검토’로 나의 결점을 끄집어내고 고백하고 끊임없이 검토를 해야 교활하고 강력한 알코올로부터 이겨낼 수 있는 힘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12단계 프로그램의 힘을 지금도 나는 꼭 붙들고 가야할 정말 위대한 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다사랑 개방병동에서의 다른 프로그램들도 나의 회복하는 생활에 너무도 큰 도움이 되었다. ‘현실치료’, ‘인지행동치료’, ‘중독심리학’,‘재발방지 교육’ 절실한 마음으로 다가선 이 모든 수업은 나에게 회복의 길에 안내자 역할을 해주었고 단주를 결심하고 회복을 하겠다는 환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잘 갖춰진 시스템과 교육 프로그램이었다. 다사랑 중앙병원에 입원해서 이런 교육과 회복자인 송현정 상담사와의 진솔한 상담 과정은 나에게는 정말 소중하고 감사한 행운이었다. 온라인으로 참여했던 AA 모임도 좋았고 뭔가 부족했던 부분이었는데 병원 자체적으로 매주 수요일에 있었던 AA 모임인 ‘늘푸른 모임’도 큰 힘이 되었다. 다른 환우들의 경험담을 통해서 나 혼자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과 함께 서로 협심자가 되어 서로의 메신저가 될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퇴원 후 오프라인 AA 모임에서의 활동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병원생활에서 또 한 가지 얻은 큰 수확이 있었다면 온전히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 속에 ‘애니어그램’을 통해 나의 성격 유형을 알게 되고 오래전 내가 봉사활동을 갔을 때 가슴속에서 뜨거운 감정을 느꼈던 적이 있었다는 것을 끄집어 낼 수 있었다. 그것이 지금 ‘사회 복지사’ 공부를 시작하게 된 계기로 연결되어 차후에는 취약계층과 소외받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며 인생 후반전을 보람 있게 살아 보자는 다짐이 되었다. 병원에서의 4단계, 9단계 발표 역시 꼭 필요했던 것으로 감사했다. 모든 사건과 어려움은 타인이 아닌 나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과 그로인해 내가 얼마나 많은 해를 끼치며 살아왔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다시 한 번 다짐할 수 있는 중요한 절차이자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2022년 7월 23일 약 100여일의 병원 생활을 마치고 퇴원한 나는 하루하루에 감사하며 생활하고 있다. 아직 가야할 길이 먼 마라톤과 같은 회복의 길이지만 한걸음, 한걸음 조금씩 나아지는 나의 정신과 희망으로 준비되어 가고 있다. 사회복지사 공부도 어느새 한 학기 중간고사를 보게 되었고 즐거운 마음으로 해 나가고 있다. 병원에서 경험한 AA 모임도 내 삶의 중요한 일부분으로 자리하며 백일작전을 감사한 마음으로 하고 있다. 감사하게도 사회봉사도 온, 오프라인에서 할 수 있도록 허락되어졌다. 아직 마지막 술잔을 놓은 지 6개월이 채 안되었지만 삶에 대한 나의 태도는 180도 바뀌어 있다. 술과 즉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나에게는 실로 기적과 같은 일이라고 생각 할 수밖에 없을 정도의 형온할수 없는 매 순간과 나날들이다. 술에 찌든 인간이 아닌 인간 냄새 사람 냄새 풍기며 살아보자고 재차 다짐해 본다. 다시 한 번 이 순간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다사랑 중앙병원의 모든 치료진께도 너무나도 감사드린다. 정말 간절하게 성공적인 회복자가 되어서 아직도 고통 받고 있는 수많은 알코올 중독자에게 메시지를 전할 수 있고 조금의 도움이라도 주면서 살아 갈 수 있는 AA 멤버 ‘양재 정“이 되기를 희망해 본다. 감사합니다.
1389031911 2022-11-17
[2022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장려상] 새로운 삶을 위한 시작!
[2022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장려상]새로운 삶을 위한 시작! 저는 어렸을 적 엄한 아버지와 자상하신 어머니 그리고 형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제가 바라본 아버지는 무섭고 무뚝뚝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저녁상에는 . 항상 술병이 올라와 있었고 아버지는 밥을 안주 삼아 술을 드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술 때문에 사회생활이나 경제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시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지역 사회에서 봉사도 많이 하시고 다른 사람 부럽지 않게 사시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하곤 했습니다. 경제적인 부분이나 사회생활 부분이나 아버지는 두려움에 대상이기도 했지만, 저의 우상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배구”라는 운동을 중학교 때부터 시작했습니다. 운동 생활을 한다는 것은 마치 군대생활을 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항상 배구부 숙소나 체육관에 있어야 하고 감독님께서 외박이나 휴가를 주시기 전까지는 집에 가거나 외출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학생시절에 가고 싶은 곳도 많았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오로지 배구만을 할 수 밖에 없는 삶을 살았었습니다. 그렇게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을 학교에 감금(?)되어서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항상 자유를 꿈꾸며 중·고등학교 생활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대학교에 입학을 하면서 저의 “자유로운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6년 동안 학교에서 운동만 하던 제가 지방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면서 부모님도 저를 감시하거나 터치할 수 없는 그런 생활이 시작 된 것입니다. 꿈만 꾸었던 자유로운 생활이 시작되니 “술”이라는 것이 제 인생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대학교 생활 동안 일주일에 5회 이상 술을 마셨습니다. 친구와 마시고, 선배와 마시고, 후배와 마시고, 여자 친구와 마시고 등등 셀 수 없이 술을 마셨습니다. 대학교 생활을 하는 동안 공부와 운동을 병행하며 생활을 했기 때문에 술로 인한 사고는 없이 술을 마셨고 정말 그 시절에는 “애주가‘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대학 생활을 마치고 군대를 다녀와서 취업이라는 전선에 뛰어 들었습니다 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지방에서 서울로 학원을 다니며 취업 준비를 했습니다. 이때는 술을 마시지 않고 지내는 시기였습니다. 운이 좋은 탓인지 제가 원하는 직업을 갖게 되었고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 기분 좋은 것도 잠시였습니다. 회사에서는 스트레스를 받게 되었고 그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방법은 술을 마시는 것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 저는 부모님과 함께 살았었는데 부모님께서 제가 술 마시는 것을 싫어하셔서 퇴근할 때 몰래 가방에 소주를 넣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저의 혼 술이 시작되었습니다. 퇴근을 하고 집에 들어오면 어머니가 주시는 밥을 먹고 방으로 들어가서 퇴근할 때 사온 소주를 마시며 영화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중에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마땅한 안주는 없었지만 소주를 마시면서 점점 취기가 올라오면서 마치 제가 영화의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을 받으며 그 취기를 즐기는 그 시간이 저에게는 너무 소중했습니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몇 번 정도 그렇게 하다가 점점 횟수가 늘어서 거의 매일 혼 술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혼 술이 그렇게 무서운 것인 줄은.... 그 후 술이 나를 집어 삼켜 나를 그토록 망가트릴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당시 사귀던 여자 친구가 있었고 저는 그 여자 친구를 정말 사랑했습니다. 제 나이 29살 때 결혼을 하자고 청혼을 하였습니다. 여자 친구는 청혼을 받아주었고 그 다음 해인 30살에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와이프는 제 말을 존중해 주고 성격과 의견이 정말 잘 맞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결혼생활이 시작되고 저희는 분가를 해서 자유로운 삶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부모님과 함께 살던 때와 다르게 마음껏 술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즐거웠습니다. 사랑하는 와이프와 한 집에서 살게 된 것도 즐거웠고, 제가 좋아하는 술을 아무리 마셔도 와이프는 크게 잔소리를 하지 않는 것이 더욱 저를 즐겁게 만들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술자리를 하는 날도 늘어나고 저는 고삐가 풀인 망아지처럼 술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와이프는 제 건강을 걱정하는 눈치였지만, 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술을 마셨습니다. 결혼 후 저는 매일 술을 마시게 되었고, 집에 술이 떨어지는 날은 없었습니다. 운전을 하지 않아도 되는 주말이 되면 아침부터 마셨습니다. 평일에는 출근을 해야 하는 어쩔 수없이 아침부터 마실 수 없었지만, 특별히 아버지 댁이나 처갓집 방문 등을 하지 않는 날이면 항상 해장술을 마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루 종일 술에 취해서 집안을 헤집고 다니곤 했습니다. 술은 저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아주 소중한 것이 되어있었습니다. 세상에 나 혼자 남아도 술만 내 옆에 있다면 저는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사실 그랬었던 것 같습니다. 친구를 만나도, 직장 동료와 함께 하더라도, 세상 누구와 함께 있더라도 술이 빠져있는 제 인생을 상상을 할 수도 없었고 상상을 해보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매일 술을 찾았고 그 때마다 술은 저에게 와주었습니다. 내 목으로 술이 넘어가는 그 순간은 너무 황홀했고 기뻤고 무아지경에 빠지는 듯 한 느낌을 저에게 주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술을 너무 사랑했습니다. 제가 망가지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술을 사랑했습니다. 술과 함께 살아가는 날이 쌓여가니 저의 몸도 슬슬 신호를 보내왔습니다. 회사에서 점심을 먹고 있을 때 코피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코피가 가끔 나니깐 잠시 지혈을 하고 나면 멈추겠지 하고 지혈을 하는데 지혈 후에 또 코피가 나고 또 지혈 하고 또 코피가 나고 그러다가 코피가 멈추지 않게 되었습니다. 피가 계속 쏟아지고 있으니 너무 놀라서 119를 타고 인근 병원으로 갔는데 큰 병원으로 가라고 해서 대학 병원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병원에 도착을 하니 혈압을 먼저 체크했습니다. 혈압이 230이 넘어서 혈압을 떨어뜨리는 약을 먹고 주사를 맞아도 190이하로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혈압이 떨어져야 코피도 멈춘다고 했는데 거의 밤새 약을 먹고 주사를 맞으며 코를 틀어막아 코피를 멈추기는 했지만 그 때부터 고혈압 판정을 받고 지금까지도 고혈압 약을 복용하고 있습니다. 피가 나기 시작했을 때 코에서 피가 났으니 코피로 끝났지 머리에서 터졌으면 뇌출혈로 위험할 수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 후로 또 음주가 지속적으로 이어졌습니다. 고혈압은 약을 먹으니 이제 코피가 터질 일은 없으니 그 일이 있기 전과 동일하게 술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배가 너무 아파서 위염인 줄 알고 참고 참다가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가게 되었는데 처음 들어보는 “췌장염” 이었습니다. 대학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고 저는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3일을 보냈습니다. 제가 깨어나고 보니 3일이 지나 있었습니다. 그 동안 수도 없는 진통제를 맞으면서 숨만 쉬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저는 세상에서 그렇게 아픈 병이 있는지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술이라고 의사선생님께서 말씀을 하셨고 퇴원을 할 때 기름진 음식과 술은 절대 마시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퇴원을 한 후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 다짐은 2달을 못 넘겼고 다시 조절 음주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소주 1병만 또 오늘은 소주 2병만, 또 오늘은 소주 3병만 또 오늘은 소주4병만 이렇게 전처럼 마시기로 돌아오기까지 1달도 걸리지 않아 예전처럼 또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고혈압과 고지혈증 그리고 췌장염까지 오니 와이프의 잔소리는 더욱 심해져 갔습니다. 그래도 아랑곳 하지 않고 마셔댔습니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췌장염 너무 ……. 많이 아팠습니다. 또 다짐을 했습니다.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지속적인 음주, 저는 다짐 했습니다. 