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대상] “Drunken psychology counselo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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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22-11-17 | 조회수 | 8342 | 이름 | 13890319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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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알코올 중독 회복수기 공모전 대상] “Drunken psychology counselor” -부제: 두 주먹 꽉 쥐고, 두발에 힘주고! 아직 젊다고 할 수 있는 30대 중반, 사회에서 인정받는 직업과 학위를 가지고 있던 저에게, ‘알코올중독’은 그 무엇도 보지 않고, 잔인하게 찾아왔습니다. 알코올중독이 찾아 온 것이 아니라, 저는 어쩌면 알코올중독이 될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태어난 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부터 다사랑중앙병원에서 원내 재활 일하지 않고, 병원의 수업을 들으며 재활병동에서 생활하는 ‘교육중심 재활’을 하고 있는 저의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저 혼자서 해결하려던 지옥 같던 시간들을 지나, 지금 가족과, 치료진과, 환우들, 협심자들과 함께 힘을 모아 그래도 그나마 한숨 돌리고 희망을 꿈꾸는, 아직 시작단계의 제 여정을 부끄럽지만, 솔직하게 들려 드리려고 합니다. 저의 음주는 10대 때부터 시작 되었습니다. 어떻게 술을 처음 마셨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제가 기억을 하는 순간부터는, 술을 잘 마시는 애, 놀 때 재밌게 노는 애, 돈 잘 쓰는 애가 저의 수식어였습니다.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가는 것보다, 안들어가는게 덜 혼난다는 저만의 생각으로, 핑계를 대며 날밤을 새서 술을 마시고, 끝을 봐야 술자리를 끝냈습니다. 많은 알코올중독자가 그렇듯, 저에게도 가족문제가 있었고, 또 어마어마한 어릴 적의 사건으로 그것을 잊기 위해, 어쩌면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미쳐버렸을지도 모르는 그 때의 사건들로 저는 점점 술을 더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았습니다. 내가 왕이 되는 것 같기도 했고, 돈을 쓰면 친구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고, 복잡한 생각들을 그때는 잊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사회에서, 학교에서 받았던 스트레스와, 내가 직면해야 했던 모든 감정을 피해 술을 마시며 허풍을 떨고, 되지도 않는 소리에 깔깔대며 저의 음주패턴은 점점 심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이야기를 하면, 다들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그리고 지금까지 술 마시는 핑계가 되기도 했던 가정의 어려움과 문제로, 여러 가지 사건들로 방황하는 10대부터 도망 치기위해 술을 마시기 시작 했고, 20대가 되어, 어릴 적부터 접한 밤문화로, 온갖 업소나 밤 세계에 통달한 저는, 점점 더 문제음주를 하게 됩니다. 밤에 마시는 것이 모자라, 아침술, 낮술을 시작 하게 되었습니다. 낮술은 정말 신세계였습니다. 낮에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은 식당이나, 24시간 호프집 등 싼 곳들 이었고, 아무리 마시고 취해도 해가 지지 않는 마법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저는 낮술 전도사가 되었고, 낮술에 그치지 않고 밤새 또 술을 마시고, 그렇게 20대를 보내게 됩니다.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됐던 저는, 대학을 다니며 술을 마셨고, 그마저도 처음엔 고도적응형 알코올중독자로 학교를 잘 다니는 듯 했지만, 낙제도 하고, 학교를 1년 더 다녀야 했으며, 휴학으로 대학을 길게 다니게 됩니다. 