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다사랑 재활수기 공모전] 터무니없는 약속인가?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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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21-02-09 | 조회수 | 399 | 이름 | 다사랑 |
첨부파일 | 2016환자회복수기_썸네일.jpg | ||||
[2016 다사랑 재활수기공모전 참가상] 터무니없는 약속인가?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OO “중곡동 국립병원 모임가고 있음. 왕십리 행당교회 거쳐 평촌 하루그룹에서 마무리합니다. 평온한 하루 되세요!!” “아빠 오늘도 파이팅!!” 버스를 타면 제일 먼저 딸과 주고받는 카톡이다. 물론 후원자 선생님이나 협심자 선생님과도 비슷한 내용의 카톡을 주고받는다. 딸을 포함해 카톡을 주고받는 멤버는 5명을 넘지 않도록 한다. 어느 멤버 선생님의 제안이다. 그리고 나면 매일 메시지를 정리하여 보내주시는 멤버 선생님의 카톡 글들을 읽어본다. 아침에 본 메일의 명상도 한 번 더 읽어본다. 찬송가를 들으며 다른 사람들의 잡담과 통화소리에 짜증을 내지 않으려 한다. 오늘, 2016년 2월 15일이 내가 100일 작전이라는 용의를 갖고 A.A.모임을 다니기 시작한지 93일째 되는 날이다. 다음 주 2월 22일이면 딱 100일이 되는 날이다. 나는 1961년생으로 올해 우리나이로 56세이다. 2008년 9월 다사랑중앙병원에 처음 입원한 이래로 2015년 9월 8번째 입원을 하였다. 한창 일할 수 있는 세월을 병원에서 보낸 셈이다. 2007년 11월 술 문제로 17년간 다니던 직장(직장생활은 20년 했음)에서 명예퇴직을 한 뒤 계속 문제가 된 유흥비로 인한 부채를 가족과 의논하여 해결할 생각은커녕 명퇴금을 갖고 도피할 궁리를 했었다. 원 없이 돈이나 써보고 죽자는 미친 생각으로 5개월간 가출까지 하였으나 결국은 죽지도 못한 채 돌아온 나는 2008년 6월 이혼으로 딸과 처에게 부채로 인한 피해가 가지 않도록 했다. 그러나 당장 살아갈 집을 구하는 것과 생활비에 대한 문제는 고스란히 애엄마가 떠맡았고 나는 계속 알코올 중독의 늪에 빠졌다. 급기야 2008년 9월 자살소동으로 처음에는 한 일산 병원의 정신병동에 입원하였으나 형의 정보망을 동원하여 알코올 전문병원을 찾아 이틀 만에 다시 다사랑중앙병원으로 옮기게 되었다. 처음 입원한 나는 다른 환우들과는 다르게 모든 것이 편했다. 전부터 스스로 알코올 중독자라고 생각했고, 항상 술 취한 상태에서는 정신과에 가서 상담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을 했지만 술이 깨면 행동으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1단계는 바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받아드림은 완전한 항복이 아니었다. 그리고 개방병동에서의 나머지 단계들은 재활병동을 가기 위한 과정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왜 병원에 있는지를 망각하며 그저 혼자 살기 싫으니까 병원생활을 한 것 같다. 정직과 겸손이 단주를 하기 위한 기본적인 자세인데 나는 부정직과 교만으로 일관된 병원생활을 하였다. 즉 단주에 대한 절실함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병원에 있는 동안에도 갈망감 이 오면 주저 없이 외박 시 몰래 음주를 하였다. 그 후로도 입원하면 회복은 뒷전이고 취업을 위한 재활과정만 2번을 거쳤고 단기 입?퇴원도 몇 번 했다. 7번째 입원 중인 2014년 1월 어느 날 외출 후 갈망감에 아무 죄책감도 없이 음주를 하고 귀원한 후 음주 측정을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삑’ 소리가 났고 바로 7층으로 격리되었다, 측정치는 0.01. 이전에 공식적으로 음주 귀원이 한 번 있었고, 외박 시 음주도 했으나 이렇게 걸려본 적은 처음이다, 정직과 겸손이 땅에 떨어졌는데 어떻게 핑계를 댈 수가 없었다. 잠깐 갈등도 하였지만 더 이상 병원에 있을 수가 없었다. 바로 퇴원하고 다시 조절 망상을 하였고 생활비(술값)는 있어야 하기에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취직했다. 격일제 근무를 하면서 조절음주를 하다가 2~3개월 내에 사표를 내고 장취하고는, 집 근처 병원에서 1~2주 입원하여 몸만 회복하고 또 다시 취업하는 일을 반복하였다. 2015년 6월초 결심 끝에 나를 잘 아는 멤버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집에서 A.A.