취할 때까지 마시지 않겠다고, 회식 때만 술을 마시겠다고, 약속이 있을 때만 마시겠다고, 집에는 술을 사오지 않겠다고, 해장술을 절대로 마시지 않겠다고, 1차만 마시겠다고, 밤 12시 전까지만 마시겠다고, 와이프의 잔소리가 심해지면 마시지 않겠다고, 친구들과 헤어지면 더 이상 술을 사지 않겠다고, 더 마시자고 친구들에게 조르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을 하고 또 다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다짐 따위는 필요가 없었습니다. 모든 다짐을 뒤로하고 저는 또 취하고, 회식이 끝나면 2차 가자고 선동을 했고 또 3차로 이어지고 해장술을 마시고, 약속을 만들어서 술을 마시고, 약속이 안 잡히면 혼자 술을 마시고,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또 취했습니다. 이제 제가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닌 술이 저를 삼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또 찾아온 췌장염, 이번에는 췌장염만 오지 않았습니다. 알코올성 섬망이 같이 왔습니다. 섬망이 점점 심해져 갈 때 저는 환청부터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환시, 저는 그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간호사들과 . 보호사들은 모두 괴물로 보이기 시작했고 저는 그들과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섬망이 진행되는 동안 저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와이프까지도 밀어내 버리고 저의 폭력적인 행동은 계속 되었다고 합니다. 어쩔 수 없이 다른 병원의 중환자실로 입원이 되어버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저의 팔과 다리, 머리는 묶여 있었고 화장실을 가고 싶다고 하니 기저귀를 채워놨으니 그냥 싸도 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중환자실에서 며칠을 보내고 일반 병실에서 입원해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주변 사람들을 고생 시키고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다시 술잔을 잡았습니다. 다사랑중앙병원을 처음 알게 된 후 와이프는 입원이 아니더라도 상담과 약물치료를 받는 것이 어떠냐고 저에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다사랑 중앙병원을 내원하게 되고 상담과 약물치료를 받으며 단주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잠시 처제 집에 놀러갔을 때 그 단주는 깨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처제 집에서 엄청난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그 일로 와이프는 아이들을 데리고 처갓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 “될 대로 되라” 라는 마음으로 혼자 집에서 폭음과 장취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와이프가 2달 만에 집에 돌아와서 하는 말이 “정신병원에 입원할래? 아니면 나랑 이혼할래?”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이혼하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입원할 당시에도 술에 너무 취한 상태여서 무조건 입원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자 너무 후회가 돼서 병원 내에서 난동을 부렸습니다. 다시 저의 팔과 다리는 침대에 묶이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으며 처음에는 감옥 같아서 너무 싫었습니다. 폐쇄병동에 갇혀서 3일 동안 주사를 맞으며 감옥 같은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나마 담배를 피울 수 있어서 그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3일이 지나고 교육을 받으러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솔직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지루하기만 하고 재미도 없고 남는 것도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간식비로 노트와 펜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교육 시간에 강사님들이 교육하는 내용을 받아 적기 시작했습니다. 집중을 하여 교육을 받다보니 생각보다 교육 시간이 재미가 있었습니다. 유익한 정보도 많이 있었고 저의 단주에 도움이 되는 교육 내용들이 좋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육을 받고 상담사님께서 주시는 숙제를 해 나가면서 조금씩 병원에 적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집에서 성경책을 보내왔습니다. 어머니께서 시간이 남을 때 성경을 필사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교육 시간에는 교육에 집중을 하고 남는 시간에는 담배도 피고, 운동도 하고, 성경 필사도 하고, 다른 환우들과 친하게 지내기도 했습니다. 처음에 입원 했을 때는 도통 잠이 오질 않아 수면제를 언제 주냐며 간호사님들께 호소도 하고 적응을 잘하지 못하였지만 간호사님들과 보호사님, 상담사님, 주치의 선생님들이 너무 잘 해주셔서 빨리 적응을 한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5주라는 시간 동안 폐쇄 병동에서 지내다가 1단계 발표를 하고 개방 병동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폐쇄병동과 시스템이 조금 달라서 적응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 개방 병동이 조금 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개방병동으로 이동해서 가장 특이했던 점 3가지가 있었습니다. 수요일 저녁마다 AA모임을 했었는데 처음 하는 모임이라서 뭐가 뭔지 모르고 참석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외출 시간이 주어져서 그 시간에 간식을 사러가거나 산책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었습니다. 그리고 폐쇄 병동에서 보다 더 많은 지식을 쌓을 수 있는 교육 시간이 주어졌었습니다. 12단계 프로그램, 온전한 생활, 사회 기술 훈련, 현실 치료, 인지행동치료, 4 단계 발표, 재발방지 집단, 에니어그램, 기도와 명상 등 많은 프로그램들이 있어서 저에게는 더 없이 좋은 교육이 되었습니다. 특히 에니어그램으로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하루는 같은 방을 쓰는 환우가 외출 시간이 끝나도 돌아오질 않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집에 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며칠 뒤에 그분의 짐을 가져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저의 마음은 동요되었었습니다. “나도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 많이 들어서 힘든 시간을 보냈었습니다. 폐쇄병동에 있을 때부터 부모님께 그리고 와이프에게 나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오던 저이기 때문에 집에 가고 싶다는 마음은 더욱 커져 갔습니다. 그렇게 개방 병동에서 지내면서 식사도 하고, 교육도 받고, 필사도 하고, 운동도 하고, 담배도 피고, 야식도 먹고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퇴원 날짜가 점점 다가왔습니다. 정말 꿈만 같았습니다. 저의 정신병원 생활이 드디어 끝나는 구나 다시는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으리. 꼭 단주에 성공해야 갰다는 마음을 하루에도 1,000번 이상 했습니다. 그렇게 퇴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퇴원을 하니 정말 세상을 다 얻은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식구들과 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3달을 채우지 못하고 저는 몰래 술을 다시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아메리카 노에 소주를 섞어서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몰래 술을 조금씩 마시게 되었습니다. 담배 한 대 피러 나갔다 온다고 하고 소주 반병, 또 담배 핀다고 나가서 한 병, 밤에 잠이 오지 않는다고 편의점 다녀온다고 하고 또 한 병, 한 병으로 부족하니 소주병을 숨겨 놓고 왔다 갔다 하면서 계속해서 마시게 되었습니다. 결론은 다시 정신 병원으로 입원이었습니다. 술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저를 데리고 정신 병원 앞으로 가서 “이혼 할래? 입원 할래?” 라는 말을 또 했습니다. 저는 가게에서 과자하나만 사달라고 하고 재빠르게 소주 한 병을 집어서 부어대기 시작했습니다. 소주 한 병을 마시고 나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내 발로 들어갈게”라고 이야기 하고 다시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두 번째 입원을 하고 병원에서 많이 울었습니다. 첫 번째 입원을 했을 때 사람들이 처음 입원하는 게 힘든 일이지, 두 번 세 번 여러 번 입원하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미친 거 아니야? 여기가 뭐가 좋다고 또 들어온단 말이야,” 라고 생각 했었는데 제가 두 번째 입원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저는 또 입원을 하고 말았습니다. 많은 후회가 밀려 왔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너무 미안했습니다. 그래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후회하고 또 후회 했습니다. 너무도 고통스러운 시간을 병원에서 보내고 있었습니다. 밥도 먹지 못하겠고 시간이 가지 않고 저에게는 정말 지옥과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다시는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하고 또 했습니다. 퇴원을 한 후 단주를 하리라고 다짐 했습니다. 절대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술을 마시지 않겠노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단주는 쉽지 않았습니다. 편의점에 있는 소주가 저를 부르는 말소리가 들리는 듯 했습니다. 그래도 참았습니다. “갈망”이 몰려 왔지만 그래도 참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생단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무조건 참아야 한다는 마음 밖에는 없었습니다. 방법을 찾던 중 “AA” 온라인 모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핸드폰으로 “온라인 AA 모임”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대체 이걸 왜 들으라고 하는 건지”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지만 계속 듣다 보니 조금씩 무언가가 마음을 움직이게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오프라인 AA 모임” 찾아가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온라인 AA모임"에서 알게 된 멤버에게 물어 물어서 “안산 AA모임”에 찾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많이 어색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몰라서 듣기만 하다가 저도 “경험담”을 시작했습니다. 이상하게 모임을 하고 집에 갈 때면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 때 마음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게 오프라인 모임의 힘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안산 AA모임”에 사회봉사를 맡고 있으며 “수원성 AA모임”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의 오프라인 모임에 참여하고 있으며 시간일 날 때마다 “회복의 힘”이라는 책을 필사하고 위대한 힘께 저를 맡기고 저의 생각이 먼저가 아닌 위대한 힘의 뜻을 따르는 단주 생활과 회복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병원에 입원 했을 때의 기억이 현재 단주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병원에서 얻은 것들과 AA모임에서 얻은 힘, 그리고 여러 협심자 선생님들이 나누어 준 힘 등에 도움을 받아 지난 8월에는 1년 단주 칩을 받고 단주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술을 마셨을 때 저의 생활과 단주를 하고 있는 현재의 삶은 삶의 질이 달라져서 건강하고 밝은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제가 된 것 같아서 너무 기쁩니다. 단주와 회복의 삶을 이어가서 보다 성장된 저를 만들기 위해 항상 노력해야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저의 새로운 삶을 위한 시간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글을 읽어 주신 많은 선생님들께 감사드리며 “술 = 죽음”, “단주 = 행복”이라는 단어를 기억하고 12단계 중“ 우리는 알코올에 무력했으며, 우리의 삶을 수습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시인했다”를 기억하고 실천한다면 단주를 성공할 수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선생님들의 앞날에 무궁한 발전이 있기를 바라면서 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389031911 2022-11-17
[2022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장려상] 알코올중독의 대물림을 끊고 싶다!