그때 까지만 해도 전, ‘젊은 나이에 군대도 안가니까’ ‘나 말고도 이렇게 노는 애들이 많은데’ 등의 생각으로, 유별나다고 생각하지 않고, 대학을 졸업하였습니다. 그렇게 겨우 대학 졸업을 하고, 일을 시작했습니다. 사회복지사로 취직하여 일을 하였고, 제가 겪은 아픔과 방황의 시간들이 지났다고 생각해, 청소년, 가족 상담을 해 보면 어떨까? 생각하며 대학원에 진학 했습니다. 대학원에 진학해, 일과 함께 대학원을 다녔습니다. 대학보다 더 심해진 알코올중독으로, 정말 겨우겨우, 아주 아슬아슬하게 학위를 받았습니다. 일과 대학원을 병행하며 저의 음주 문제는 알코올중독 말기 중 말기로 진행됩니다. 일을 하면서 일찍 조퇴하고 술을 마시고, 지각을 하고, 출장을 못가기 다반사고, 중요한 행사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공황, 우울, 불면, 불안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제 발로 정신과에 찾아가 진료를 받던 상황에서, 부모님께서 동네 부근에 유명하다는 자칭 알코올병원으로의 외래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때 이미 부모님은 알코올중독에 대해 공부하고, 정보를 모으고 있으셨습니다. 알코올중독임을 의사가 진단하고, 술을 마시면 절대 안 된다고 하는데도, 전 그냥 똑같이 술을 마셨고, 외래에 가서도 당당하게 술을 먹는다고 말할 만큼 병식이 없었습니다. 그 병원에 가는 것은 쉽게 수면제와 안정제를 받을 수 있다는 것 뿐 이었습니다. 입원을 몇 차례 권유했지만, 지금 하고 있는 일과 학업으로 당연히 단칼에 생각도 하지 않고 거절한 것은 당연합니다. 술 문제가 있다는 것은 인정하였지만, 알코올중독이라니, 솔직히 말해서, 대학원 나온 잘나간다는 심리상담사가 알코올 중독자라니? 라는 오만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 잘나신 심리상담사님께서 인생의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지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원래 하루 이틀 술을 마시면 끝이 나던 술이, 삼일이 되어도, 일주일이 되어도, 이주가 되어도 멈추질 않았습니다. 혼술은 못하겠다는 생각으로, 친구들을 바꿔가며 술을 계속 마셨고, 술을 사려면 돈이 필요했습니다. 상담비는 선불이라, 상담비가 들어온 것으로 술을 마시고, 코로나 핑계로 상담을 미루고, 취소하고. 그러다 돈이 떨어지니 대출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20대때부터 받은 대출이 있었기 때문에, 카드론이나 제2금융권으로 손을 뻗었습니다. 대출은 정말 쉬웠습니다. 핸드폰 하나로 간단하게 완료되는 것들이 많았고, 제가 있는 곳으로 친히 직원이 와서 태블릿 피씨에 싸인 몇 번으로 대출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 돈을 가지고, 유흥업소에 다니고, 친구들을 불러 모아 술을 사고, 집에는 안 들어가거나 옷을 갈아입을 때만 들어갔습니다. 대출은 점점 늘어났고, 카드한도도 꽉 차기 시작했습니다. 돈이 없어진 저는, 점점 싸고 허름한 곳을 찾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경제적인 밑바닥을 친 저를 당연히 친구들은 저를 외면했고, 몇몇 비슷한 자각하지 못한 알코올중독자 친구들끼리 의리를 외치며 저렴한 곳을 전전했습니다. 어차피 안주는 관상용이었으니, 되도록 안주도 한곳, 찾다 보니 할아버지들이 가는 전집이나, 식당 등에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코로나 때문에 밤늦게 술을 마시는 곳들을 찾아다니다, 단속이 심해지자, 낮에 편의점 말고 큰 마트에 가서 술을 사다놓고, 모텔에서 술을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어김없이 5시가 되면, 술이 깨기 시작하거나 모자라 아주 극도로 예민하고 불안한 마음을 이끌고, 식당이 열 시간이 가까워 졌기에, 잠깐 자거나, 술을 계속 마시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모텔 슬리퍼를 맨발로 신고, 며칠 씻지 않은 몸과 얼굴, 그래도 머리는 물만 묻히고 뜬 머리를 정리해 식당 문이 열자마자 술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온몸이 떨리고, 숟가락을 앉아있는 상태에서 명치 위로 들 수 없을 만큼 손을 떨면서도 ‘세 잔만 먹으면 괜찮아져!!’ 라고 외치며 소주를 원 샷 하고, 손이 안 올라가면 얼굴을 술잔에 닿게 숙여서 까지 술을 마시고, 술이 들어가면 또 괜찮아지는 몸에 또 밤까지 술을 마셨습니다. 