모임과 수원 다사모를 다니면서 단주를 시작하였으나, 두 달도 못 가서 다시 음주를 하고 바로 장취에 들어갔다. 아직 힘이 없는 상태에서 혼자 생활하는 것이 무척 힘들다고 생각했었지만, 원인은 우리의 길을 철저하게 따라가지 않은 것이다. 또한 A.A.의 약속을 절대적으로 믿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다사랑중앙병원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된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딸에게 병원에 보내달라고 할 용기도, 또 입원비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으로 계속 미봉책으로 일관했다. 2015년 9월 4일, 7월에 재발한 이후 세 번째로 동네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고 이번에는 당직 간호사가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는지 딸에게 연락하여 밤늦게 나의 상태를 보고 가서는 다음날 엄마와 함께 병원에 왔다. 나의 심한 금단현상을 처음 보는 두 사람은 무척 당황해하는 것 같았다. 사람은 살려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였는지 결국 다사랑중앙병원에 연락을 했고 9월 7일에 입원을 하였다. 내 수중에 남아있던 45만원을 간식비로 다 넣자, 애엄마는 개방병동까지 입원비는 힘들지만 부담하겠다고 약속하였고 그 다음부터는 알아서 갈 길을 찾으라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 담뱃값까지는 못 주겠으니 끊으라는 당부도 했다. 나는 약속했다. 그렇게 하겠노라고. 그리고 약속 하나는 지금까지 잘 지키고 있다. 담배가 끊어졌다. 입원 첫 주에 예배에 참석했다. 신앙심 때문에 참석한 것은 아니었는데 찬송가를 부르니 한없이 눈물이 났다. 다음 주에도 참석했는데 계속 눈물이 났다. 돌아온 탕자가 되어 회개하는 기분이었다. 성령이 내게 임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지금은 찬송가를 들으면서 모임에 다닌다. 평온함이 유지된다. 재활병동으로 전동을 하였으나 원내재활을 뒤로 미루고 100일 작전을 계속 했다. 후원자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우연한 기회에 한 멤버 선생님의 제안으로 의미를 갖고 모임에 다니기 시작했다. 어느 선생님은 병원 약을 빼먹지 말라고, 효과는 분명히 있다는 경험을 알려줘 이번에는 정말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약을 먹고 있다. 아직까지 심한 갈망감은 오지 않았다. 후원자 선생님도 내 제안을 받아주었다. 딸도 모임에 관심을 갖고 나에 대한 믿음을 조금씩 보이게 되었다. 나는 이제 든든한 후원자도 있고 매일 A.A.모임을 독려하는 딸도 있다. 그리고 그 딸에게 한 약속을 지키려는 용의를 갖고 노력하고 있다. 입원 초기에 상담사 선생님에게 부탁한 것이 우리가 매번 모임에서 읽는 A.A.약속이 <빅북> 몇 페이지에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냥 처음부터 읽어보면 될 것을 아직 술이 깨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빅북> 83~84쪽에 있었다. 읽고 또 읽었다. 12가지 A.A.약속을 믿기로 했다. 아니 믿어졌다. 딸을 생각하면 쓸모없다는 느낌이 사라지고, 경제적 두려움이 먼저 없어진다. 새로운 자유와 행복이 펼쳐진다. 약속이 하나하나 천천히 내게 다가오고 있다. 이것은 결코 터무니없는 약속이 아니다. 최소한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가 자기 성장의 과정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반도 끝나기 전에 놀라게 될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자유와 새로운 행복을 알게 될 것이다. 과거를 후회하지도 않고, 과거를 감추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평온함을 이해하고 평화를 알게 될 것이다. 우리의 타락이 아무리 심한 것이었다 해도, 우리의 경험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쓸모없다는 느낌이나 자기 연민은 사라질 것이다. 이기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어지고, 동료들에게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자기중심주의는 사라질 것이다. 