[2022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장려상]알코올중독의 대물림을 끊고 싶다! 나는 1968년도 강원도 산골 마을에 한 알코올중독 가정에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술만 드시면 주사가 심했고, 내가 돌이 되기도 전에 음주폭력이 심해져서 어머니는 갓난아이를 두고 외가댁으로 피신하는 날이 많아 모유를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자랐다. 아버지가 술 마시고 오는 날이면 늘 집안은 초긴장 상태가 되었으며 걸핏하면 큰소리 지르고, 어머니를 폭행하고, 살림살이 때려 부수고, 밥통에 농약 뿌려놓고, 잠 못 자게 밤새도록 한 이야기 또 하고, 이런 환경 속에서 어머니와 우리 3남매는 허구한 날 쫒겨 나서 이웃집에서 잠을 자고 밥도 얻어먹으면서 생활하다 보니 학교 공부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고, 중학교 3학년 2학기말에는 학교가지 말라며 교복과 책가방을 부엌 아궁이에 넣고 불태운 일도 있었다. 계속되는 가정폭력을 견디지 못한 어머니는 아예 가출을 하셨고, 할머님이 오셔서 농사일을 도우며 함께 생활하게 되었지만, 아버지 술 문제는 멈추어지지가 않았다. 농번기에는 아버지 대신 내가 마을 품앗이를 나가면, 농촌의 특성상 아침 일찍 일을 시작하기 전에 마을 아저씨들은 둘러 앉아 소주를 대접에 한잔씩 마시고 일할 준비를 하는데 아저씨들이 주는 술을 거부감 없이 나도 받아 마시게 되었다. 처음 술을 접했을 때는 쓰디쓴 맛이었고 잠시 후 속이 따뜻해지며 얼큰한 상태로 일을 하게 되면 힘이 덜 드는것 같았지만, 그렇게 시작된 술이 훗날 알코올중독이라는 멍에를 나에게 씌울 줄은 미처 몰랐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농사일과 소 먹이 꼴을 베느라 바빠서 공부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아버지 술주정을 견디어가며 ,가을 추수를 끝내고 땔나무를 넉넉하게 해놓고 지긋지긋한 집구석이 싫어서 겨울 방학을 이용해 , 무작정 원주 시내로 뛰쳐나왔다. 다행이도 5촌 당숙의 소개로 원주 산업단지 길 건너 맞은편 작은 공업사에서 허드렛일을 하게 되었고, 작은 창고방 간이침대에서 추운 겨울밤을 보내야 했다. 밤에 전깃불을 끄면 시궁쥐가 침대위에 까지 올라와서 깜짝 놀라 잠에서 깰 때도 있었고, 저녁 늦게까지 힘든 일이 고되어 매일 세수할 때면 코피를 흘리면서도 돈을 모아야겠다는 생각에 술집에서 마시는 일은 없었지만, 마음이 서글프고 괴로울 때면 가끔 소주를 한병 사다가 간이침대에 앉아서 마시곤 했다. 하늘도 무심하신지, 일을 시작한지 두어 달 즈음 마을 이장님으로부터 공업사 전화기로 아버지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 짐을 챙겨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어떻게 생겨먹은 인생이 이렇게 지지리도 복이 없는지....... 소박한 계획마저도 물거품이 되었고 아버지는 죽으면서 까지 내 앞길을 막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시골 5일장 날 밤늦게 까지 술을 마시고, 눈이 하얗게 내린 추운 동지섣달에 논두렁길을 걸어오다 아래쪽으로 미끄러져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동사했고, 그때에 아버지 나이 마흔두 살 이었고, 어린 동생들을 내게 맞기고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장례를 치른 후 친척들의 권유로 어쩔 수 없이 한해 농사를 더 짖게 되었다. 봄에 소 두 마리 쟁기질로 논과 밭을 갈 때는 허리가 끊어질 듯 한 고통에 술을 마시며 하루 종일 일을 했고 , 여름밤엔 무논에서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를 들으며 기막힌 내 현실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울기도 했었다. 한 해 농사를 마치고 할머님과 상의해서 시골 생활을 정리하고 나는 서울로 상경하여 고모부님 소개로 직장을 구하게 되었고 , 하숙을 하며 서울생활이 시작 되었다. 1986년도 아시안게임 유치 기념행사가 여의도 한강 시민공원에서 한창일 때, 마포대교를 걸어서 퇴근했고, 만리동 산동네 하숙집에 도착하면 하루의 피로를 풀기위해 술을 마시고 잠을 청하곤 했지만, 혈기 왕성한 20대 초반이라 일에 지장은 없었다. 성실하게 근무한 결과 사장님께 인정받게 되었고, 월급 20만원 중에 18만원을 정기적금을 들면서 돈을 모아 2년후 나는 독립해서 작지만 내 사업장을 갖게 되었다. 관악구 봉천동에 자리 잡고 헤어져 살던 동생들을 데려와서 함께 생활하게 되었고, 사업도 잘 되어서 전국에 건설현장을 다니며 일을 했고 퇴근해서는 술집에 들러 거하게 마시고 귀가 하는 것이 당연한 일과가 되었다. 이 무렵 여동생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나 1년 교재 후 결혼하여 아들 둘을 키우고 살면서 술은 많이 마시는 편이었지만 술 문제는 밤늦게 까지 친구들과 어울리고 돈이 지출 되는 것 외에는 기억나는 것이 별로 없다. 2000년도 서울시 6차 동시분양 아파트 청약자 모집 광고를 보고, 총각 때부터 들어놓은 청약부금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주택은행에 신청한 결과 40대1의 경쟁에서 당첨되어 지금 거주하고 있는 상도동 래미안 아파트로 이사 왔다. 새 집으로 이사 올 때 아내와 아이들은 무척 좋아 했고, 서른다섯 이내에 서울에 내 집 장만의 목표도 이루었다. 새 집에 와서 막내를 낳았고 특별한 관심과 애정으로 키웠고, 올해 고등학교 1학년에 다니고 있다. 나는 나름대로 사업을 꾸려가면서 가장으로써 책임과 의무를 다하려고 노력 했지만 늘 혼자인 듯 외롭고 우울하며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몰려오면 항상 술을 마셨다. 좋아서 마신 것보다 습관적으로 마셨다. 음주량도 많아지고 횟수도 잦아지면서 음주 문제가 심각해지기 시작한 것은 40대 후반부터 인 것 같다. 자아 방어기재(부정 , 투사 , 최소화 , 합리화)는 심했고 ,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 사고로 감정적 분규가 있을 때면,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는데 일단 마시고 보자는 생각이 먼저였고 자기연민에 빠져서 우울증 화병 진단을 받고 약을 복용 하면서도 의사의 금주 권고를 무시하고 갈망감을 견디지 못해서 술을 마셨다. 밖에서 지인과 술자리를 하게 되면 폭음을 해서 다음날이면 어떤 대화를 했는지 술을 얼마나 몇 병이나 마셨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 불랙아웃이 자주 있었다. 심지어 폭음으로 의식을 잃고 길거리에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간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이 무렵 불면증이 심해서 술을 마셔도 잠을 못자고 7일간을 밤낮으로 전혀 잠을 잘 수 없었고 피곤함과 그 고통을 견딜 수 없어서 수면제를 처방받아 약의 도움으로 잠들기 시작했다. 술을 마셔도 집은 잘 찾아 갔는데 때로는 방향 감각을 상실하여 엉뚱한 곳에서 헤매는 일도 있었고, 윗 층의 층간소음 문제로 취중에 칼을 들고 올라가서 시끄럽게 소란을 일으켜 경찰에 연행되어 유치장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나와 후에 검찰청에 불려가서 조사를 받기도 했다. 어느 일요일 아침부터 막걸리를 식탁에 앉아서 마시다가 아내의 핀잔과 비난에 화가 나서 언성이 높아 졌는데 , 자고 있던 큰 아이가 화를 내며 나와서 내 어깨를 밀쳤고 나는 거실 바닥에 뒤로 넘어 지면서 배신감에 눈에 보이는게 없었다. 해병대 전역하고 대학 졸업해서 직장에 다니는 큰아들에게 “낳아서 길러준 아버지한테 이런 식으로 밖에 못해?” 라고 하며 분노가 폭발하여 과도를 휘둘러 피하는 아이에 손을 베어 거실에 피가 낭자했고, 둘째 아이가 뒤에서 꽉 안고 있는 사이 경찰이 오고 큰아이는 응급실로 가고 나는 경찰서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다음날 술이 들깬 상태에서 집구석이 싫다는 이유로 옷가지를 챙기러 집에 왔는데 , 디지털 도어락은 열리는데 보조 잠금 장치가 잠겨있어서 현관문을 열수 없자 해머로 도어락을 부수고 열쇠 수리공을 불러 잠금장치를 해제 시키고 가방을 싸서 집을 나왔다. 마땅히 갈곳이 없으니 인근에 있는 모텔로 가서 장기 투숙할 요량으로 한 달 숙박료를 계산했다. 화도 나고 술이나 마셔야겠다고 밖으로 나가서 소주 10병을 사와서 모텔방에 앉아 글라스 잔에 술을 따라 마시고 있자니 알코올이 온몸에 퍼지면서 세상만사가 편안하게 느껴졌다. 술 먹는다고 잔소리를 하는 사람이 없어서 좋고, 쉬면서 일 있으면 나가고 마음 편하게 살아보자는 생각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몰랐었다 내가 알코올에 무력했으며, 내 삶을 수습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집을 나갔다는 소식을 들은 광명시에 살고계신 막내 고모로부터 전화가 와서 하시는 말씀이 “너 지금 어디에 있어? 고모가 너 살려 줄게 병원에 입원하자. 꼼짝 말고 거기 있어.” 그런 후 고모는 곧바로 도착했고 고모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이 경기도 의왕시 소재 다사랑 중앙병원 이었다. 7병동 입원 생활이 처음이라서 적응 하는데 시간은 걸렸지만 조금씩 익숙해 질 무렵 다사랑 병원 밖에서의 생활이 그리웠으며 일에 대한 걱정도 많아서 정신이 혼란한 상태였다. 반복되는 알코올중독에 관한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 하면서 숙고하기 시작했고 이왕 하는가 제대로 한번 해보자는 각오와 다짐을 하면서 나름 열심히 임했지만, 때로는 부정하고 투사하며 합리화 하려는 중독성 사고들로 인해서 괴롭고 답답한 날들을 보내기도 했었다 . 다사랑 중앙병원 담당상담사 선생님의 특별한 관심과 열정 덕분에 1개월여의 관리병동 생활을 성실하게하고, 1단계 발표를 하면서 나의 알코올중독과 왜곡된 사고의 제 멋대로의 잘못된 삶을 전반적으로 정직하게 시인 했다. 하늘에서 비가 처량하게 내리던 어느 날 5층 흡연장에서 담배를 피우며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물방울이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떨어진 자리에 계속 떨어지는 것을 보고, 문득 세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내가 술을 끊지 못한다면 내 아이들에게 알코올중독이 대물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피폐해진 내 삶도 문제 이지만, 아이들 장래의 삶도 걱정하게 되면서 나의 세대에서 알코올중독의 쇠사슬을 단호하게 끊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다사랑 중앙병원 개방병동으로 전동하여 9주간의 프로그램에 참여 하면서 환우 선생님들의 관심과 배려 그리고 지지해 주심으로 특별한 우정의 따뜻함을 느꼈고, 규칙적인 생활 습관에 적응 하면서 긍정적인 사고로의 전환과 희망을 갖기까지에는 다사랑중앙병원 치료진의 정성어린 지도와 열정이 있었으므로 가능한 일이었다. 개방병동 생활 당시에는 코로나 질병 전이라서 토요일은 외박이 허락되어 설레는 마음을 안고 1박2일 집에 다녀올 수 있었고, 개방병동으로 복귀하는 날은 제 시간 내에 도착 하려고 늘 서둘러서 출발하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사회 적응 훈련이며 술의 유혹을 잘 극복할 수 있는지 관찰하기 위한 프로그램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 개방병동에서의 생활에 충실 하면서 4단계 발표와 9단계 발표를 준비할 때는 나의 지난날들을 회상하게 되었고 , 술을 마신 내 자신이 잘못 살아온 것으로 인해서 피폐하고 불행해진 가정과 가족에 대해서 책임과 뉘우침을 갖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내가 술을 마심으로 인해서 경제적 손실과 각종 사건사고에 따른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친 것에 대한 미안한 감정과 함께 사과하고 직접 보상해야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앞으로 술 취하지 않는 온전한 맑은 정신으로 살아야 겠다는 결심과 사람답게 살자는 의지를 굳건히 다짐하면서 나는 개방병동 9주 수료를 하고 3개월여 만에 퇴원 했다. 그러나 내 삶의 현실 세계에서는 나 혼자의 의지력만으로는 단주할 수 없었다. 다사랑 중앙병원의 치료진과 특히 담당상담사 선생님께서 수없이 많이 강조하고 부탁하셨던 회복 프로그램을 나는 실천하지 않았고, 외래진료 까지 회피 하면서 재발은 예정된 일이었다. 낙오된 한 마리 병든 어린 새처럼 나는 고독한 자기연민에 빠져서 외롭고 우울해 하며 불안에 떨었고 그럴 때마다 술로 도피를 했지만, 교활하고 당황하게 만들며 강력한 알코올은 나를 다섯 번이나 다사랑 폐쇄병동으로 가도록 만들었다. 다사랑 중앙병원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동안 나의 아내는 다사랑에서 권유하는 가족교육에 성실하게 참여하면서 가족회복 모임인 알아넌을 소개 받았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어느 누구 보다도 회복의 열망을 갖게 된 알아넌 멤버가 되었다. 다사랑 중앙병원에서 다섯 번째 퇴원을 할 무렵 아내는 나에게 까리따스라는 알코올 회복센터가 있는데 함께 가서 상담하고 6개월 수료를 하자는 것이었다. 퇴원 후 다음날 센터를 방문 상담하고 바로 6개월의 회복 프로그램에 들어갔고 6개월이 지난 지금 나 스스로 1년 연장을 했다. 그동안 다사랑 중앙병원에 정기적으로 외래진료를 받으러 다녔고 나는 3대 회복 프로그램인 인지행동, 동기부여, 12단계 생활화, 그리고 A.A모임에 꾸준히 나가고 있고 종교 모임에도 참여하고 있다. 단주 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 술 마시던 시절에 따라 다녔던 불안, 근심, 공포, 두려움, 우울증, 자기연민, 불면증 등의 고통으로부터 많이 자유로워지고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다. 가족관계 또한 많이 회복되어 지금은 아이들이 다른 이들에게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을 전해 듣고 아이들도 나처럼 평온함을 찾아가고 있는 것 같다. 평생에 술 마시지 않은 맑은 정신으로 명절을 보낸 것이 처음 이었고, 특별한 일이 없는 평범한 일상이 행복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내가 이렇게 회복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은 다사랑 중앙병원의 의료진과 상담사 선생님의 세심한 관심과 격려 덕분이며, 이번 회복수기 공모전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다사랑 중앙병원의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1389031911 2022-11-17
[2022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장려상] 중독에서 치유중인 나!