그러다 온몸이 부서질 듯이 아프면, 집에 가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여관방에 불도 켜지 못하고 누워 식은땀을 흘리며 극도의 불안과, 환청, 환각에 시달리고 온몸이 경련이 일어나 금단을 하며 누워있다 또 술을 마시러 나갔습니다. 이때의 금단으로 저는 몸의 밑바닥을 쳤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몸으로 술을 마시고, 카드 값은 밀려오고, 상담은 코로나로 미뤄는 놨는데 진행하지 못하고, 직장도 될 대로 되라, 대출독촉이 들어오고, 극한으로 사람이 몰리니 정신이 나가, 이젠 술을 먹고 죽어야 겠다. 술을 먹고 죽으면 알아서 되겠지 하며 자포자기하고, 난 혼자다, 난 죽어야 한다는 환청과 함께 모든 것을 혼자 상상하고, 혼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웃었다 울었다, 화냈다 짜증냈다 하며 온갖 감정적 밑바닥을 치게 됩니다. 한번 집을 나가면 한 달, 두 달 술을 마시는 통에 엄마 아빠가 밤에 저를 찾아 다녔습니다. 경찰에 신고해 위치추적을 하기도 하고(성인이지만, 자살위험군에 있으면 신고가 가능), 제가 잘 다니는 술집들을 알아 찾아다니기도 하고, 제 공인인증서나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을 뒤져서 친구들한테 연락하고, 찾아오고. 잡아서 집에 놓으면 삼일정도 몸을 회복하고 또 나가고.. 일을 좀 시작하려고 하면, 극도로 불안한 금단을 못 참고 일하는 중간에 병원을 간다고 하고, 술을 마시러 가고, 정말 엉망진창의 삶을 살았습니다.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다른 직원들, 학부모들도 눈치를 채는 듯 했습니다. 그렇게 술을 마시다, 환청을 듣고,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 한 환촉과, 발이나 팔이 뒤틀리는 경련 등 극한의 말기 증상을 보이면서도 술을 마셨습니다. 그땐 술을 마시지 않으면 살 수 없고, 말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정말 술이라면 모든 것을 갖다 바칠 것 같이, of the 술, by the 술, for the 술(술에 의해, 술의, 술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모든 것의 중심이 술이었습니다. 엄마 아빠가 결심을 하시고, EMS를 대동하여 저를 찾아 다니셨는데 잘 피해 다니다 결국 붙잡혀 첫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입원을 권했을 때, 입원 했다면.. 이렇게 온 인생을 다 잃고, 이렇게 긴 시간동안 병원생활을 하지 않았을 텐데, 라고 후회도 들지만, 각자의 “때” 가 있다는 말을 절실히 공감합니다.
중독을 인정하지도 않는 알코올중독자의 첫 보호입원은 스펙터클 했습니다. 일단 도망갈 힘이 없어 붙잡혀 타기는 했는데, 점점 불안하고 화가 나는 마음에 욕을 하고 침을 뱉고, 빌기도 하다가 또 침을 뱉고 욕을 하고, 울어도 보고, 빌어도 보고, 오줌도 싸고.. 내리자마자 죽는다고 소리를 지르고.. 다사랑으로 가달라고 했던 EMS는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저를 이송하게 됩니다. 입원을 정말 죽을 만큼 거부하다 엄마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송아, 난 너를 살리고 싶다”라고 울먹이는 모습에, 그 정신에도 결심을 하고 병동으로 올라 가 병원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4개월, 6개월 정도를 그 병원에서 2번 입원을 하였습니다. 그 병원에 익숙해지고, 그 병원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는 형님들과 정이 들어 재입원도 그곳을 선택하였습니다. 두 번의 입퇴원 사이사이에 알코올중독자 자조모임에도 정말 열심히 나가보았지만, 재음주가 계속 되었습니다. 술을 일부러 안 마시기 위해 위절제 수술을 무리하게 예약을 했지만, 입원 당일 술을 먹느라 가지 않은 것도 모자라, 그 다음날 아침 만취해서 병원에 가서 수술해 달라고 떼를 쓰는 만행을 벌이고, 술이 거나해 링겔 맞고 코골고 자다가 부모님이 오셔서 집으로 가는 길, 그대로 도망쳐서 술을 마시러 또 나가는 정신 나간 인간으로 알코올중독은 점점 더 심해지고, 진행이 되었습니다. 제가 알코올 중독자라는 것은 인정하게 되었지만, 제가 술을 피할 수 있는 힘은 없었습니다. 이 핑계로 넘어지고, 저 핑계로 넘어지고, 부모님은 저의 의지로 끊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알코올중독이 병임을 인지하셨지만, 그래도 의지로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다사랑중앙병원에서 가족테라피 수업을 들으시고는 ‘뇌질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셨다고 합니다. 공부를 해서 머리로는 알고는 있었지만, 깨닫지는 못하셨던 것입니다. 점점 더욱 심해지는 불안과 압박감에 다시 술을 마시고, 안 마셔야 되는 것을 알면서도 술을 마시고. 자조모임에서 어떤 것을 배울 새도 없이 술을 마시고, 재 음주를 계속하였습니다.