삶에 대한 우리의 전반적인 태도와 관점이 바뀔 것이다. 사람들과 경제적인 불안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를 떠날 것이다. 우리를 괴롭혔던 상태들을 즉각적으로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우리들 스스로를 위해 하지 못했던 것을 신이 해주시고 계시다는 것을 갑자기 깨달을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터무니없는 약속인가?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우리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때로는 급속히, 때로는 천천히, 그것들을 위해 노력하면 항상 이루어질 것이다. 다음 화요일에는 홈 그룹에서 떳떳하게 백일칩을 받을 것이다. 단주 백일이 아니지만 그 백일의 의미가 듬뿍 담겨 있는 그 칩을. 나의 홈 그룹은 멤버가 많지 않다. 큰 부담이 없어 백일떡도 돌릴 계획이다. 딸과 대화 중에 모임에서 단주 기념일에 떡을 돌린다는 얘기를 하니까 서슴없이 “아빠도 떡 주문해”라고 한다. 백일에 떡을 했다는 얘기는 못 들었지만 백일이니까 괜찮다싶다. 매달 내가 쓸 수 있는 돈은 얼마 되지 않는다. 내가 돈을 갖고 있는 것을 딸이 불안해하기 때문에 내 체크카드를 딸에게 주었고 매주 교통비 정도만 입금해 준다. 떡값이 사만원인데 아빠 단주에 도움이 되는 돈은 하나도 안 아깝단다. 어떤 협심자는 떡은 1년칩 받을 때 많이 한다고 제안해 주시는데, 후원자 선생님은 본인이 하고 싶을 때 하란다. 3월 5일이면 A.A.에서 우리가 흔히 표현하는 막잔 놓은 지 6개월 되는 날이다. 술을 마시기 시작한 후 처음 지나온 시간이다. 앞으로 내가 마지막으로 술을 마셨던 그 날 2015년 9월 4일을 기억하려고 한다. 전에는 항상 그 기억을 의도적으로 지우려고 했기 때문에 쉽게 첫잔을 다시 잡았던 것 같다. 병원에서의 단주기간은 의미가 없다고 하시는 선생님들도 계시지만, 내 짧은 생각으로는 폐쇄병동에 있었던 생각만 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단주 기념일은 본인이 정하고 본인이 그 기간에 대한 책임을 가지면 된다고 하시는 멤버 분들도 많다. 2월 23일 화요일부터 원내재활을 하게 된다. 처음은 3개월 일정이지만 딸에게 아빠도 지속적으로 일할 수 있다는 믿음을 줄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하고자 한다. 일하는 동안에는 저녁모임만 가지만, 쉬는 날이나 원내 일을 대기하는 동안에는 낮모임을 계속 다닐 수 있다. 시간이 나면 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만들어서 가야한다는 것을 멤버 선생님들의 경험담을 통해 깨닫고 있다. 병원에서 모임 다닌다는 열등감은 안 가지려 한다. 내가 언젠가 혼자서 생활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면서 퇴원 후에도 지속적으로 모임과 직장을 다닐 수 있는 힘을 길러야하기 때문이다. A,A.모임, 가족, 직장은 서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물론 모든 것이 잘되는 것은 아니다. 후원자 선생남의 제안은 마치 방학숙제를 계속 미루면서 놀고 있는 초등학생으로 만든다. 오래된 생활습관의 변화와 오늘 할일을 미루지 않는다는 것을 무척이나 강조하시는데, 나는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다. 내 안의 게으름이 항상 보인다. <빅북>을 읽으면서 A.A. 슬로건을 보면서 이대로 꼭 실천하겠다고 반복해서 다짐하기보단 “우리가 성장의 과정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나의 행동이 나의 생각이 <빅북>에 그대로 써져있어, 내가 잘못 가지는 않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는 어느 멤버 선생님의 말씀처럼 그렇게 닮아가고 싶다. 오늘은 월요일, 밤 9시에 재활병동 원장님의 회진이 있었다. 나에게는 백일작전을 잘 진행한 것에 대한 격려와 함께 내가 알 듯, 모를 듯한 말씀을 하셨다. 백일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시고 그전에 반복했던 병원생활과 지금의 병원생활을 잘 비교해 보라는 것이다. 과연 무엇의 달라진 것인가? 어떻게 더 달라져야 하는가? 모든 것에 감사한다. 내가 다시 회복하겠다고 용의를 갖게 해준 다사랑중앙병원 식구들과 후원자 선생님, 협심자 선생님, 그리고 다시 기회를 준 우리 딸과 그 엄마에게. 2016년 2월 15일 |