[2022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장려상]중독에서 치유중인 나! 저는 2018.09.30. 남편과 가족에 의해 강제 입원된 유*화입니다. 저는 제가 왜 입원을 해야 하는지 이유를 정말 몰랐습니다. 저는 다만 술이 좋아서 마셨을 뿐인데 억울한 마음에 왜 라는 의문을 갖고 강제 입원이 되었습니다. 왜 라는 이유 중 하나는 남편도 술을 마시고 있었고 남편은 과거부터 술 때문에 사고도 엄청 많이 친 사람인데 입원을 안 하고 왜 저만 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의 다사랑중앙병원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웃긴 건 사람들이 저보고 알코올 중독자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한 사람 중 단 한명도 본인이 중독자라고 인정하지 않았고 저랑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저 술을 좋아했을 뿐이고 그래서 매일 마셨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병원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습니다. 퇴원만 해봐라! 저는 보란 듯이 가족들 앞에서 짝으로 놓고 마시겠다고 다짐하며 또 다짐하며 하루하루 병원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병원이 술을 끊기 위해서는 수업을 들어야 한다고 하면서 교재까지 구입하라고 권했습니다.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일단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다 했습니다. 3~4일 후부터 수업을 듣기 시작했는데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도 없었고 또, 왜 들어야 하는지의 이유도 몰랐습니다. 이후 관리병동도 상담사님과 상담 후 반이 두 반으로 갈라졌습니다. 저의 상담사는 여자분 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특별히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그냥 병원에서 시키는 것은 모두 다했습니다. 그런데 이 병원은 정말 웃겼습니다. 학교도 아닌데 교재를 읽고 요약정리를 하고 그 요점정리에 맞는 저의 느낌이나 경험을 써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참으로 어이가 없었습니다. 수업만 참석하고 근 한 달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루하루 지내다보니 나름 병원생활에 적응이 되어져 가면서 요점 정리하는 것을 해가기 시작했습니다. 교재를 읽어 나가면서 그 교본에 있는 내용들이 저랑 비슷하거나 똑같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내가 알코올중독자가 맞긴 맞나보네 하면서 고개를 갸웃 둥해 본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병원 생활을 하면서 외부에서 들어오는 AA메시지를 접하게 되었는데 남자 세분이 와서 말을 하는데 꼭 미친놈들 같고 사이비 종교단 같아 이상했습니다. 이들의 말인 즉, 장례식장에 가서 술과 안주를 구걸한 사건을 말했고 또 한사람은 여자얘기나 하고 또 한사람은 입에 거품 물고 하나님을 찾고 한마디로 그냥 미친놈들이었습니다. 그렇게 AA라는 것을 처음 접해보았고 이후 주말에는 여자 분들이 와서 AA메시지를 했는데 같은 여자라서 그런지 고개가 끄떡여지는 말들을 하고 저도 그 말에 조금은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 여자 분들이 와서 말하는 것들을 듣고 AA모임이라는 것에 대해 처음 제 생각과는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병원생활을 계속하면서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알코올중독이라는 것에 대해 병원에서는 저로 인해서 상처받은 가족들 즉, 그것이 가족병 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었습니다. 왜냐하면 가족들에게 피해를 끼친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병원 생활을 하면서 저는 입원시켰던 남편, 큰딸, 친언니 그리고 이웃에 사는 절친 이 사람들이 저를 살리기 위해서 입원을 시켰다는 사실을 차차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저에게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당시 큰 용기를 내어 가족들이 만약 강제입원을 시키지 않았다면 지금 현재 나는 존재할 수 있을까? 만약 존재하고 있다면 어떤 모습으로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쓴 웃음을 지어봅니다. 병원생활을 하면서 1단계를 발표하고 4개월 만에 개방병동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개방병동에서는 수업 후 저녁때 의무적으로 AA모임에 참석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주말에 보호자 허락 하에 외박도 가능했습니다. 저는 저녁마다 매일 모임에 다녔습니다. 나름 즐겁게 다녔던 것 같습니다. 아니 사실은 병원을 벗어날 수 있어서 모임이 좋았던 것이었습니다. 상담사 선생님 허락 하에 외박을 나가면서 혼자서 AA모임을 찾아가 보기도 했습니다. 그곳은 분당 야탑에 차병원에서 하는 청솔 그룹이었습니다. 당시 계면쩍어 하면서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노인정인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하지만 그 분들이 얼마나 반갑게 맞이해주는지 바로 민망해졌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개인적 모임생활이 시작되었고 그러다 명동성당에서 하는 모임도 찾아가 보았습니다. 명동 모임은 다른 모임과는 달랐습니다. 정말 저와 같은 유의 많은 분들이 모여 있었고 그들이 하는 경험담도 다른 곳과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저는 명동성당 모임에 홀딱 반했습니다. 매주 주말마다 명동모임과 야탑모임은 꼭 갔고 그리고 다른 분들께도 추천해서 함께 다녔습니다.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음주생활이란 뭔가라는 생생한 경험담들이었습니다. AA모임에서는 제일 큰 행사는 라운드 업 이었습니다. 주로 1박 2일로 하는 모임인데 처음 가보았고 그곳에서 마라톤(밤새하는 경험담)도 해보았습니다. 처음 참석당시 어찌할지 모르는 저에게 상담사 선생님께서 올라가 이름이라도 말하고 내려오라고 했고 이는 저에게 반 협박처럼 들리며 대단히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겸연쩍었지만 어설프게나마 경험담도 했습니다. 또한 타인들의 그런 경험담을 들어 본적이 없었던 저는 매시간 마다 습관적으로 담배 피는 것도 잊은 채 그 자리를 쭉 지켜봤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행사가 자주 있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저는 병원에 있다 보니 이런 행사의 참여가 자유롭지는 않았습니다. 한번은 AA모임에 나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 이때 동료 환우가 같이 가고 싶다고 해서 상담사 선생님께 양해를 구하여 끝까지 책임지겠다. 약속을 하고 일요일 2시 모임까지 하는 것으로 허락을 받고 간 것으로 AA모임을 잘 마치고 병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환우와 저는 각자 볼일이 있어서 흩어져서 일보고 병원 앞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습니다. 사적인 일을 보고 제가 병원 앞에 제가 먼저 도착했는데 같이 외출한 동료 환우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순간 그 환우가 탈출했다 속단하고 병원근처를 뒤지며 찾아다녔습니다. 그 환우가 사라졌다 생각되니 하늘이 노래졌습니다. 이것은 책임감이었습니다. 생각 없이 말했던 책임지겠다고 한 한 말에 대한 무게감에 얼마나 병원 주변을 돌아다녔는지 모릅니다. 이에 찾는 것을 포기하고 병원 앞에 도착했더니 그 환우가 병실창문으로 손을 흔들면서 저를 처다 보며 언니라고 불렀는데 반갑기도 했지만 홧김에 그만 제 입에서 쌍욕이 나오고 말았습니다. 만약, 당시에 그 환우가 병원이 아닌 다른 곳으로 샜다면 하면...! 끔찍해서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반면 병원에 잘 도착한 사실에 안도감이 들긴 했지만 당시 저의 생각이 복잡해서 그만 저도 모르게 그 환우에게 욕부터 했던 것 같습니다. 예전엔 저는 말과 행동이 따로 였고 그냥 건성으로 약속했는데 이런 언행은 모두 알코올에 지배당한 미친 정신으로 살아왔을 때의 제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병원생활중 당시의 이 사건은 최고 두려운 사건이었고 저의 말에 대한 책임감이 크다는 것을 그 때 깨달았습니다. 말을 한 후에는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병원생활 6개월쯤 돼가는 중에 남편이 이제 퇴원하자는 말이 먼저 꺼냈습니다. 그러나 저는 퇴원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고 4단계 준비하고 그것만 발표하고 퇴원하겠다고 말하니 남편도 더 이상 말을 안 하고 알겠다면서 열심히 준비하라고 응원해줬습니다. 입원 후 6개월 동안 병원생활을 하면서 외출 외박을 해보는 중에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가족애를 많이 느꼈습니다. 이것은 술에 미쳐서 살고 있을 때 저에게 냉대했던 딸들이 말을 걸어주고 관심을 주고 하는 것들이었는데 제가 중독자시절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들 이었습니다. 4단계 발표를 준비하면서 잊고 묻고 싶었던 과거들 또 저만의 상처를 들추고 싶지 않았지만 가슴 밑바닥에 감춰두었던 사실들 그리고 가족과 주변인들이 몰라도 되는 내면의 깊은 상처들이 들춰지는데 것에 대한 부끄러움에 많이 힘든 4단계 준비기간 이었습니다. 이는 생각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4단계 준비는 슬픔과 기쁨을 모두 느껴보는 소중한 과정들의 기록이었고 특히 그간 저의 내면 깊은 곳에서 두려움이 많았었다는 사실을 4단계를 준비하면서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물론 다른 많은 희비의 감정들이 교차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저는 3개월 동안 준비한 4단계 발표를 하고 그날 바로 퇴원을 했습니다. 2019.07.02. 퇴원해 짐을 정리하고 그날 바로 성남시 복정동에 있는 모임으로 찾아갔습니다. 퇴원 후 처음으로 혼자서 찾아가는 모임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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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참가상] 세상의 중심은 ‘나’ 라는 것!