이번에 입원 할 때엔, 술 시동이 걸려 이틀째 술을 먹고 있는데, 다사랑중앙병원 출신이셨던 전 병원 주치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송 선생님은 술을 이틀이상 마시기 시작하면 무조건 입원 하세요.” 무슨 생각인지 저는 부모님께 전화해 다사랑병원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병원에 입원한 때부터 일주일 동안은 기억이 없습니다. 보호사 선생님께서 “송 선생, 부모님한테 특히 엄마한테 잘해-!”라고 계속 말씀하셔서 여쭈어 봤더니, 일층에서 병동에 올라올 때, 엄마한테 신경질을 내며 화를 냈나 봅니다. 제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 병원은 왜 주치의도 안 오고, 상담사도 안와?’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동안 계속 면담도 하고 진료도 봤는데 기억을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관리병동에서 저는, 삼일만 있다가, 일주일만 있다가 술만 깨고 나가야지 하며 집에 갈 생각만 했습니다. 나름 자조모임도 열심히 나갔고, 어느 정도는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제가 아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저 뜬구름 잡는 단주, 그냥 술을 마시면 안 된다. 라는 맥락의 내용들만 제 머리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부모님과, 이왕 다사랑에 입원 했으니 한번 해보자는 결심으로 개방병동까지 수료 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습니다. 그러던 도중, 마지막 제 자존심이었던 석사 출신, 박사 학위 공부 중인 심리상담사(사회복지사)를 무급휴직상태로 이름만 유지하며 끈을 붙잡고 있었는데, 저를 지탱하던 그마저도 퇴사를 하여 아무것도 저에게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누구에게나 멋지게 보이려고 하고 있던 박사학위 공부를 중단했습니다. 이것은 제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멋진 모습의 가면을 벗는, 술주정뱅이인 나를 드러내는 엄청나게 중대한 결정이었습니다. 이왕 다사랑중앙병원에 온 김에, 왜 알코올중독 병원의 하버드라고 하는지, 구경이나 해보자, 그리고 개방병동 수료를 하면, 부모님도 아무 말 못하겠지!! 라고 생각 하며, 빨리 개방에 가기 위해 과제도 내주면 2시간 안에 해서 제출하고, 수업도 잘 듣고 생활했습니다. 그런데 제 성격적 결점 중 하나인 남들 눈치 보는 성격이 심각하게 발동하고, 마른주정이 와서, 환우들과 이야기도 하지 않고, 혼자 계속 있고, 관리병동 마지막쯤엔 누워만 있어서 120KG까지 나갈 만큼 살이 찌고, 저 혼자 6병동 전체를 왕따 시키고 있었습니다. 아침에는 일어나기 힘들었고, 명상은커녕 앉아있기도 힘든 몸 상태 였습니다. 그 안에서 감정적 요동이 엄청나게 일어났습니다. 술이 어느 정도 깨니,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라는 것이 물밀 듯 밀려오며 저를 혼란스럽게, 괴롭게, 아니 미칠 정도로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때, 제 인생에 전환점을 안겨준 담당 상담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왕 병원에 있는 것, 상담사 선생님께 모든 걸 털어놓고 나가자 하는 심정으로 괴롭혔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 한 시간을 꽉꽉 채워 상담을 하며 모든 것을 털어 놓았습니다. 