[2022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참가상]세상의 중심은 ‘나’ 라는 것! 저는 2018년 10월 23일에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해서 2019년 1월 30일 퇴원 후에 지금까지 단주를 실천하고 있는 장OO입니다. 저도 다른 환우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말도 안 되는 사연들로 인해 알코올에 의존하는 상태가 도어서 5년 가까이 지방의 이런저런 병원을 들락날락 거리면서 나 자신의 생활은 물론 가정까지 파탄에 이르게 되었고 사회에서는 냉대 받고 손가락질 받던 사람입니다. 우연한 기회에 TV 다큐멘터리에 출연을 하게 되면서 저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처음 출연을 결심하게 된 이유는 출연료를 챙겨서 술을 사서 마실 욕심이었는데 방송사에서 돈이 아닌 병원 치료를 제의한 것입니다. 처음 다사랑중앙병원을 소개 받고 입원을 할 때는 정신병원들이 ‘거기서 거기지’ 하는 마음이었고 별다른 기대도 없이 3개월 동안 몸이나 추스르고 나가자는 마음으로 입원을 하였습니다. 입원 이틀째에 병원 시설을 보고 약간 놀라긴 했지만 별다르게 생각을 안했는데 하루하루 지나면서 교육을 받고 병원이 돌아가는 시스템을 이해하면서 ‘이곳은 다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관리병동에 있을 때는 무작정 개방병동에 내려가면 좀 더 자유롭게 시간을 때우고 퇴원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개방병동에 내려온 후에 저에게 또 다른 변화가 오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은 아침 명상 시간이었습니다. 되돌아보면 아침 그 시간이 저에게 엄청 큰 변화를 준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시간 나를 돌아보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 보기도 했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교육들도 도움이 되었지만 기도와 명상으로 나를 비우고 채우고를 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주 결정적인 한방은 4단계 발표였습니다. 발표 준비를 하면서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던 것이 발표를 하면서 거짓말처럼 감정이 폭발하면서 오열을 하게 되었고, 그 감정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모든 병원 생활을 마치고 퇴원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지방에는 AA모임 자체가 흔하지 않아서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강릉으로 모임을 다녔습니다. 수도권에 있으면 100일 작전이다 뭐다해서 모임에 자주 참석해서 단주 생활을 이어가기 쉬울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수도권에 사시는 분들이 100일 작전을 한다면 나는 100일 기도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기 좋은 곳이 어딘가 물색을 하던 중 동네 교회가 적당할 것 같아 무작정 목사님을 찾아가서 100일 동안 기도할 장소와 시간을 주시면 안 되겠냐고 물었고, 목사님은 새벽에 나와서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음 날부터 종교적 목적이 아닌 저의 개인 목적으로 새벽기도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교인들과 대화도 하고 저의 사정도 얘기 하다 보니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100일 기도요? 물론 성공했지요. 540일간 새벽 기도를 나갔습니다. 제가 앞에서 언급한 기도와 명상으로 자기 자신과의 교만감이 단주의 첫걸음이라 생각하고 항상 감사하는 생활 태도와 자신감 있는 마음을 가진다면 단주를 이어가는데 무리함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원한, 증오, 질투 등 다 할 수도 있지만 감사하는 마음을 더 크게 가지면 모든 것이 희석 되지 않나 싶습니다. 병원 퇴원 후에 첫 직장 잡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직장에 들어가서 단주 생활을 이어가고 그런 모습이 차츰 소문이 나게 되면서 더욱 조건이 좋은 곳으로 스카우트가 되어서 직장도 한번 옮기면서 차츰 세상에서 인정이라는 것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의 직업이 운전직이라 술과는 상극이었는데 단주 중인 저는 더욱 인정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조금만 있으면 마지막으로 잔을 놓은 지 4년이 되어갑니다. 제가 마지막 잔을 놓기 전 허송세월로 보낸 5년을 보충하기 위해서 퇴원 후 3년을 줄기차게 달려왔습니다. 그 동안 깎이고 깎인 이미지를 다시 찾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그 결과 지난 6월 13일에 드디어 저의 차(돈 버는 차, 25.5톤 덤프트럭)를 장만했습니다. 몇 날 며칠을 잠을 설쳤고 지금도 꿈만 같습니다. 술과 함께 한 15년 동안 못 이론 것을 단주와 함께 3년 만에 이루어낸 쾌거입니다. 저의 단주는 저 하나만의 축복이 아니고 주변 모든 분들의 기쁨입니다. 9단계 발표 때 계산하는 것이 얼토당토한 것이 아니고 현실이라는 것을 지난 3년 간 절실히 느꼈습니다. 술 한 잔 안하면 좋은 옷이 생기고 또 한 잔 안하면 좋은 음식이 생기고, 또 한 잔 안하니까 애인이 생기더군요. 퇴원 때 마음먹은 일들을 잊지 않고 지금도 항상 기도와 명상을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만나던 술친구들은 모두 정리하고 단주 후에 만나게 된 새로운 친구들과 저녁 모임, 커피 모임도 하고, 여행도 다닙니다. 술 없이도 살 수 있는 세상에서 왜 그토록 음주가무를 부르짖고 살았는지 이해가 되지도 않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모든 분들께 감히 말씀 드립니다. 기도와 명상을 하시고 자기 자신과의 교감을 많이 하세요. 신은 내 자신 안에 있습니다. 나를 아끼고 사랑하면서 내 자신을 이해하고 믿으세요. 그러면 결코 단주가 어렵지 않습니다. 남을 원망하고, 시기, 질투도 하세요. 대신 그보다 더 많은 감사를 하세요. 항상 자신감을 가지시고 의기소침하지 말고 술이나 남에게 의지하지 마세요. 세상의 중심은 ‘나’ 라는 것을 잊지 마시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 어제의 일은 빨리 잊고 내일의 희망을 생각하면서 살아가자고 제가 감히 제안을 하면서 이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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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참가상] 감사함과 자족(自足)은 알코올중독으로부터 회복될 수 있다!
[2022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참가상]감사함과 자족(自足)은 알코올중독으로부터 회복될 수 있다! 저는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1960년대 이전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아버지는 온순하셨고 가족밖에 모를 정도로 가정에 충실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투전꾼들의 꼬임으로 도박이 시작되었고 그때부터 본전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가족 모두를 잊은체 도박 혈안이 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 얼마나 괴롭고 힘이드셨을까? 그 순간의 선택이 엄청난 가족의 고통으로 그 후유증이 몇 십년이 가도 치유되지 않는 파탄의 지경까지 이르게 됩니다. 술과 도박에 중독되어 가족을 위한 일상은 어디론가 사리지고 오직 내 돈, 내 재산을 찾고자 발버둥 치신 아버지결국, 술과 도박으로 모든 재산을 다 잃어버리고 가족으로는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형제, 자매 3남 2녀를 남긴 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어머니 나이 36세 제 나이 4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께서 아버지를 대신해 그렇게 죽으라 막노동으로 가족 모두를 먹여 살리기란 역부족이었나 봅니다. 그때부터 가족들은 뿔뿔이 헤어지게 되었고, 정말 지옥과도 같은 나날을 보냈다고 합니다. 급기야 아무리 노력해도 너무나 큰 고통이었고, 버티기에는 역부족으로 우리 집에는 큰 변화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양로원으로 가셨고 큰형님은 원래 고향인 홍천으로, 누나들은 남의집살이가 시작되는 등 온 집안이 생이별하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그나마 공부 잘하는 작은 형과 막내인 저는 집에 남게 되었습니다. 작은 형은 줄곧 우등생이었는데, 저는 그렇게 오로지 공부만 하라는 엄한 형 밑에 남게 되었습니다. 저는 동네 친구들과 맘 놓고 놀지도 못했습니다. 작은 형은 늘 저를 책상에 앉으라 했고 만약 놀다 걸리면 형에게 죽도록 두들겨 맞는 상황이 거듭되었습니다. 이러한 결과로 저도 줄곧 우등생의 자리를 놓치지 않고 초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이듬해 우리 세 식구는 저의 중학교 입학을 위해 읍내로 이사를 하게 됩니다. 집은 단칸방 사글세 집이었습니다. 중학교는 수업료가 저렴한 고등공민학교로 입학하였습니다. 형의 계산으로는 제가 그나마 초등학교 시절 우등생이었으니까 나중에 검정고시를 보면 된다고 했습니다. 작은 형님의 스파르타식 교육을 통하여 고등공민학교 3학년 때에 치러지는 고입입학 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형님은 이미 공무원이 되었고 저는 정규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 형님은 軍입대로 집을 떠나게 되었고 어머니와 저 이렇게 단둘이 남게 됩니다. 습관처럼 학교에서 돌아오면 저는 늘 책상에 앉기는 했지만 이 습관도 얼마 가지 않았습니다. 그 무서웠던 형도 없으니 얼마나 해방이 되었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그때가 스스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친구가 찾아와 자신의 학교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하자고 하여 그러자고 했습니다. 그 친구의 학교는 남녀공학이었고 도서관에는 우리 둘 외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친구의 밀린 수학 과목을 가르친다며 같이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일인지 언제부터인지 학교 도서관에 학생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 여학생들도 도서관에 나타나게 되었고 자연스레 제게 수학 문제를 물어보는 여학생들도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과정에 한 여학생을 알게 되었고, 저는 얄팍한 수학 실력을 자랑하며 자만감에 취하여 공부를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여학생을 만나는 날만 기다리게 된 어느 날, 그 여학생의 남자친구라는 친구가 제게 싸움을 걸어왔고 그 계기로 저는 불량 학생의 길을 걷게 됩니다. 매번 싸움 끝에 얻어맞은 상처와 아픔을 잊으려면 술을 마셔야 한다고 했고, 또 사과하면서 술을 마시게 됐고, 그렇게 제 생애 첫 잔은 싸움 끝에 남는 상처의 고통을 잊기 위해 시작된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1978년 1월 한겨울의 이야기입니다. 나의 첫 술 첫잔은 포도주입니다. 포도주는 쓰지 않고 달다는 친구들의 권유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술을 접한 게 난생처음이었습니다. 포도주 몇 잔을 마시고 나니 이미 머리는 정신은 마비 상태 마시는 건지 먹는 건지 모를 정도로 취해 버린 저는 그만 정신을 잃게 됩니다.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샴페인, 그다음은 소주를 양재기에 벌컥벌컥 마셨다고 합니다. 첫 술자리부터 정신을 잃고 그야말로 폭주 중의 폭주를 한 것입니다. 친구 집 자취방에서 시작된 술인데 어떻게 된 일인지 나중에는 길거리에 쓰러져 동사되기 직전 같이 마셨던 친구의 발견으로 구사일생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그때 상황을 기억하자면 친구 어머니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뭔 놈에 술’이라며 화를 내셨고 함께 술을 마셨던 친구 두 명은 친구 어머니가 오시자 뒷문으로 피했습니다. 저는 방 한 쪽에 쓰러져 있었는데 친구 어머니께서 그런 저를 끌고 나와 길거리에 내동댕이쳤다고 합니다. 처음 마신 술로 인해 가혹하리만큼 큰 체벌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 소동으로 저는 3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고, 결국 내 어머니의 지극 정성스러운 간호로 살아나게 됩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 어머님이 받으셨을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늘 책상에 앉아 책만 읽었던 아들이 이런 날벼락을 가져올지 말입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평소 함께 하던 친구들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 친구들의 세계는 선후배들이 힘이 센 자들을 중심으로 모인 불량 학생들이었습니다. 그들과 어울리면서 저는 그들보다 더 불량스럽게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누가 어쩌고 어째? 어떤 패거리들이 내 조직의 친구를 때렸다고?’ 저는 늘 패싸움을 하면서 타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제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고등학교 2학년 2학기 때부터 말입니다. 세월이 흘러 형님께서 軍 복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제일 먼저 하신 일이 동생 학교에 찾아가 담임선생님을 만나 제 성적부터 확인하는 일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생각지도 못했던 큰 충격과 실망을 준 것입니다. 성적도 성적이겠지만 변해 버린 동생의 행동거지가 완전히 깡패 새끼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당연히 대학 입학 예비고사 성적은 형편없었고 대학 진학도 못 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저는 형의 모든 희망을 저버리게 됩니다. 늘 동생의 일상은 깡패 같은 친구들과 어울리고 형이 ‘넌 뭐냐?’라고 충고라도 할라치면 결국 큰소리가 오갔고 끝내 따귀라도 치게 되면 이제는 나도 컸다고 같이 주먹질까지 하는, 형도 몰라보는 개망나니가 된 것입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날마다 술과 담배, 이 지역은 접경지역이고 군부대가 많은 군인들이 많은 작은 읍내 도시였습니다. 이때만 해도 다방에 커피 배달도 하는 다방 이란곳이 성업이였고 또 여러곳이 있었습니다 누구나 오갈 때 없는 실업자들이 기웃거리는 곳 그런 다방 아가씨들과 냇가에 텐트 치고 놀며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형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제발 이곳을 떠나 지금 어울리는 친구들과 관계를 끊고 새로 출발하라는 권유를 받게 되고 저도 마음 한구석에 이렇게 살아서는 더는 안 되겠다 싶어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차분히 나를 찾아 다시 공부를 해보기로 하였습니다. 서울 남양동에 있는 경일학원 종합반에 들어가 재수생이 되었습니다. 서울 학생들의 학구열은 대단했습니다. 시골에 있던 제가 지내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학원 문이 열리자 서로 앞자리에 앉으려고 뛰는 학원생들의 모습부터 학구열의 환경이 전혀 달랐습니다. 저는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의지로 바로 적응할 수 있었고 재수생 생활 3개월 정도가 지났을 때 형님의 권유로 공무원 시험을 치르게 됩니다. 그런데 필기시험에 합격했을 때, 아직 면접도 남아 있는 상태에서 무슨 면접이냐며 모든 짐을 싸서 다시 집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대학은 무슨, 그저 형님처럼 나도 공무원이나 하자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다시 친구들을 만나 강변으로 가서 바로 술을 마시며 놀았고, 그동안 못 마신 술 한꺼번에 다 마시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며 지내다가 결국 면접시험에서 떨어지게 됩니다. 공무원 시험에 떨어졌다고 또다시 술을 찾았고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가 군(軍)입대를 앞두고 더 술을 많이 마셨습니다. 그렇게 술을 마시다가 軍에 입대했습니다. 군대 생활 30개월은 나의 무질서했던 생활이 정리 정돈이 되는 시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軍 복무를 마치고 나니 직업을 가져야 했습니다. 다시 공무원 시험 준비를 시작하고 이후 여러 번 실패하며 고전 끝에 29살의 늦은 나이로 최종 합격을 하게 됩니다.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며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되었고, 그때 아내는 이미 공무원 생활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해 바로 결혼도 하였습니다. 나의 방황이 여기서 막을 내리나 싶었는데…. 처음 발령지가 시골에 있는 면사무소였습니다. 공무원 생활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마을 이장님들과 술자리부터 직원들과 술자리, 회식, 동창회, 체육대회 술자리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같이 술을 마셨던 사람들은 제게 술을 잘 마신다며 그들이 술을 마실 때마다 저를 찾았고 저는 늘 신바람이 나며 술을 마셔댔습니다. 그러던 중 인사 발령도 여러 번 났고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술을 마셨어도 출퇴근만큼은 정확히 지키는 등 제 역할은 확실히 해냈습니다. 그렇게 공무원 생활 12년째가 되던 해, 제 나이 41세에 술을 마시면서 쓰러지고 또 쓰러졌다 깨어나면 속이 볶인다고 아프고 고통스럽다고 그나마 남은 기력으로 또 술을 마시고 결국 술 문제로 대학병원으로 앰블런스가 첫 인연이 되어 해를 거듭할수록 앰블런스는 하루가 멀다하고 횟수가 늘어나는 다 죽은 송장과도 같은 육신으로 실려갈 수밖에 없었던 중증 알코올 중독자 가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대학병원은 정신과로, 외부로부터 통제된 병실이었습니다. 입원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차리고 기력을 찾았을 때 치료진들은 제가 병원을 입원한 지 5일째라고 했습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저는 왜 나를 밖에도 못 나가고 꼼짝할 수도 없는 곳에다 가둬 놓았느냐며 아내에게 전화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당장 퇴원시키라고 화를 냈습니다. 저는 그때 아내한테 갖은 욕설을 다 퍼붓고 오직 내가 갇혔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아내가 왜 거기까지 나를 데려갔는지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병원 입원 기간 분통만 터지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28일 만에 퇴원하게 되었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술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퇴원 후 다시 사무실 출근하는 일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직원들이 다 저를 멸시하는 거 같고 저만 쳐다보는 것 같았습니다. 대학병원 정신과 병동을 수없이 입·퇴원 하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아 도대체 왜?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이런 생각조차도 못하며 술버릇의 악순환은 계속되었습니다.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면서 아내는 저를 어떻게든 치료해보겠다고 여러 정보를 찾아 결국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시키게 됩니다. 다사랑중앙병원의 관리병동, 개방병동, 재활병동 이런 체제는 우연이 아니라고 봅니다. 관리병동에서의 12단계 중 1단계 발표를 통해 지난날 나의 술 문제를 뒤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하면 단주를 할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보호자 참석 하에 진행된 1단계 발표를 저는 가슴으로 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머리로 발표했었습니다. 원장님께서 회진 시에 늘 조언하시던 ‘정직이란 그 말씀을…. ‘왜? 내게만 주문을 하시나?’ 하는 제 속의 양심을 들킨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역시 머리만으로 진행된 저의 1단계 발표와 4단계, 9단계 발표는 무용지물이었습니다. 퇴원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재발하고 재입원하는 나날이 반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관리병동보다 개방병동의 생활을 통해 얻는 자유로움이 좋았습니다. 다사랑중앙병원의 단계별 치료 시스템은 정말 훌륭한 시스템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정 마음으로 이 단계별 프로그램으로 자신이 임한다면 그 지긋한 술과의 전쟁이 끝날텐데 말입니다. 왜냐하면, 환자들이 알코올 중독 문제에 적응하고 해결하는 단계별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병원에 입원했을 때 제 상담을 맡으신 윤희숙 상담사님이 제게 하셨던 말씀들…. 12단계 필사를 해보자, 불완전한 영성, 아직도 가야 할 길 등 필독 도서, 수요일 A.A.모임이 있을 때마다 맨 앞에 앉으라는 감독의 눈초리, 병원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그 말들이 결국 나를 위한다는 것임을 왜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는지…. 상담사님이 진정으로 환자를 위하는 마음으로, 제게 그렇게 열과 성을 다했음을 말입니다. 지금도 되돌아보면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다사랑중앙병원에서 수없이 진행되는 토론과 학습은 제 단주 생활의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머리가 아프고 안정이 안 될때 다사랑에서 해왔던 명상의 시간을 가져봅니다 명상, 다사랑병원에서 배우고 익힌 습관입니다. 명상을 함으로서 나를 들여다 보는 능력도 생겼습니다. 폭주로 시작되었던 제 음주 습관이 멈춘 지 단주한지 이제 5년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제게는 단주 생활 밑거름의 양식이 된 것입니다. 내가 가장 즐겼던 술과 담배는 끝내 나를 죽음의 문턱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인생에 있어 타락입니다. 일상으로 늘 분주하게 살아가던 제가 2018년 지주막하출혈로 의식을 잃고 2회에 걸친 뇌수술 끝에 사경을 헤매다가 겨우 살아났습니다. 뇌출혈의 원인은 바로 술과 담배였습니다. 너무도 끔찍한 병을 직접 체험한 저로서는 그렇게 내 몸에 휘감았던 술과 담배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된 원인이라는 걸 고백하고 싶어서 이렇게 수기를 쓰게 되었습니다. 저는 글을 잘 쓰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저처럼 누군가가 술로 인해 이 지경까지 가지는 말게 해야겠다는 신념이 생겼고 그래서 경험담을 나누고 싶어졌습니다. 그리고 중독자들 선봉에 서서 나의 경험담을 나누고 싶습니다.지금도 저는 뇌출혈 후유증으로 그렇게나 좋아했던 축구도, 족구도, 잘하지 못합니다. 뇌 신경과 의사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지금까지 사용했던 운동 신경이 다 죽었다고, 그래서 옆에 있던 뇌 운동 신경을 다시 살리는 재활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고 합니다. 변화된 삶을 살아야 했기에, 늘 일상에서 대하는 모두에게 긍정적인 마음으로 감사함을 표현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저의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매사에 감사함은 늘 스스로의 만족 자족함은 마음에서 소용돌이치는 갈망감과 내적 갈등을 사라지게 하고 늘 평온함이 유지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아!~ 감사함이야말로 자족함이 이말로 나의 유일한 백신이구나’를 매일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저의 모습부터 조금씩 달라지고 있습니다. 오늘도 맑은 하늘을 만끽하며 이 모든 것들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중입니다. 술과 담배를 접하지 않은 지 이제 5년이 넘었습니다. 2년전 제 아들의 결혼식이 있었고 그때 주변의 많은 사람으로부터 축복의 인사를 받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술을 끊고 온전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얻은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고통받고 있는 알코올중독자들의 선봉에 서서 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기회기 되었음 좋겠습니다. 지금도 다사랑중앙병원의 치료진과 김연주 상담사님과 나누는 매주 1회 짧막한 사연 이지만 제게는 큰힘으로 작용됩니다 이또한 감사한 일입니다 지금 회복의 길을 걷고 있는 저는 너무도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이 모든 기초를 다지게 해 준 다사랑중앙병원 치료진, 아울러 동병 상련자 환우들께 거듭 감사드립니다.