상담사 선생님께서는 저를 상담전공자로 보지 않으시고, 환자로만 대해 주셔서 저는 아무런 가식 없이 욕도 섞어가며, 그냥 30대 중반의 청년으로 상담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때론 형처럼, 때론 친구처럼 상담사 선생님은 저의 모든 이야기를 들어 주셨습니다. 같은 상담사로써, 이런 엄청난 이야기들을 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상담자에게도 몸 적으로, 마음 적으로 힘들어 진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저는 살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냈습니다. 묵묵히 들어주시고, 제안해 주시는 것들로 전 점점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관리병동과 개방병동에서의 상담사 선생님의 상담은, 저를 병원에 있게 하는 이유 중 하나였고, 저의 회복의 시작에 상당히 큰 부분을 차지하였습니다.
다사랑은 다른 병원과는 다르게, 수업이 있었습니다. 사실 전에 병원에서는 인지행동 치료를 한다고 낱말 맞추기나 틀린 그림 찾기를 했습니다. 그와는 차원이 다른 수업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병원이 아니라, 연수원 같다는 느낌도 받을 만큼 수업이 있었고, 내용도 다양했습니다. 관리병동에서는 알코올 중독자임을 인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육과 활동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다사랑에 와서 알코올중독자임을 머리로 아는 것을 넘어가, 진정으로 알게(믿게) 되었습니다. 감기환자가 기침을 하는 것이 당연하듯, 알코올중독자가 술을 먹는 것은 병의 증상인 것을 알게 되었고, 술을 먹는 것이 잘못(죄)인 것을 논하기 전에, 병에 든 것이고, 병에 들어 한 행동들이 잘못(죄)인 것들이 많다는 것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혈우병 환자가 피가 멈추지 않는다고 비난하거나, 환자 탓을 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알코올중독자들은 손가락질 받고, 질타를 받을 수밖에 없을까? 생각도 했습니다. 관리병동에서의 기간이 지나가며 제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냥 버려지는 시간에, 책을 한번 읽어보자 시작하였고, 책을 읽고, 필사를 하였습니다. 하루하루 할 수 있는 만큼만 옮겨 적었고, 개방병동에 가기 전에 자조모임에서 많이 읽는 책들을 거의 다 필사 하게 되었습니다. 잠이 오지 않고 많은 잡념이 드는 밤마다 독서실에 가서 불을 켜고 한 자 한 자 필사한 기억이 납니다. 그때의 힘이 아직까지 저를 병원에서 생활 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 것 같습니다. 개방병동에 와서는 제가 눈에 띄게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마음의 변화인지, 아침에 일어나기 시작했고, 헬스장에서, 병동에서 무작정 걸어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추천도서를 1번 이상씩 읽었습니다. 그리고 수업을 들었는데, 수업은 원장님들, 상담사 선생님들이 전문분야에 맞게 수업을 맡으셔서 수업을 하셨고, 병에 대한 지식에 대한 수업보다는, 마음으로 수업의 중점이 맞춰졌습니다. 애니어그램 수업으로 나를 더욱 깊이 있게, 그리고 주변사람들을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되었고, 하루를 명상으로 시작하고, 조금은 자유로운 생활 속에서 수업을 들으며 생활했습니다. 관리병동보다 인원이 적기도 하고, 세심한 치료진의 생활지도와 케어로 안전한 생활을 하고, 제가 밖에서 술을 마시느라 듣지 못했던 12단계나, 4단계, 9단계 발표를 하게 됨으로 안전한 병원에서 단주를 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커리큘럼에 따라 개인맞춤형 상담과 함께, 공동체 회의나, 병동끼리 모이는 그룹상담시간을 통해 다른 사람의 생각도 듣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어떻게 해 나가야 하는지를 배웠고, 밖에 있을 때 알코올중독자 자조모임에 가서 열심히 다녔지만, 저는 그때 배울 수 없던 12단계, 사회기술훈련, 온전한 생활, 재발방지, 애니어그램 등을 병원에서 교육 받으면서,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고 알아야 술을 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밖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알려주지 