1389031911 2022-11-17
[2022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참가상] 기도를 바꾸다
[2022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참가상]기도를 바꾸다 " 나는 언니를 용서할 수 없어" 제 술 문제를 알기 전에는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여동생이었습니다. 그런 여동생의 이 말을 듣고 2019년 10월 13일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20살 회사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처음 술을 마시게 되었고 그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술을 남들보다 더 많이 마셔도 취하지 않으며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다음날도 멀쩡히 출근함에 따라 나름 술로 인정받게 된 저에게는 하나의 능력이었습니다. 거의 매일은 아니더라도 약속을 잡고 술을 마셨습니다. 그러다 20대 중반 첫 블랙아웃이 되어 외박한 상태로 여 직원실에서 눈을 떴을 때 느꼈던 공포와 불안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음주는 조절할 수 있다는 교만과 기쁨, 슬픔, 짜증 등의 모든 상황에 대한 해결책이었기에 멈출 수 없었습니다. 결혼한 시댁이 갈빗집을 운영하셔서 일 끝나면 술친구였던 남편과 매일 술을 마셨습니다. 술을 안 마셨던 기간은 세 아이를 가졌을 때뿐이었습니다. 식당에서 일하면서 시댁에서 월급은 받지 못했기에 시부모님이 시골로 내려간 1년 동안 이때다 싶어 노후 자금이라 생각하며 아무도 몰래 보험을 들었습니다. 들었던 보험이 감당할 수 없는 빚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시어머님이 다시 돌아오셨고 개인 빚도 모자라 시어머님 보험에서 중간 인출까지 했던 저는 모든 일상이 숨 막히는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매일 눈을 뜨면서부터 불안감에 술이었고 아침에 눈을 뜨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겁이 많아 전쟁이 나서 다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도 했습니다. 게다가 대학 졸업 후 아무것도 하지 않던 시동생이 가게 일에 관여하게 되면서 열심히 일하면 물려받게 될 내 가게라고 믿었던 기대와 희망까지 흔들렸습니다. 모든 불만과 불만이 술이 되었고 엄마 손이 필요했던 아이들을 보살피지 못하는 그저 술만 마시는 엄마였습니다. 아이들의 준비물을 챙기기보다 아이들 옷장 서랍 속에 술병을 숨겨놓는 엄마였습니다. 세상엔 비밀이 없듯이 모든 일을 알게 되었고 그 일로 힘들어진 하루하루를 술로 보내다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이혼 후 친정에 돌아왔을 때 제 술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는 엄마와 여동생은 이혼이 무슨 문제냐 잘 살면 된다고 하시며 보듬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집을 비우면 술에 취한 모습을 보이고 엄마와 여동생이 여행에서 돌아오는 날 응급실로 오게 만드는 기막힌 일도 만들었습니다. 집은 나가 연락도 없이 모텔을 전전하며 술을 마셔서 신용 불량자라는 딱지를 달기 전 돌아와 엄마를 아프게 만들었습니다. 그 후에도 정신 못 차린 저는 제 생일날 외식하자는 가족 앞에 술을 마시고 나타났고 참을 수 없었던 여동생에게서 집을 나가는 것과 병원 입원 중 선택하라는 통보에 병원을 택했습니다. 첫 병원 입원이 무서웠지만, 술에 취했던 그때에도 집을 나가면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병원 대기하며 13일을 기다리는 동안 엄마의 일을 도와가며 입원을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저를 입원시킨 후 병원 1층 로비에서 엄마는 눈물을 보이셨다고 합니다. 병원에서 수업 받으며 술을 끊지 못했던 것은 엄마가 늘 말하던 나의 의지 문제가 아니라 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매일 눈물 흘리며 내일부터는 마시지 않겠다 일기를 쓰며 다짐하지만, 다음날 눈을 뜨면 술부터 찾았던 일들에 대한 해답을 찾았고 상담사 선생님께서 알려주시는 대로 한다면 술을 끊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온전히 알코올 중독자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척’만 했던 저는 술을 마실 때 아이를 때렸다는 A.A.메시지를 듣고 상담사 선생님께 당당하게 그런 적이 없다며 얘기했고 그 교만함이 제 입원 기간 첫 번째 퇴원 욕구의 시작이었습니다. 엄마와 상의 없이 퇴원에 표시했던 저는 여동생에게 "언니는 가족들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이다"라는 말에서 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척’이었기에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나 자신이 이기적이며 사랑하는 가족에게 해를 끼쳤다는 것을 4단계를 쓰며 알게 되었지만, 그 힘듦을 회피하려 했던 저에게 두 번째의 퇴원 욕구가 올라왔습니다. 1단계 발표 후 외출을 통해 집에 가면 답답했고 특히 여동생과는 말도 제대로 나누지 않는 불편함이 계속되었습니다. 그 마음을 숨기고 잘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다닌 A.A.모임은 도피처였습니다. 4단계 쓰기를 멈췄던 저는 퇴원을 하고자 했으나 이를 결정하러 온 가족들의 태도에 또 한 번의 밑바닥을 보았습니다. 제 결정에 의해 퇴원을 한 후 첫 잔을 입에 댄다면 가족들에게 버려져 혼자 외롭게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멈추게 했습니다. 다시 병원 치료를 선택한 저는 4, 9단계를 마치고 식당 재활을 하며 상담사 선생님과 퇴원 계획을 세우던 중 코로나라는 또 하나의 시련을 맞게 되었습니다. 코로나가 이렇게 오래 지속될 것이라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얼마 남지 않은 식당 재활을 하며 병원 안에서 병원 A.A. 모임인 늘푸른 모임에서 사회봉사를 하고 온라인을 통해 A.A.모임을 매일 참여하며 멤버분들의 경험담을 듣고 제 경험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사이 코로나는 더 심각해졌고 퇴원 계획으로 세운 학원도 다닐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식당 재활이 끝나갈 때 상담사 선생님의 제안과 힘써주심 그리고 병원의 배려로 청소 재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식당과 청소 재활하는 기간 동안에 엄마와 여동생에게 병원비 부담을 덜어줄 수 있다는 것도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온라인 A.A.모임과 재활을 하며 지내던 중 여성 병동을 청소하시던 분이 그만두시게 되었습니다. 그때 약속의 글처럼 저에게 퇴원과 동시에 병원에서 직원으로 일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저는 감사함보다는 더 나은 미래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받아들이기까지 제 교만함과 싸워야 했습니다. 제 현실을 받아들이기까지 빅 북에서 나오는 대차대조표라는 것도 만들었고 상담사 선생님의 현실적인 조언 그리고 가족들의 응원이 있었습니다. 제게 주어진 기회를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지는 순간 저는 여유로움과 느끼지 못했던 자유 그리고 제 인생의 첫 독립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날이 2021년 3월 5일이었고 저의 단주 기념일입니다. 첫 월급을 타고 적금, 청약을 만들게 되면서 과거 술을 마시면서 제대로 가져보지도 쓰이지도 못한 제 이름을 찾게 되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저의 일상은 하루하루가 감사함의 나날이었습니다. 가끔 눈을 들어 본 햇빛 가득한 하늘에 울컥해지기도 했습니다. 술을 마실 때의 햇빛이 쨍쨍한 하늘은 숙취로 인한 두통으로 얼굴을 찌푸리게 만드는 그래서 피해야 하는 하늘이었기 때문입니다. 일이 끝나면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A.A. 모임에 참석하며 봉사했습니다. A.A. 모임 안에서 후원자 선생님과 12단계를 1단계부터 다시 하며 지금은 세 아이와 엄마에게 9단계 보상을 하고 여동생에 대한 보상을 앞두고 있습니다. 퇴원 후 다사랑중앙병원 관리부서에서 1년 6개월 근무를 한 지금 또 한 번 약속의 기적이 찾아왔습니다. 병원에서 9층 보호사로서 새로운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절망의 끝에서 왔던 다사랑중앙병원에서 저와 같은 병을 가진 분들을 도와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하려고 정문을 들어온 그때에는 술을 끊고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뿐이었는데... 현재 저에게 일어난 일은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기에 저에게는 기적입니다.“이렇게 사람구실 하며 살아줘서 고맙다” 9단계 보상할 때 엄마가 저에게 해주신 말입니다. 또한 불편해서 나를 피하고 언니를 용서할 수 없다던 여동생은 집에 가면 엄마보다 더 하나라도 챙겨 주려고 합니다. 개방 때 주말 집에 갔을 때 본인 물건을 말없이 가져갔다는 이유로 화를 냈던 동생이 이제는 제 것까지 같이 주문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감사의 날들을 보내고 있지만 언제든 한 잔의 술로 다시 구덩이에 빠질 수 있는 저는 알코올 중독자임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술 마시며 지내던 때에 잊지 못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집을 나와 모텔에서 두 달 가까이 지낼 때입니다. 크리스마스와 설 명절 즈음이었습니다. 눈이 오는 날 불 꺼진 높은 모텔방에서 두 손 가득히 선물을 들고 다니던 행복 가득한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나에게는 저런 날은 이젠 없다며 생각하며 두려움과 절망, 공포의 눈물을 흘렸던 그날의 그 순간입니다. 그 이후 병원 입원하여 5년이 지난 지금 저는 그 거리에서 두 손 가득 선물을 들고 있는 행복한 사람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이전의 저는 술을 끊게 해달라는 기도와 바라는 것을 주시기를 제 주변이 바뀌기를 바라는 기도만 드렸습니다. 지금의 저는 바라는 것을 달라는 기도보다는 그것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기도합니다.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함으로 술을 끊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신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저에게 위대한 힘이 되어준 우리 가족들과 다사랑중앙병원 치료진분들 그리고 상담사 선생님께 진심으로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감사함을 전할 수 있어서 가슴이 벅찹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1389031911 2022-11-17
[2022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참가상] 일상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평온한 시간
[2022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참가상]일상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평온한 시간 저는 50세 나이로 IT 업종에 박사 학위를 보유하고 있으며, 현재 대기업에서 만 15년째 근무를 하고 있는 직장인입니다. 아내는 전문 간호사 근무를 했었고, 제가 단주를 하고 있는 현재는 간호직 공무원입니다. 슬하에 자녀는 없지만 우리 부부는 저의 술 문제를 제외하고는 큰 문제가 없는 부부였습니다. 일반적인 가정보다는 비교적 술에 관대했던 가정환경에서 성장한 저는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나 주어진 일에 대한 두려움을 술로써 의존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스트레스로 인해 빠른 시간 잠에 들기 위해 습관적으로 소주 1명 정도를 마시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회식 자리를 마치고 집으로 귀가를 할 때 술이 깨게 되면 다시 술에 취해야 한다는 강박에 집 근처 편의점에서 소주를 사서 주차장 근처에서 몰래 병째로 급하게 마시고 귀가하는 일까지 발생 했습니다. 결국 저의 술 문제로 부부싸움이 잦아졌고, 아내는 서울 근무지 근처로 원룸을 얻어 생활을 하며 주말 부부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저는 회사에서 100명 정도 조직을 관리하는 관리자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관리자로 후배들 마음관리와 업무 면담 등으로 지친 심신을 달래는 방법은 귀가 후에 홀로 마음 편히 마시는 소주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마시는 양이 1병, 2병 늘어났고 급기야 어느 일요일 저녁. 저는 다음날 월요일 출근하는 것이 싫은 나머지 술을 마시게 시작하였고, 술에 취한 미친 정신에 1주일간 계획에 없던 장기 휴가를 냈습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아침, 점심, 저녁, 새벽 간격으로 자고 깨면 마시는 일을 1주일간 반복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중독현상을 처음 겪어본 제는 스스로 제어가 되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물만 마셔도 구토가 일어나고 몸이 떨리며, 얼굴색은 죽은 시체와 같은 몰골이었습니다. 제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 할 수가 없었고 제 아내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1주일 사이에 변한 제 모습을 보고 아내는 알코올 중독 치료를 위한 입원을 권유하여 2021년 3월 19일 회사 인사팀의 도움으로 약 3개월 가량 병가를 받아 다사랑중앙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약 11주 가량 다사랑중앙병원에서 진행하는 회복 프로그램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술에 대한 문제를 원장님과 상담사 선생님을 통해 상담을 할 수 있었던 부분입니다. 