않았던 것들을, 병원에서 심도 있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특히 원장님들이 직접 하시는 강의에 신뢰도 쌓이고, 누구도 알아들을 수 있게 수업해주시는 방식에 점점 제 마음의 힘이 길러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처음에 상담사 선생님의 제안으로 하루에 20분씩만 런닝머신에서 걷자는 것이, 점점 익숙해지면서, 20분이 30분이 되고, 30분이 1시간이 되고, 매일 먹던 야식 라면을 점점 줄여가며,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는 26kg을 감량할 정도로 운동량이 많아졌습니다. 살이 빠지며, 건강도 점점 좋아지고, 자신감과 나도 할 수 있다는 기쁨, 기본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개방병동의 하이라이트는, ‘받아드림 암송’, ‘4단계’ ‘9단계’발표일 것입니다. 단계발표는 퇴원과 밀접한 관계도 있고, 병원에서 중요시 하는 시간이기에 정말 거의 모든 환자들이 열심히 준비합니다. 저도 밖에서 용기가 부족해 하지 못한 4단계작성과 발표, 9단계의 보상계획까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준비하여 발표 하였습니다. 4단계 발표와 9단계 발표를 마치면 퇴원한다는 마음에 그날만을 기다렸는데, 저에게 갑자기 재활병동이라는 카드가 나타났습니다. 재활병동을 선택하기에는 제가 퇴원한다는 기대가 너무 컸기에, 또다시 불평, 불만과 극심한 답답함, 화가 났지만, 병원에서 배운 달라진 저의 대처 방법을 사용하는 발전을 보이며, 진지하게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세상으로 나가 부딪히기엔 저도 저 자신을 믿지 못했고, 수업을 듣긴 들었지만 9주라는 기간은 저에겐 충분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제 인생에서 술을 안마셔본 기간이 6개월 정신병원입원이 가장 길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단도직입적으로, 솔직하게 왜 재활에 가야 하는 질문에, 어찌 됐든, 1년, 2년 술을 안 먹는 경험을 한 번도 안 해봤으니 해보면 어떨까? 라는 상담사 선생님의 말씀에 솔깃했고, 여러 가지 사정상, 원내재활일은 하지 않고, 개인적인 공부를 하면서 수업을 개방 때처럼 듣는 교육중심 재활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결정하고 나니, 속이 시원했습니다. 그리고, 병원에 대한 믿음이 생겼기 때문에, 재활병동을 만든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많은 육체적인 질병들도 재활운동을 하듯, 나도 재활이 필요하겠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재활병동에서 생활을 잘 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하루가 천 년 같고, 일주일이 안 갔는데, 이제는 하루하루가 오롯이 지나갑니다. 알코올중독자에게는, 아니, 저에게 있어서 ‘아무 일 없는 하루’는 겪어보지도 못했고, 어떻게 보내야 할지, 내가 이렇게 아무 일 없이 하루를 살아도 되나? 라는 생각이 들 만큼. 매일 매일이 지옥 같고, 우울했고, 자살시도를 해야 할 만큼 힘들었으며,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고, 술에 쩔어 인간이하의 날을 살던 저에게 보통의 날들이 이렇게 있다는 것은 사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기도 합니다. 앞에서 아주 간단하게 가족문제와 나의 문제가 있다고만 언급했지만, 그 문제들이 누구보다 심각하고, 어렵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저를 괴롭히고, 죽을 때 까지 나를 쫓아다닐 것을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문제들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바뀐 것은 제 자신입니다. 일단, 귀로 들리는 것부터 달라지고, 그 문제를 바라보는 나의 눈과 마음이 달라졌고, 그것을 해결하려 애를 쓰기도 해야겠지만, 접근 하는 방식의 변화와, 나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변하며, 그대로 직면해서 나의 변화된 행동으로 조금씩 쪼개어 내가 할 수 있을 만큼 노력할 때, 어느 순간 그 큰 문제덩어리는 제 두 손가락에서 먼지가 되어 날아갈 것이라는 것을 병원에서 많은 훈련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술을 한창 마시던 그 지옥 같은 때에서 한 발짝 물러나 나의 이야기 속에 있지 않고, 그 이야기를 3인칭으로 바라보는 것을 느끼며, 술을 찾아서 마시지는 않겠지? 라는 용기도 납니다. 이렇게 변함에 있어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가족입니다. 병원에 있을 수 있는 것도 가족의 희생으로 있을 수 있었고, 3번째 입원 할 동안 지옥 같은 시간과 악마같은 저를 묵묵히 견뎌준 가족들이 있기에 이때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관리에서, 개방에서 퇴원하는 환우들, 그리고 이미 회복에 길에 들어선 선배 선생님들을 보며, 병원에 잘 있다가도 하루에도 열두 번 씩 마음이 오락가락 하지만, 저의 때가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가 병원 문을 힘차게 나설 그 순간이 언제 일지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내며 그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병원에 있어서 친동생의 상견례도, 사랑하는 외할머니의 임종과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이걸 계기로, 내가 회복하여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온전한 모습으로 있는 것이 저의 회복의 목표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긴 터널을 지나고 있지만, 언젠가는 끝이 있을 것이라는 저희 부모님, 그저 묵묵히 견디는 것만이 할 일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술자리에 있을 때, 연락을 일부러 피하면 엄마는 문자를 보내셨습니다. 카톡은 읽으면 표시가 나서 안 읽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마다 엄마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두 주먹 꽉 쥐고, 두 발에 힘 주고, 그 자리를 박차고 집으로 와라” “너의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다” 정말 일어나기 힘든 술의 자리지만, 일어나기 싫고, 일어날 수도 없는 술의 자리였지만, 지금 그래도 술 마시지 않은 정신에 회복을 꿈꾸며, 하루를 살아내는 내 자신에게 이젠 스스로 수고했다 말 할 만큼의 여유도 생겼습니다. 가장 극심했던 순간들을 기억하려고 애쓰며, 맨 정신에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감정들을 처리 하는 연습을 하고, 술로 도피하는 것이 아닌, 당당히 서서 맞서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한마디에, 한 눈빛에 밤새도록 고민하고, 좌절하던 저의 모습에서, 피하지 않고 그것에 당당히 맞서고, 아직 마음의 근육이 약해, 좌절하고, 쓰러지고, 포기하고 싶을 때, 어두운 방에 혼자 있지 않고, 안전한 병원에서 옆에서 도와주시는 치료진과 환우들, 가족들이 있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고 다시 일어나고 있습니다.
재활병동이 정답도 아니고, 개방병동도 정답이 아닙니다. 알코올중독자에게는 모든 것에 밑바닥을 치고, 스스로 항복하고 시인하는 것이 가장 큰 치료(회복)의 시작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 항복이 언제 될지도 모르고, 심각하게 엮인 감정과 문제들이 풀리기 시작할지는,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그저 그 ‘때’를 기다리며, 지옥 같은 알코올중독을 앓으며, 바라보며, 견디는 시간은 개개인마다 다를 것입니다. 지금도 한 순간 한 순간 힘든 고비를 넘기고 있는 알코올중독자들과 가족들, 그리고 협심자들과 치료진들께 제 감사와 응원을 전하며 이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 지금 이 글을 읽어주신 다양한 사연을 가진 여러분,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 두 주먹 꽉 쥐고, 두발에 힘주고! “일어나, 함께 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