은밀했고 누구에게 털어 놓기 어려운 고민을 경청해주시고 함께 공감 해주시는 치료진들의 모습에서 제 스스로 위로를 받고 술문제를 해결 하겠다는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병원에서 하루 일과는 6시 기상과 함께 시작하는 명상으로 반복적인 바쁜일상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평온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회복 프로그램으로 진행되는 경험담과 알코올중독에 대한 원인과 해결 방법에 대한 교육은 제 스스로 저의 문제를 생각하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저는 술을 많이 마신다는 단편적인 문제가 아니라 ‘왜 술을 마시게 되었고 술을 마시는 다른 사람과 달리 나는 왜 이것이 문제가 되었는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시간 이후 저는 제 감정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일기를 쓰기 시작했고, 제 스스로 단점이며 약점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 자연스러운 일들로 받아 들이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스트레스를 억지스럽게 이기려는 노력보다는 받아들이는 마음 가짐을 가지게 되니 자연스럽게 잠자는 시간도 편안해지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온전하게 제 문제에 대해서만 집중을 할 수 있는 치료 과정을 마친 후 저는 6월 12일 퇴원을 하였습니다. 퇴원을 하면서 앞으로 술 없는 인생은 어떨까? 참 재미없겠다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년이 넘은 현재 그 생각은 기후였습니다. 신체적으로는 얼굴 색이 맑아졌고, 체중도 빠지면서 타인에게 나 스스로를 내보일수 있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회사 일을 마친 후 곧장 집으로 귀가를 하니 잠들기까지 그 많은 시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나 스스로에게 보상을 하고 값진 시간을 가지고 싶었던 저는 다양한 취미생활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베란다에는 여러 반려 식물을 키워 싹도 틔우고 열매도 맺게 하는 재미를 얻게 되었고, 술로 인해 다툴 일이 없는 아내는 올해 초 공무원 시험에 합격을 하는 경사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달라진 것은 회사 업무를 대하는 저의 자세입니다. 치료 전에는 회사 업무를 죽기 살기로 안되는 일도 억지로 했던 반면에 현재는 안되는 것은 받아들이며 인정하는 자세입니다. 이런 받아들임은 동료 직원을 경쟁자에서 협력자로 느껴지게 되었고 더이상 회사일이 스트레스로 느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런 심리적인 변화로 인해 자연스럽게 술은 멀리하게 되었고, 신기할 만큼 술을 마시고 싶다는 갈망감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퇴원 후 익숙하지 못한 단주 생활 중 맞이할지도 모를 위기를 예방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외래 진료를 병행하며 원장님과 상담사 선생님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칫 자만으로 일순간 무너질 수도 있는 위기에서 저를 지켜주는 매우 중요한 과정 중에 하나로 지속적으로 유지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알코올중독으로 병원에 입원하는 첫날 저녁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받아들일 수 없는 큰 일로 자괴감에 빠졌고 이 문제를 이겨 낼 수 있을지 자신감도 없었습니다. 이런 불행이 다사랑중앙병원의 회복 치료를 통해 알코올중독은 나의 내면에서 오는 병이며, 알코올중독을 받아 들이고 슬기롭게 해결해 나가는데 도움이 되는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저와 같은 많은 알코올 중독자들이 삶의 희망을 놓지 않고 건강하게 사회로 복귀하도록 앞으로도 다사랑중앙병원이 지금과 같은 역할을 해주시길 기대 합니다. 끝으로 저의 치료와 회복에 도움을 주신 다사랑중앙병원의 모든 관계자 여러분들의 노고에 경의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1389031911 2022-11-17
[2022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나의 아름다운 영혼을 되찾고 유지하기 위해
[2022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참가상] 나의 아름다운 영혼을 되찾고 유지하기 위해 아빠가 오랜시간 동안 알코올중독에 빠져 지금까지 헤어나지 못하는 바람에 무책임한 가장으로서 가족들에게 온갖 피해를 주고 허송세월만 보낸 것 같구나. 해끼침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것이 우선인 것 같다. 먼저 직장 근무 당시 술을 먹고 외박을 하여 불안 초조하게 했던 일, 밤늦게까지 술을 먹고 집에 연락을 하지 않아 근심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게 한 일, 술을 먹고 익일 직장에 무단 결근 한 것, 카드 빚으로 경제적 고통을 같이 느끼게 한 것, 술 문제로 직장을 잃었을 때 경제적, 정신적 고통을 안겨다 준 것, 최근 병원에서 퇴원하여 다시 음주 재발되어 술에 취해 흉기를 들고 소란을 부렸던 모든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 그러함에도 나의 병을 고치기 위해 이 병원 저 병원 입원을 시켜 치료를 받게 해 준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나도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려고 나름대로 치료에 전념하였지만 매번 단주에 실패하여 심한 좌절감을 느껴 포기하려고 했지. 그 때마다 OO엄마가 다사랑중앙병원이 아니면 더 이상 나의 병을 치료할 수 없다며 자식들을 생각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말에 차마 이를 뿌리칠 수가 없었어. OO엄마의 간절한 마음이 있었기에 나도 병원치료에 전념할 수 있었어. 그런데 코로나 19가 터지고 약 1년 6개월 동안 다사랑 재활병동에서 단주를 유지했었지만 이 기간 동안 주말 외박을 하지 못해 나도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고 은연 중 핸드폰의 부적절한 동영상과 웹 소설 같은 것을 구독하다보니 왜곡된 생각과 믿음에 빠져 중독성 사고를 형성하게 되었고 퇴원 당인 예기치 않은 상황에 나의 성격상 결점과 중독성 사고가 드러나 음주재발로 이어졌던 거야! 그리고 병원에 재입원하여 약 1주일동안 내가 무엇 때문에 술을 먹었는지 몰랐을 정도로 알코올이 얼마나 교활하고 나를 당황하게 만들며 또 강력하다는 말이 실감이 났고, 알코올중독은 그렇기 때문에 신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깨닫게 되었어! 이제 이러한 질병으로부터 나의 단주유지의 첫 걸음은 나의 아름다운 영혼을 되찾고 유지하기 위해서야, 나의 머릿 속에는 두 가지의 영혼이 있는데 하나는 아름다운 내 영혼이고, 다른 하나는 아름답지 못한 영혼이야, 영은 생각과 마음, 정신이고 혼은 목숨 곧 생명이라고 했으므로... 나의 아름다운 영혼은 생명으로 이끄는 나의 생각과 정신이고, 반면 아름답지 못한 나의 영혼은 죽음으로 이끄는 나의 생각과 정신이지. 나의 아름다운 영혼이 늘 아름답지 못한 영혼에 가리워져 나 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 상처만 주었어. 그리고 나의 중독성 사고와 성격상 결점들이 아름답니 못항 영환에 자리잡아 지금까지 죽을의 길로 이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에 벗어나 당연히 생명을 택하고 오직 생명의 길로 나아가야만 나의 가족들에게도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확신해. 이를 위해 우선 재활병동에서 AA자조모임에 참석하는 것이고 온전한 생활 교재 각 주제별 발표 그리고 타인을 위한 기도야. 재활병동에서 AA자조모임의 단주경험 발표와 온전한 생활 교재 각 주제별 소감을 환우들에게 발표하도록 하는 것은 알코올중독으로부터 회볶에 이르게 하는 최선의 치료방이라는 것을 깨달았어. 저번 음주재발한 것도 재활병동에서 나의 청력장애와 주제 발표를 거리는 나의 소심한 성격으로 말미암아 교육 받는 것을 소홀히 한 탓이었어. 하지만 이번 재활병동 치료에서 교육을 전적으로 믿고 교육에 이하다보니 알코올로 인한 중독성 사고와 성격상 결점 등으로 빚어진 오래된 습관의 변화에 대해 발표하고자 하였을 때 폭 넓은 자료를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어느 저자가 말하기를 오래된 습관의 변화는 습관의 변화에서 변화할 수 있다는 믿음은 필수적 요건이다. 그러한 믿음은 공동체와 함께 할 때 성장한다. 여기에 필요한 믿음은 같은 목적을 지닌 사람들의 모임에서 도움을 받을 때 상대적으로 쉽게 구할 수 있다. 모임의 일원으로서 습관을 바꾸려는 결심이 흔들릴 때마다 모이의 도움을 받으면 성공 확률이 극적으로 올라간다. 따라서 새로운 습관을 만들고 싶다면 새로운 모임에 가입해야 한다고 했어. 그리고 알코올중독자이면서 AA모임 창시자 빌과 받은 두 사람이 서로 상대방을 도와주려고 노력을 했더니 술을 끊을 수 있었다. 그 후 각자 생활하며서 환자들을 하나둘씩 모아 도와주려고 노력하였고, 비록 환자는 계속 술을 마실지언정 도와주려는 사람은 단주생활을 계속 할 수 있었다고 했어. 이로 보아 알코올중독 회복에 있어서 AA모임 참석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인 것이고, 온전한 생활 교재는 힘겹게 단주의 길을 갔던 인생 선뱅의 단주에 도움되는 생각과 생활방식을 정해 놓은 것으로 나의 단주 양식이라고 생각해. 아빠는 재활병동에서 알코올중독의 본 치료의 중대성을 깨달아 알코올중독으로부터 회복할 수 있다는 확실한 믿음을 다시 한 번 가지게 되었고 하루하루 치료를 위해 교육에 전념하고 있어. 아빠가 병원에 입원할 때는 비록 술 취한 양아치였지만 퇴원할 때는 멋진 신사가 되어 귀가할테니 기다려다오! 끝으로 O주와 O건아! 아빠가 지금까지 살면서 느낀 것인데 술 담배를 안하는 것이 어찌보면 세상 사람들에게 하찮게 보일지 몰라도 내가 볼 때는 인생의 반을 성공한 것인나 다름이 없다고 본다. 그러니 세상을 너무 위축되게 살지 말고 담대하게 살되, 너희들의 소망, 나라와 제사장의 반열에 꼭 우뚝 올라서거라! 병원에서 아빠가!
1389031911 2022-11-17
[2020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하늘이 내게 주신 마지막 생명의 빛은
[2020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특별부록①] 『회복자 선배가 전하는 메시지』하늘이 내게 주신 마지막 생명의 빛은 저는 다사랑중앙병원에서 알코올 상담사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들의 모임(A.A.모임)에서의 저의 익명은 알코올 중독자 한입니다. 죽는 날까지 한 방울의 술도 마시지 말아야 하는 영원한 알코올 중독자로 살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16년 전 병든 나만의 자아로 인하여 술에 탐닉하게 되면서 알코올 중독의 길로 빠져들어 죽음 직전 삶의 밑바닥까지 내려앉은 최악의 순간(생사의 갈림길, 가족의 해체, 사회적 관계의 파탄 등)을 맞이한 저에게 하늘이 주신 마지막 생명의 빛은 다사랑중앙병원과의 만남이었습니다. 가족이 떠난 상실감까지 더해져 매일매일 알코올 중독의 늪에서 사람이지만 사람이기를 포기한 저의 삶은 거리의 노숙자로 가기 위한 마지막 바닥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내 안의 나를 지켜주던 마지막 남은 뜨거운 기운으로 다시 살고 싶었습니다. 여동생에게 구원을 요청해 다사랑중앙병원과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관리 병동에서 조금씩 알코올이 해독되면서 알코올 의존 치료 프로그램을 통하여 나의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하나씩 인지하게 되었고 ‘진정한 삶의 바닥치기’가 온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살아온 삶의 자서전인 1단계 자기 점검을 끝내고 어떻게 단주해 회복의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것을 학습, 훈습 하는 치료를 받기 위해 개방 병동으로 전동하게 되었습니다. 9주 과정의 프로그램과 주치의를 비롯한 치료진과의 집중 상담을 통하여 ‘술이 문제가 아니라 마신 내가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고 ‘어떻게 하면 지난날의 나를 새로운 나로 거듭나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하며 회복 목표를 갖게 되었습니다. 개방 프로그램을 마무리하게 되는 시점이 가까워지면서 제 마음속에는 두려움과 불안이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돌아갈 가정도, 기거할 집도, 복귀할 직장도 없는 제 삶은 정말 바닥이었습니다. 입원 전 술을 매일 마시던 제가 퇴원 후 정말 단주하며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극도의 두려움과 불안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이런 불안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병원의 도움밖에 없었습니다. 주치의 원장님과 면담해 원내 재활 치료 과정을 통하여 나 자신의 홀로서기 훈련을 하면서 단주 회복의 삶을 살 것을 인생의 목표로 결정하였습니다. 알코올 의존증 환자들의 중독적 사고는 자아가 약하고, 자기중심적이고, 의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 끊임없는 연습만이 답이었습니다. 주간에는 원내 재활 훈련을 통하여 타인을 배려하고 봉사하는 마음의 자세를 갖는 직업 훈련을 하고, 야간에는 자기 점검의 시간을 가지면서 저 자신의 중독적 사고의 틀을 하나씩 비워내는 훈련을 하였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부딪히는 문제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을 습득하고, 극도로 낮아진 자존감을 키우는 과정을 통하여 홀로서기 능력을 키워 건강한 사회인으로서 사회에 진출하기 위해 밑거름이 되는 훈련이 원내 재활 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내 재활 훈련 중 주치의 원장님께서 “한 선생님, 외국의 알코올 의존증 치료 현장에는 알코올 의존증을 극복하고 회복의 길을 가고 있는 치료진들이 많이 있습니다. 알코올 상담사 공부를 한 번 해보지 않으시겠습니까?”라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당시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고민을 하던 중이었던 저는 2번째로 삶에서 빛을 보았습니다. 2년간의 사회복지학 공부를 시작하였고 원내 재활 훈련을 통해 받는 소정의 훈련비는 사회복지학 공부를 위한 학비로 정말로 소중하게 사용해 아주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는 하늘이 제게 주신 마지막 생명의 빛을 다사랑중앙병원을 통하여 꼭 움켜쥐었습니다. 이 빛은 제 능력과 삶이 다하는 날까지 놓지 않겠습니다. 제가 다사랑중앙병원에 환자로 입원해 알코올 의존증 치료를 통하여 특히 원내 재활 훈련을 통하여 회복의 삶을 시작하였고 지금은 저의 작은 힘이나마 저와 같은 병을 앓고 있는 환우분들을 위하여 알코올 상담사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다사랑중앙병원의 원내 재활 프로그램은 저를 포함한 많은 알코올 의존증 환우분에게 삶의 희망이자 빛입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하여 많은 환우분이 회복의 과정을 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길 간절히 바랍니다. 다시 한번 다사랑중앙병원 모든 치료 관계자분들에게 경의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다사랑 2021-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